영화 <한나 아렌트> 씨네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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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연구원, 필름포럼과 함께하는

영화 <한나 아렌트> 씨네토크


지난 6월 13일 토요일 오전 9시. 작은영화관 필름포럼에서 한반도평화연구원 주최로 영화 <한나 아렌트> 씨네토크가 열렸다. 함께 영화를 보고 평화와 통일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하고 연구하는 일환에서 매달 진행되는 한반도평화연구원의 '토요아침극장'. 김선욱 교수(숭실대 철학과), 조현기 프로그래머(필름포럼)이 패널로 참여하고, 전우택 원장(한반도평화연구원)의 사회로 2차 대전 후 독일 전범자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보며 도출해낸 '악의 평범성' 개념과 전후 상황에 대해 나눈 이야기들을 이곳에 담았다.










 전우택 원장(한반도평화연구원)

영화 <한나 아렌트> 씨네토크에 조현기 PD, 김선욱 교수 자리하셨다. 먼저 조현기 PD에게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듣겠다.


 

조현기 PD(필름포럼)

영화 <한나 아렌트>는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여하면서 잡지 <뉴요커>에 글을 싣는 과정을 담고 있다. 대부분의 전기영화와 궤를 달리하는데 재판 과정을 보여주면서 한나의 개념 악의 평범성이 나오는 과정을 담담히, 그리고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보여준다

바바라 수코바라는 독일 배우가 주인공인데, 이 영화의 감독 마가레테 폰 트로타와 New German Cinema(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걸쳐 독일에서 일어난 영화 부흥기. 기존 영화 산업에 만연한 관습으로부터 자유, 상업적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했다. 영화사전)에 함께 하면서 상당히 많은 작품을 같이 했다. 올해 독일에서 개봉하는 영화 <어긋난 세계>도 폰 트로타 감독과 바바라 수코바라가 주연으로 호흡을 맞췄다. 두 사람이 감독과 배우로서 처음 인연을 가진 영화가 <독일 자매>(1981)로 베를린,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타게 된다. 폰 트로타 감독은 감독보다 배우로 먼저 영화계에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폴커 슐렌도르프 감독의 영화에 배우로 출연했다. 바우라 슈쿠오바도 이 감독들과 같이 작업하다가 <독일 자매>에서 만남. 둘의 관계는 이후 죽 이어져왔다. <한나 아렌트>의 경우 배우의 연기가 결정적이었는데 이러한 감독과 배우와의 친밀한 관계가 영향을 주었던 건 아닌가 한다.


 

전우택 원장(한반도평화연구원)


한나 아렌트라는 사람이 가진 철학적, 사유적 의미가 중요한데 한반도에서 사는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북한이라는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있는데, 저 악은 궁극적으로 무엇이 본질인가? 누구의 책임인가? 김정은의 책임인가? 김일성의 책임인가?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또는 그것을 향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감정은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히틀러와 나치가 만들어낸 악의 모습을 응시하던 유태인 중 한 명이 던진 질문에 대해 오늘 같이 고민하는 이유는, 유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철학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로서, 악의 평범성이자 철학자의 평범성, 끊임없이 담배 피며 두려워하고 누군가와 갈등도 빚는 모습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됐다.

 



김선욱 교수(숭실대)

이 영화는 팩트와 픽션이 잘 결합되었다. 픽션의 요소로, 처음에 아이히만이 체포되는 장면을 보면 무자비하게 체포되지 않았다. 독일 비밀경찰이 이름도 개명하고 다른 사람처럼 아이히만에게 당신, 아이히만이죠?” 할 때, 아이히만이 자연스럽게 .”하고 대답한다. 아이히만이 이미 자신을 노출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자신도 체포 당할 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체포 과정이 무자비하지는 않았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비밀 경찰이 체포하고 납치해서 독일로 공수해오는 과정에 불법이 개입되었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있지만 실제로 문제는 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돈을 썼으니까. 또 영화에 배경이 되는 대학이 66 West 12th St. 5th Ave.에 있는 뉴욕 뉴스쿨(The New School)이다. 영화 장면에서 나오는 캠퍼스가 멋진데, 맨하탄 한 가운데 있는데 그럴 리가 없다. 그리고 실제로 아렌트는 전임 교수가 아니었다. 아렌트는 평생 시간강사만 했다. 나중에 프린스턴에서는 청을 받았지만 안 갔다.


 




아모르 문디에서 레스 푸블리카로

저자
김선욱 지음
출판사
아포리아 | 2015-04-3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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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정치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길을 열었던 한나 아렌트(H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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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담배 피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담배가 문제되던 시절은 아니니까. 최근 쓴 책이 <아모르 문디에서 레스 푸블리카로 : 한나 아렌트의 공화주의>라는 책인데 거기 첫머리에 담배 피는 내용을 썼다. 아렌트는 실제로 골초였고 그녀가 찍혀 있는 사진에 담배 피지 않는 모습이 거의 없을 정도다. 나중에 아팠을 때 의사가 담배 피지 말라고 하는데 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담배 피는 이유로 내 건강을 챙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내게 있다고 한다. 담배 피는 것을 통해서 생각하고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며 알리는 것의 중요성을 말한다.

 

아렌트는 1906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다니다가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봤는데 마르부르크 대학교에 진학. 거기 불트만(Rudolf Bultmann)과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있었다. 같이 요한복음 읽으면서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하이데거가 책 <존재와 시간>을 내기 직전인 1926년에 강의를 듣고 거기에 매료가 돼서 러브 어페어가 1년 정도 있었다. 1년 후 하이데거를 떠나고 칼 야스퍼스(Karl Jaspers)에게 박사를 하고 박사 후도 하고 시온주의와 연관이 된다.

 

여기서 두 사람이 중요한다. 먼저 한스 요나스(Hans Jonas, 대표작 <책임의 원칙>).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사건 이후 아렌트와 요나스 두 사람간에 충돌이 일어나고 절교를 한다. 10년 후 다시 만나지만 인간적 교류는 하되 아이히만이나 독일에 대한 이야기는 안 하는 것을 조건으로 교류 이어간다.




책임의 원칙:기술 시대의 생태학적 윤리

저자
요나스 지음
출판사
서광사 | 1994-09-01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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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능력의 절대화와 진보사상으로 심각해진 생태학 적 문제 및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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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한스 요나스



이스라엘 가서 만난 쿠르트 블루멘펠트(Kurt Blumenfeld)는 유대인 시온주의의 대가이다. 아렌트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어렸을 때 집안끼리 굉장히 가까운 사이였고 대학 다닐 때 이분의 특강을 들으면서 한나 아렌트가 시온주의에 굉장히 관심을 가졌다. 자신이 시온주의라고는 하지 않지만 시온주의의 활동을 돕느라고 비밀경찰에게 발각돼서 2주간 구금이 돼서 심문을 받기도 했다.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프랑스로 떠난다. 프랑스에서 잘 지내다가 그 당시 독일에서 유대인이 떠나던 상황. 유대인 2세들인 젊은이들이 절망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북이스라엘로 함께 가서 홈랜드 구경도 시켜주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상담가이자 안내가의 역할도 했다. 그러다 프랑스에서 비시 정부(Gouvernement de Vichy, 19406월 나치스 독일과 정전협정을 맺은 뒤 오베르뉴의 온천도시 비시에 주재한 프랑스의 친() 독일정부. 두산백과)가 시작하면서 수용소가 만들어지고 거기 갇혔다가 탈출한다. 많은 사람들이 탈출했지만 반면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많았다. 아렌트는 서류를 위조해서 탈출했고 남아있던 사람들은 전부 아우슈비츠로 가서 죽었다. 영화에서 한스가 그 일을 끄집어내니까 아렌트가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면서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거기에 대해 굉장한 트라우마가 있다.

 



전체주의의 기원 1

저자
한나 아렌트 지음
출판사
한길사 | 2006-12-1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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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책소개
1951년 출간된 한나 아렌트의 첫 저서로 그녀만의 독특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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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기원 2

저자
한나 아렌트 지음
출판사
한길사 | 2006-12-1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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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책소개
1951년 출간된 한나 아렌트의 첫 저서로 그녀만의 독특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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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조건(한길그레이트북스 011)

저자
한나 아렌트 지음
출판사
한길사 | 1996-08-2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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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과학기술문명으로 파괴된 인간 회복에 초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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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론 (한길그레이트북스 61)

저자
한나 아렌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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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사 | 2004-06-05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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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에 대한 오해를 극복한다 ‘혁명’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던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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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저자
한나 아렌트 지음
출판사
한길사 | 2006-10-10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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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1906년 독일 졸링겐에서 태어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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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미국으로 탈출했고, 영어도 배우고 글도 많이 쓰면서 1950년도에 책 <전체주의의 기원>을 내면서 일약 유명한 학자군으로 뛰어오른다. 비판도 많고 칭송도 많이 받는 책이다. 이후에 나온 <인간의 조건>(1958), <혁명론>(1960)도 굉장히 탁월한 책들. 바로 그때 아이히만이 체포되어 재판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뉴요커라는 잡지는 매우 지성적인 잡지. 처음부터 끝까지 작은 글로 채워져 있는데 종이 질도 좋고 글도 수준이 매우 높다. 거기에 나를 특파원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독일에 다녀와서 쓴 기사가 책으로 나온다. 그리고 유대인 사회에서 거의 매장 당하다시피 했는데 그 여파는 여전히 있다. 2005년도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쓴 마이클 샌델을 만났는데 제가 한나 아렌트 전공이라고 하니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써서 유대계에서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는 말이 첫마디에 바로 나오더라. 학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학자이다. 어떤 사람은 굉장히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굉장히 적극적으로 비난한다


원래 정치적 작업을 해왔지만 이 책이 나온 후 다시 인간이란 무엇이고 악이란 사유란 무엇인가에 천착을 했다. 아렌트가 1975년도에 사망을 했는데 당시 집필하고 있던 책이 <정신의 삶>. 아렌트가 죽은 후 친구였던 메리 맥카시(Mary McCarthy)가 책을 모아서 유고집을 냈다. 원래 3부작인데 첫 번째가 사유란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 하이데거와 아이히만, 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2부는 의지에 대한 문제, 의지와 책임에 대한 문제가 나온다. 3부는 판단에 대한 문제인데 쓰지 못하고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영화에서 한나 아렌트(좌)와 친구 메리 맥카시(우)



정신의 삶 1:사유

저자
한나 아렌트 지음
출판사
푸른숲 | 2004-02-28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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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철학적 전통에 대해 전면적으로 진지하게 도전하고 있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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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oup

저자
McCarthy, Mary 지음
출판사
Harvest Books | 1991-09-01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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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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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picts the experiences of eight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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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택 원장

이게 독일 영화이다. 나치의 문제를 독일의 감독과 사람들이 제작하고 내놓았다는 게 독일의 문화적 힘을 거꾸로 보여주는 것 같다. 3월에 독일 영화 박물관을 방문했다. 나치 시대, 그 이전과 이후 시대에 대해서 전시하고 설명하는데 독일 분단 이후부터 통일 전까지 기간을 서독과 동독에서 나온 영화를 각각 반쪽으로 인정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자신들의 역사를 품에 안고 가려는 독일의 태도를 보니까 독일은 나치 시대의 어두움을 회피하지 않고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면에서 아까 조PD께서 말씀하신 New German Cinema2차 대전 이후 어떤 영화의 흐름을 보여주는 건가?

 



조현기 PD

New German Cinema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나 빔 벤더스, 베르너 헤어조크 같은 감독들이 표현주의나 사실주의 등 네오 리얼리즘에 입각한 세계를 보여준다. (New German Cinema 운동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즘의 대두와 전후 전범국가로서 통제를 받으며 독일 영화계는 활기를 잃고 침체되었다. 26명의 젊은 영화작가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영화구조에서 탈피하고 독일인의 정체성, 중산층의 물질주의적 가치관과 비인간화의 요소들을 영화를 통해 묘사하고자 했다. 시사상식사전) 나치의 과정을 드러나기도 하나 직접적으로 아우슈비츠를 다루기보다 영화상에서 스토리적으로 표현해준다. 특이한 것은 이 영화의 경우 크레딧이 올라갈 때 펀드 국가가 독일을 비롯해, 룩셈부르크, 이스라엘 등 다양한 국가들이 있다. 독일이 이런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문화적 배경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그리고 위안부 등의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는 누가 이야기할 수 있느냐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스라엘에 아렌트가 가서 법정 참관할 때, 그녀가 아이히만을 바라볼 때, 재판장 공간 안에서 직접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흑백 브라운관 모니터를 통해 관찰하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imgarcade.com


www.yadvashem.org




김선욱 교수

실제 재판에 참관했지만 기자로서 취재실에 있었고 중계방송이 나갔다. 재판관들이 세 명이 있는데 독일에서 공부 후 커리어를 쌓은 사람들이라 독일어에 능수능란하지만, 재판장에서는 이스라엘어를 쓴다. 아이히만은 독일어를 쓰고. 그러니까 당시 재판장에서 사용되던 언어가 독일, 이스라엘, 영어, 이렇게 세 가지다. 복잡한 통역과정을 거쳤다.

 


전우택 원장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는 통역자들의 통역 능력을 언급하는 부분이 나온다. ‘불어는 아주 뛰어나고 영어는 들어줄만 한데 뜻밖에 독어가 말이 안 될 정도로 미숙한 통역관을 쓴 게 의아하다. 그래서 아이히만의 발언을 의도적으로 혹은 비의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지만 그런 현상이 있었다는 내용이 책에 나온다. 그렇다면 한나 아렌트가 바라본 악의 문제가 무엇인지 설명을 들은 후 관객분들의 질문이나 코멘트를 듣겠다.

 



김선욱 교수

아렌트는 독일어가 자신의 모국어라고 한다. 독어로 교육도 받고 30대까지 독일에 있었으니까. 독일어와 영어의 현저한 실력 차이가 있었다. 영화에서 짚어내는 몇 가지 중 가운데 첫 번째는 아이히만보고 nobody라는 표현을 쓴다. bureaucrat(관료)란 말도 나오고. 전체 시스템 속에서 유대인 학살의 최고 책임자는 히틀러지만 하나의 행정가로서 탁월하게 그 일을 수행한 것에 불과했다고 한다. 불과했다라는 말을 유대인들이 못 받아들였다


아렌트가 보기에 재판 자체는 정의의 관점에서 진행되어야 하는데 유대인의 역사가 나오고 유대인 학살의 모든 얘기가 나오고 반유대주의가 나온다. 그런데 그렇게 해선 안 된다는 게 포인트다. 실제로 이 재판은 굉장히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재판이 벌어진 곳도 무대를 개조해서 만든 곳이지 실제 재판장도 아니었다. 전 세계로 중계가 되고 있었다. 이 재판 자체가 원래 재판이 가져야 할 본래 취지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 날카로운 지적 중에 하나였다. 어쨌든 그 속에서 아이히만이라는 인물 자체를 볼 때 기능적 관료로서 충실했던 사람으로 봤을 때 그의 문제는 무엇으로 포착해야 하는가가 관건이었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는 전체주의에서 일어나는 일들, 유대인 학살 등을 분석하면서 독일의 나치, 전체주의 체제가 만든 것, 전체 악, absolutely evil이라는 표현을 쓰고 radical evil, 근원적, 근본적 악이란 표현도 사용한다. 근본적 악에 대해 철학적으로 보면 어거스틴은 악은 빛이라는 실체의 부재, 그림자 자체가 힘이 있거나 실체가 있는 게 아니다. 악이란 선의 결여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실체가 있는 것이라면 누군가 창조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할 리 없지 않으냐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의 악의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에게 근본적 악이 있고 심층적 악이 있다고 하면서 radical evil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 관점에서 아렌트가 처음에 칸트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아이히만을 보니까 악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결국 악의 정체가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악당, 괴수, 악마성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고 그가 악마여야 한다는 게 유대인들의 생각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런 악마가 없었다. 오히려 악마라고 하는 것이 실체가 없는 것인데 그 악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아이히만을 비롯해 누구나 시스템 속에서 하나의 기능으로만 자기를 사용할 때, 기능적으로 머리는 돌아가지만 사유가 빠진다. 여기서 사유란 숫자를 세거나 사태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따지는 것을 사유라고 한다. 움직이고 바쁠 때가 아니라 오히려 몸을 최대한 활동을 중지하고 누워있을 때 사유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런 사유가 아이히만에게 빠졌다는 것이다. 사유가 빠졌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면 말할 때 단어가 조화되면서 새로운 단어가 나와야 하는데 그저 관청에서 사용하는 단어, 표어, 관용구가 그대로 사용되고, 때로 앞뒤가 조화롭지 않은 어처구니 없는 문장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면서 아이히만에게는 사유가 결여되었다고 결론내린다.


또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입장의 결여가 있다. 아이히만을 보면서 악의 평범성, 평범한 악이라고 규정하는데 일본에서는 '악의 진부성'이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제가 번역한 악의 평범성이 더 낫지 않나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웃음) mediacracy 이야기도 나오고. '악의 평범성을 세 가지로 말하면 생각하지 못하는 생각의 무능성(Thoughtlessness)‘. 말을 못하는 말의 무능성, 그리고 나를 상대의 입장에 놓지 못하는 능력의 결핍을 이야기한다.

 

한 가지만 영화와 관련해서 말씀 드리면 "악은 extreme하지만 radical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과거에 취했던 칸트의 입장을 버리고 어거스틴으로 돌아간 것이고 악이 드러나는 양태는 굉장히 극단적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또 유대인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을 하는데 유대인 전체가 아니라 일부 집단을 지적하고 문제 삼는다고 한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쿠르트 블루멘펠트가 죽어가면서 이야기할 때 "너는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묻는데 한나 아렌트는 "사랑이란 민족이나 국가가 아니라 친구를 사랑하는 개인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블루멘펠트가 이야기하는 게 이데올로기다.

 


조현기 PD

아이히만이 재판 과정에서 스크린이 보일 때, 처음에는 브라운관 안에서 스크린만 보여주다가 흑백으로 된 재판 장면이 풀스크린으로 클로즈업 해서 보여진다. 아이히만의 표정이나 얼굴 근육이 보이는데 이게 연출이 아니라 실제 기록물인 것 같다. 이 영상은 스티븐 스틸버그 등 유대인들의 아카이브에서 가져온 것이다.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보면 아이히만은 ‘himself’라고 나오는데 기록물이라는 의미다.


 



전우택 원장

김선욱 교수가 번역한 책이 한길사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관심 있으신 분들 책도 보면 좋겠다. 독일 통일에 여러 의미가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독일 통일 이후 동독 지도자들의 재판에 대한 것이다. 나치 시대 지도자들 재판과 매우 유사한 부분이 있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누구를 재판하고 처벌할 것인가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다. 결국 국경을 넘어가는 사람들을 총살한 시행부와 지휘부 몇 사람이 재판부에 섰고 또 호네커(Honecker) 등 나이가 많거나 병중이라는 이유로 처벌하지 않고 넘어가는 일들이 벌어진다. 앞으로 한반도의 통일 문제를 겪으면서도 안게 될 문제와도 연관된다. 이제부터 관객들도 질문, 코멘트 등 함께 나누면 좋겠다.



 

정서연 학생(S대학교)

유대인 지도자에 대해 한나 아렌트가 비판하는데, 그 상황에 대해 궁금하다. 지도자가 어떤 사람들이고 어떻게 협조했는지?


 

이학선 목사(김포, 이주민 사역)

영화 보기 전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고 제 삶에 매우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할 만큼 울림이 컸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죄로 타인의 처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사유 능력의 부재를 말했지만 아이히만의 개인적 성향인 허풍과 열등감도 있다. 하사 출신의 히틀러가 총통된 것을 롤 모델로 여기고 자신에게 주어진 악에 대한 문제를 간과하고 성공 지향적인 삶의 방향성을 추구하지 않았나. 악의 평범성의 배경이 전체주의라고 보는데, 사회 전체주의를 악에 동원하는 것과 허풍과 열등감, 성공 지향을 연결한다면 어떻게 될까.

 


석조은 연구원(한국행정연구소)

크게 세 가지 범주에서 여쭤보고 싶은데 첫 번째,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 대해 연구하러 간다고 했을 때, 그의 진술에 의해 악의 평범성을 개념화했는데 그의 이력, 가정환경 등에 대한 연구나 조사가 없었는지 궁금하다. 두 번째로 한나 아렌트가 철학자로서 사유를 많이 이야기하는데, 일부러 분석하지 않았다는 대사가 있다. 아이히만의 행위 이면 가운데 사유의 부재처럼 보이지만 그 같은 체제와 시스템 속에서 사유함에도 불구하고 생존을 위해 무사유로 자신을 포장하거나 또 다른 방식으로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누락된 부분은 없는가. 마지막으로 질문이자 코멘트인데 제가 한나 아렌트를 높이 보는 것 중 하나가 개인적 감정이나 지역적, 민족적 관점에서 사건을 보기 전에 인류적 관점에서 접근한 것. 그래서 포괄적으로 악의 문제로 볼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심혜영 교수(한반도평화연구원 연구위원, 성결대 중어중문학과)

먼저 영화에서 양적으로 많이 나오지 않았지만 아렌트와 하이데거와의 몇 번의 대화를 생각해보면, 젊은 아렌트가 찾아갔을 때 하이데거가 사유는 외로운 거다고 하면서 사유하려는 자의 본질로서 사유와 외로움을 결합해서 볼 수 있었다.

두 번째, 왜 당신이 총장직을 수락했냐고 했을 때 나는 어린아이와 같다. 정치에 대해서는. 나는 배우면서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까 아렌트가 하이데거에게 왜 해명하지 않았냐. 총장직을 수락하고 정치적 오명을 쓰는 행위를 감수하는 이유로, 사유하는 자로서 자기 본질에 충실하려고 한다는 중요한 핵심을 왜 이야기하지 않느냐고 하는데, 아렌트가 마지막에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철저히 배척당하면서까지 감수했던 것이 하이데거와 비슷하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이 든다. 사유란 어떤 한계를 끊임없이 뛰어넘으려는 자유가 본질인데 아렌트가 뛰어넘으려는 한계의 영역까지 같이 갈 수 있는 친구는 거의 없었다. 한계 안에서 우리이기를 원했지 한계를 벗어나서 우리가 해체되는 개인, 사유하는 개인으로 남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 사유할 능력도 없고 사유하고 싶지도 않게 하는, 그게 이데올로기의 힘인데. 마지막 강의에서 아렌트가 담배를 피우면서 강의할 때 감시하러 온 심사관 교수들은 굉장히 냉소했지만 학생들은 박수를 쳤다. 그런데 열광적으로 박수 친 학생들의 2-30년 후 모습이 심사관들과 다를까. 현실은 끊임없이 사유를 어떤 틀 안에 고정시키고 그것을 넘어설 수 없게 하는 힘이 있는데 그렇다면 자유를 향하는 사유가 현실과 대중을 선도하는 힘을 가질 수 있을까. 한반도평화연구원이 아렌트처럼 정말 이것이 옳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입장을 용기 있게 이야기할 때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그 생각이 옳다는 신념을 공유하면서 현실을 바꿔나가는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이영석 팀장(아름다운 동행)

악의 평범성과 동시에 악의 비열함이란 단어를 생각해 봤다. 청문회 때 5.18 군사독재나 박정희 독재 정권 시대 많은 관료들이나 사람들이 변명을 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절대 권력 앞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개인적인 양심의 문제나 분별의 문제를 피해갔다. 거대한 악 앞에서 개인의 책임의 문제에 대해 회피하는, 그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분노했고 유대인들도 그런 반응을 보였다.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누구든 악에 빠질 수 있지만 책임성에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 보면 아이히만이 재판 이전에 확신범이라는 것. 나치의 신념을 추종했기 때문에 재판에서는 평범했다고 말했을지 모르나 그가 선택하고 결정한 모든 것들이 그도 그 신념에 동화되어 있었으므로 그런 행동을 했다고 본다. 그 대비점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박영철 교수(한반도평화연구원 연구위원)

박정희 시대 김재규와 전두환이 자서전을 쓴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장세동 등 양쪽의 대비가 생각났다. 악의 평범성의 신학적 사고의 진전도 궁금하다. 추천 받고 읽지 못한 책 중에 월터 윙크의 <사탄의 체제와 악의 >란 책이 있는데 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체제로 존재한다는 내용이라고 들었다. 그림자처럼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전제하는 것과 신학적 입장처럼 체제가 존재하고 인격적이라고 보고 사유하는 것과의 어떤 차이가 있을지 궁금하다.


 

전우택 원장

한나 아렌트 개인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있는데 사실 신이나 악에 대해 실체적 인정을 하지 않는 입장에서 쓴 글이다. 기독교는 이에 반대 입장이기 때문에 악의 인격성이나 실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이 자리에 박정수 교수가 계시기 때문에 잠시 후에 부탁을 드리겠다.

 

 


이해완 교수(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한나 아렌트가 악을 쉽게 정당화하는 건 아닌가 하는 책임의 문제를 제기해주신 분의 말씀에 동의한다. 그러나 아렌트가 책임을 부정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책임은 당연히 져야 하고 그 책임을 어떤 특별한 한 화신에게 지게 하는 것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성찰되어야 하는 것에 아렌트의 초점이 있지 않았을까. 사실 기독교에서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이 근본 신앙 체계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악인으로 정죄할 때 선인의 자리에서 하게 되기가 쉽다. 누구에게나 악의 요소가 있고 내게도 있다. 누군가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적극적인 공감 능력을 갖지 않으면 나 역시 어마어마한 살인에 가담하는 평범한 존재일 수도 있다. 저 사람과 나는 그런 평범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남북 사회 등, 갈등이 남과 나를 나누고 흑백을 나누는 것보다 이런 철학자의 사유가 아리송할 수 있지만 더 깊이 성찰하고 사유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부분에서 아렌트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책임이나 방임이 아니라 그들의 악을 책임지고 더 큰 희생에 더 큰 책임이 뒤따르는 것. 완전히 남의 일이라고 분노하며 타인의 입장에만 서고 성찰하는 입장에 서지 못한다면 악을 더 키우고 새로운 악을 만드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김선욱 교수

관객분들의 질문을 모두 답하기에는 시간이 없어서 최근에 썼던 책 <아모르 문디에서 레스 푸블리카로> 광고를 해야겠다. 전체주의의 기원부터 유대인들의 책임 문제, 유대인들이 어떤 정치를 해야 하는가? 현재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국가를 세운 게 과연 옳은 결정이었느냐에 대한 내용이다. 아렌트는 반대했습니다만 재판에 대한 이야기, 인류 범죄의 의미 등이 나와 있다.

 

질문하신 여러 가지에 대해 아렌트의 대답이 있고 저의 대답이 다를 수 있다. 답이 없는 부분도 있다. 그야말로 간단히 말씀 드리겠다.

 

유대인 지도자층에 대해서 질문하셨는데 원래 유대인들이 지역마다 흩어져 있지만 계층도 있었다. 1800년대 말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유대인 옷 벗고 사회로 들어와 있는 부류가 있었고 하층을 형성하거나 궁정 재정 관리인 등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아렌트가 문제 삼는 것은 독일어로 유덴프라이, 소위 유대인 없는 지역을 만들겠다며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지역 사회에서 솎아냈다. 처음엔 집단수용소로, 그 다음에는 죽음의 수용소로 데려간다. 이게 총 600만 명이다.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죽인 게 아니라 집단으로 죽였는데 집단이 움직일 때, 게토에 넣고 위원회를 조직하게 만들어 위원회가 컨트롤하게 한다. 게토에 벽이 있고 그 안에 유대인 집단이 있고 거기에서 위원회가 우두머리 행세를 하는 게 있었다. 독일의 요구를 동조나 반항은 아니더라도 협조는 안했다면. 그런 유대인 위원회의 역할이 핵심적이었다는 말씀을 드리겠다.

 

허풍과 열등감에 대한 부분은 저보다 전우택 원장에게 심리적인 부분에 대해 들어야 될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전체주의와 악의 역할. 악이 나오기까지 전체주의가 어떻게 작용했는가. 아렌트는 전체주의적 요소와 전체주의를 구분한다. 오늘날에도 전체주의적 요소는 들어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전체주의 국가는 아니다. 전체주의 국가란 특정한 시대 실재하는 시스템을 가리키는데 전체주의 국가가 작동할 때, 이데올로기와 공포,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비밀경찰을 만들어서 공포를 조장하고 옆의 사람을 믿지 못하게 해서 철저히 개별화로 만든 다음에 이데올로기 주입해 이데올로기로만 사유하게 만든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주어진 생각, 이데올로기 체계로 사람을 장악하고 공포라는 체제로 꾸려나가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사회도 관료 체제가 있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게 드라이브 거는 성공주의, 출세욕, 그런 것들이 누구에게나 있다.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수 없지만 그 과정 속에서 작동하는, 그리고 국가가 개입하고 컨트롤하는 요소 속에 전체주의적 요소가 없겠느냐. 그것을 여실하게 들여다보자 하는 것이 책 <전체주의의 기원>을 쓰게 된 취지였고 악의 평범성이라는 것도 우리의 책임을 다시 묻자는 장치로 썼다고 말씀 드릴 수 있다.

 

또 자기 포장에 대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특별히 유대인의 문제를 인류의 문제로 포착한 것은 실제로 히틀러가 유대인을 인간 아닌 존재로 만들어서 죽였으니까. 그러면 살인이 아니지만 인간이라고 선언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다. 유대인 학살이 시작된 것이 뉘렌베르크 강령이었다. 2차 대전 후 재판이 뉘렌베르크에서 열린 이유가 강령이 만들어진 곳에서 심판하겠다는 것이다. 그 재판장에서 유대인 학살을 인류에 대한 범죄라고 이름 붙였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이것을 법적, 철학적으로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했는데 아렌트를 통해 해결하게 되었다.

 

하이데거와 연관해 실제 연설을 읽으면 나치하고 똑같다. 취임, 홍보 연설도 하는데 유대인 사이에서 아렌트 같은 독특한 몇 사람을 제외하고, 심지어 철학자 중에서도 하이데거를 싫어한다. 스승인 조가경 교수(뉴욕주립대 석좌교수)가 펜실베니아대에서 하이데거에 대한 특강했을 때의 일이다. 철학과 학과장이 유대인인데 하이데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그래서 하이데거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고 하니, ‘특강 전에 당신과 악수를 했는데 그러면 이 손을 안 씻어도 되겠네요.’라고 할 정도로 하이데거에 대해 부정적이다. 실제 하이데거 철학에 나치적 요소가 없는가. 하이데거 철학에 묘한 부분이 있다. 이에 대해 외국에서 여러 논문이 나왔고 독일에서 출판이 안 돼서 프랑스에서 나중에 출판이 되기도 한다. 서울대 박찬국 철학과 교수의 하이데거와 나치즘과의 연구도 있다.

 

심혜영 교수가 지적한 부분, 사유의 깊이가 관계를 해체할 때의 문제는 제 아들이 영화를 보고 친구들 다 잃을 정도면 사유에 문제 있는 겁니다.’고 했다.(웃음) 그런데 진짜 친구들은 남아있다. 친구와 사유 문제는 좀 더 들어가야 할 주제인 것 같다.

 

그런데 진짜로 악의 문제로 들어와 5.18 일으킨 사람이나 히틀러는 어떡하느냐?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할 것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악의 평범성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우리가 이러한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각심을 일깨우고 열심히 하고 있는 이 일이 무엇에 기여하는가 묻게 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 악을 보편화시킨 것 때문에 유대인에게 문제가 되긴 했지만 유대인 바깥 세계 철학자들에게는 엄청난 책이다. 이건 철학책이 아니라 보고서. 그런데 이 책이 엄청난 철학 책과 논문을 생산해낸다. ‘악의 평범성으로 세상 모든 악과 나쁜 일을 해결할 수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케이스마다 복잡한 부분이 있어서 다른 것을 동원할 필요가 많이 있을 것 같다. ‘악의 평범성이 가지는 의미는 있지만 이것 하나만으로 해결된다고 볼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악의 인격성, 그 실체성에 대해서 신학자 어거스틴은 반대를 했다. 그것이 실체라면 그것을 창조한 존재는 하나님인데 하나님 안에 악한 요소가 있어야 하니까 소위 변신론적 관점, 악의 기원에 있어서 선을 명확히 긋는다. 이런 신학적 정통성 속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문제는 악마의 존재. 아렌트의 관점에서만 말씀 드리면 사람들은 악마의 화신처럼 생각했지만 그렇게 볼 수 없었다. 히틀러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때, 악마의 화신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어렸을 때 정신적 문제라든가 유대인들이 유럽 사회 속에서 가지는 역사적 기능의 문제로 분석이 들어가지. 히틀러는 악마였다고 하면 그를 조정하는 악마가 문제가 되고 히틀러 자체에서 벗어나게 된다. 아렌트가 명확하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악마가 아니라 개인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악에 대한 면죄부나 정당화도 아니고 책임을 개인의 차원에서 물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었나 싶다.

 

넬슨 만델라가 감옥에 갇혔다가 구출된 영화 <굿바이 만델라>에서 간수였던 사람이 나온다. 그 간수가 아이히만과 정 반대되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내가 뭘 하고 있지?’ 묻고 간수 역할을 그만 둔다.

 


박정수 교수(한반도평화연구원 연구위원, 성결대 신약학)

반유대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전체 영화의 배경이 되고 중요한 주제이며 인류사의 큰 주제였다고 생각한다. 그 주제를 중심으로 말씀 드리면, 이 영화는 반유대주의(히틀러)를 비판하는 유대주의의 전체적 속성을 비판한다. 비판의 도구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고, 더 구체적으로 감정이나 정치가 아니라 개인의 생각, 사유, 힘 이런 것들로 풀어보았다. 아렌트가 시오니즘에 의한 이스라엘 건립을 반대했다는 것이 가장 분명한 자기 주장이고 자기 삶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남북 문제가 중요하지만 인류 평화에서 이스라엘 문제도 중요하다. 그런데 왜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는 전체주의적 속성이 문제인가? 한나 아렌트가 비판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그게 유대인들의 자기 정체성, 민족성에 대한 자기 정체성이 해체되는 지점이다. 이스라엘을 성경에서 말할 때,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됨은 메시야적 존재로 독특한 민족적 자의식을 가진다. 높은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인생은 수난과 우여곡절이 많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1948년 독립까지, 기원전 143년부터 기원전 63년 로마에 다시 멸망하는 80년을 뺀다면 2500년 동안 민족적 외현인 국가 없이, 전체적 틀을 가지지 못한 국가로서 존재 양식이 독특한 민족이다. 하나님은 선택한 백성을 왜 이런 존재 양식으로 수천 년 존재하게 하셨을까. 고난을 숙명으로 지고 태어난 존재, 평생 고난을 짊어지고 가는 인생, 한 개인이 이럴진대 민족의 집단적 자의식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서 민족으로서, 전체로서 메시아니즘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국가,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고난 받는 민족으로 인류의 대표로서 부르셨는데 그걸 짊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이것에 대한 저항으로 나온 게 전체주의적 대응이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않나. 고난 받는 종은 전체로서 이스라엘이 감당해야 할 자의식, 이스라엘 민족 Identity였는데 신약에서 한 개인이 짊어져야 할 것으로 바뀐다고 본다. 근대에 개인이 발견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이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통해 한 개인이 인류의 역사 전체보다 위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은 한 인간 생애의 위대함, 곧 생각하는 삶의 위대성, 생각하는 개인적인 행위, 생각하는 사유의 위대함을 부각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렌트에서 제가 관심 가지는 것이 영화 속에서 나온 것처럼 사유함이란 이해함이란 그 자체가 곧 용서라는 부분이다. 국가나 법을 통해 얻은 용서가 아니라, 메시아적 자의식을 가진 한 개인의 용서가 전체주의적 폭력으로부터 개인이나 공동체를 구원한다는 것이 신약의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한반도평화연구원에 적용한다면 손양원의 용서라고 생각한다. 최근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이 이야기는 손양원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오늘의 문제이다. 한 개인이 운명의 고난을 지고 가는 게 무엇인가. 남북, 한일의 관계를 지고 가는 사람으로서 손양원의 딸인 손동희와 손양원이 용서한 양아들의 이야기, 조카와 고모의 이야기는 굉장히 감동적이었다.

 



전우택 원장

한나 아렌트의 책은 뿔 달린 악마와 같은 악인의 이미지만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악이 사실 얼마나 평범한 사람들 속에 평범하게 들어와 있는지 이야기했고 모든 사람을 당황시켰다. 전형적인 예로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의 소위 더러운 전쟁기간이 있었다. 그때 사라진 대학생들이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 대학생들을 고문하고 죽인 사람들, 법정에 선 가해자들이 너무 순박한 젊은이들이었다는 것에 세계가 충격 받았다. 제 집의 동물도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운 전쟁의 하수인이었다는 점.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로 또 논란이 되었다.

 

결국 악이란 조폭 영화에서 등장하는 조폭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런 면도 있을 수 있지만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한나 아렌트가 용기있다. 집단 전체가 당연하게 여기고 정체성으로 여기는 것에 대해 반대되는 글 하나 쓰는 게 사실 자살행위다. 한국도 우파/좌파 등 유대사회 못지않다. 그런데 한나 아렌트가 수용소에서 나온 것보다 글 쓰는 게 더 용기였겠구나 생각했다. 우리는 이 시대를, 통일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의제를 앞두고 사는 사람으로서 어떤 용기를 가져야하는가 생각한 영화였다.

 

바쁘신 가운데 참석해주시고 좋은 질문해주신 분들, 조현기 PD와 김선욱 교수께 감사드립니다. 대답이 충분치 않다고 여기셨다면 김선욱 교수의 책을 참고해 주시고. 다음 주 목요일(6/18) 한반도평화연구원에서 동아시아의 평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주제로 공개 포럼을 한다. 메르스 시대에 열리는 특별한 좋은 포럼이다.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린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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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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