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바이어던>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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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괴물

<리바이어던>


최 성 수


※ 글의 특성상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영화 <리바이어던>으로 토론하기 [자료]


 



러시아 영화 <리바이어던>은 러시아 북쪽에 위치한 한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물론 허구다. 영화는 시장(市長)이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별장을 짓겠다고 발표하는 바람에 아름다운 해변에 있는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 한 남자 콜랴와 그의 가족에게 일어난 불행의 이야기다. 콜랴의 불행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첫 번째 아내와의 사별, 시장의 개발계획으로 갑자기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위기, 설상가상으로 아내와 친구 사이에서 일어난 불륜, 그리고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의 방황과 아내의 죽음 등이 연이어지기 때문이다. 한 인간에게서 이처럼 큰 불행이 한꺼번에 일어날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다.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야기지만 탄탄한 내러티브 덕분에 충분히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영화의 핵심 이미지는 제목 리바이어던(괴물)’에서 드러난다. 성경 욥기와 홉스의 글에서 나오는 상상의 동물 리바이어던을 제목으로 삼은 것은 영화가 종교와 정치를 서로 연관관계 속에서 보고 있음을 암시한다. 리바이어던은 콜랴가 직면하고 있는 폭력적이고 부조리한 국가를 기표한다. 봉준호 감독은 정치적인 강대국을 우리 안에 활약하고 있는 괴물로 형상화시켰지만, 쯔비아진세프 감독은 보이지 않는 괴물을 말하고 있다. 사실은 국가라기보다는 권력의 문제다. 권력은 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행사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권력은 자주 법 위에 군림하며, 그 정당성을 종교에서 구한다. 그래서 불의한 권력이나 부당한 권력 행사는 괴물 같은 실체로 작용한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오직 이해관계에 있을 때만 그 실체가 드러나는 괴물이다. 도대체 누가 정치와 종교가 함께 만들어낸 괴물과 맞서 싸울 수 있고 또 기꺼이 싸우려고 하겠는가. 왜냐하면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시도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콜랴는 괴물의 피해자이며, 영화는 바로 그런 피해로 인해 한 인간이 어떻게 몰락해 가는지를 보여준다. 아내와 친구의 불륜, 방황하는 아들, 그리고 이어지는 아내의 죽음은, 마치 욥에게 갑자기 일어난 연속적인 불행처럼, 설상가상으로 콜랴에게 일어난 불행의 목록에 해당한다. 특히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일은 선거를 앞두고 불안해하는 시장과 종교적인 자문을 주는 신부와의 대화다. 이 대화에서 불의한 권력에 종교가 어떤 방식으로 기여하는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의 일을 하고 있으니 걱정 마시오. ... 

우리가 같은 목적을 위해 일할지는 모르나 당신에겐 당신 영역이 내겐 내 영역이 있소. ... 

권력은 신에게서 나오고 권력이 있는 곳에 힘이 있소."


"내 손으로 지은 집이야. 평생을 이 땅에서 살았어."


<리바이어던>은 부당한 권력에 희생당하는 콜랴의 불행을 통해 욥의 이야기를 패러디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예컨대, 그가 겪는 불행의 순간에 아내와 자녀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깊은 상처를 안겨줄 뿐이다. 욥의 불행이 강도와 자연재해에서 비롯한 피해라면, 콜랴의 불행에는 불의한 권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모양은 달라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로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는 사실은 동일하다.

사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받아들이기 어려운 불행을 만났을 때, 직면하게 되는 질문은 동일하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종교에서 대답을 찾았기 때문에 모든 종교는 인간의 불행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불교는 업을 이야기하고, 유대교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말하며, 기독교는 하나님의 섭리, 곧 밝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다스림의 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불행한 현실에 직면했을 때 그것으로 좌절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의 현실로 받아들여 희망을 가지면 구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숙명으로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원인을 찾아 그것을 바로잡는 노력을 함으로써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고 한다.

콜랴 역시 불행의 현실을 만났을 때 동일한 질문으로 고민한다. 신앙이 없으니 신에게 물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기에는 힘이 없다. 그의 고민은 결국 해결되지 않은 채, 오히려 살인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고 그의 집은 해체된다. 영화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관객에게 떠넘기려는 의도인 것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대답할 수 없는 일임을 말하려는 것일까?

비록 대답은 어렵다 해도 영화에서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불행의 시작이 부당한 권력 행사에 있으며, 다른 하나는 이런 권력을 정당화 시켜주는 주체가 종교라는 사실이다. 시장은 재선에서 실패할 것 같은 불안과 불의한 권력 행사가 미치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마다 정교회 사제에게 자문과 위로를 구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금전적으로 교회를 후원한다. 교회와 권력의 공생관계는 이렇게 성립되고 또 유지되었다. 짜르 정부시대에도 실상은 마찬가지였다. 교회는 권력에 붙어 권력 위의 권력을 누렸고, 또한 온갖 부정부패로 가득한 관료들을, 만일 그들이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고 또 후원하고 있다면, 종교적으로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서슴지 않았다. 감독은 이처럼 당대의 부조리함을 경험하면서 유사했던 과거를 상기하며 경고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은 아닐까?

권력의 기원과 현실의 상호관계 문제는 그 복잡성 때문에 논외로 하자. 문제는 부당한 권력 행사와 교회의 관계다. 권력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해서 교회가 모든 권력행사에 무조건 협력해도 좋다는 의미를 함의하지는 않는다. 권력은 자신을 관철하는 힘이 있다. 따라서 권력 행사의 정당성은 반드시 검증되어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권력 행사는 법에 근거하고 있고 또한 국민 다수의 동의를 지향하지만, 불의한 권력의 특징은 정당한 검증을 무시하고 그것을 초월적인 힘에 기대하거나 혹은 권력 집행의 정당성 자체를 묻지 못하도록 권력을 휘두르는 태도로 나타난다. 부당한 권력 행사 때문에 당해야 하는 희생은 명약관화한 일이며, 그로 인해 파생되는 불행은 국민의 몫으로 떠안을 수밖에 없다. 권력 자체는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해도 부당한 권력 행사에 교회가 동의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는 정당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속출하는 희생자 때문이다. 불의한 권력 행사는 국민들에게 보이지 않는 괴물과 같은 존재다. 개인이 아닌 교회가 맞서 싸워 해결해야 할 문제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대 러시아에 만연해 있는 부당한 권력 행사와 종교 사이에 성립되어 있는 공생관계의 실상을 폭로하는 영화이지만 중요한 이슈에서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과 교회의 공생관계가 연상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영화 <리바이어던>으로 토론하기 ☞ www.cricum.org/818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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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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