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소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푸른 소금>(이현승, 2011, 15세)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사람의 변화는 본질적으로 어렵다는 말이겠다. 어쩌면 단순히 어려움을 넘어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변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한 번 발현된 본성은 그대로 그 사람의 캐릭터로 굳어진다. 편견과 차별을 유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만일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문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성경은 물론이고 기독교 역사가 증거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변화를 모르는 것이며, 또한 그런 변화를 가능하게 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하나님은 마땅히 죽어야 하는 이유로 가득한 인간을 사랑하셨다. 매우 귀히 여기셨기 때문에 당신 아들의 희생까지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인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수많은 사람들은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갔다. 그런 증거들을 교회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통념을 나는 반대한다.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직접적으로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푸른 소금>에서 필자는 사람의 변화와 그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성찰할 수 있었다.

이현승 감독은 여러 작품에서 비쥬얼한 측면에 각별한 신경을 써왔다. 색을 통한 영상미 구현은 물론이고 또한 색이 갖는 느낌을 스토리 안에 담아낸 것이다. <그대 안의 블루>가 제31회 대종상에서 미술상을 수상했다는 이력이 잘 말해준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서 “블루”는 적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시월애> 역시 푸른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푸른 소금>에서 푸르름은 느와르 영화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검은 색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푸른색과 관련해서 필자기 기억하는 것이 있다면, 피카소의 청색시대이다. ‘청색시대’란 1901년에서 1904년까지의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청색으로 인해 붙여진 이름인데, 피카소는 자신의 가난한 삶과 우울한 정서를 청색으로 표현했다. 굳이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들먹거리지 않아도 블루는 충분히 멜랑콜리를 느끼게 한다.

깊이 침잠할 듯한 고독과 우수를 나타내는 블루와 하얀 색 결정체 소금은 묘한 대조를 이룬다. 물론 바다와 하늘의 푸르름으로 둘러싸인 염전을 배경으로 연출된 마지막 장면을 염두에 두고 만든 제목이겠지만, “푸른 소금”은 소금 자체가 갖는 생명력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한다. 왜냐하면 어둠에 둘러쌓인 블루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빠져들어가 존재마저도 삼켜버릴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데 비해, 소금은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 죽어가는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고 또 썩어가는 것을 썩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미 영화 제목에서부터 영화는 킬러와 목표물로서 두 사람의 만남을 그렇게 규정해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존재감이 상실되는 순간에 진가를 발휘하는 의미를 “푸른 소름”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조직의 보스로서 은퇴하여 식당을 개업하여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는 두헌에게는 깊은 고독과 우수로 가득하다. 비록 요리 학원을 다니기는 하지만 언제나 혼자고, 학원이 끝난 후에는 바닷가에 하루 종일 머물러 있다가 집으로 간다. 자신으로 인해 엄마가 죽은 사실에 대해 깊은 회한을 느끼며 살아간다. 감독은 그의 주변을 언제나 블루 조명로 채색함으로써 그의 고독하고 우수적인 정서를 표현했다. 두헌은 캐릭터상 푸른 존재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세빈은 전직 사격선수다. 교통사고 이후에 사격을 그만두어야 했고 또 사채 빚을 갚기 위해 두헌을 감시하는 일을 하게 되고, 마침내는 그를 제거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친구와 함께 거친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세빈이나, 조직을 떠나 식당개업을 위해 요리학원에 다니는 동안에 오히려 조직으로부터 배척되는 두헌, 두 사람 모두 고독하기는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서로 떨어져 있을 경우 압도하는 고독으로 인해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는 달랐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만남 사이에는 마치 염전에서 오랜 수고 끝에 마침내 소금이 결정되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력이 되는 것이 형성되고 있었다.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다. 특히 두헌은 세빈과 친구를 위해서 죽음의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찮게 여겨지는 존재였지만, 두헌에게는 매우 소중한 존재다. 그녀를 대하는 그의 마음, 그것으로 인해 그를 죽이기 위해 접근했던 세빈의 마음은 흔들린다. 그리고 마침내 두헌을 위험에서 구해낸다.

영화는 음식이라는 소재를 통해서도 두 사람의 관계와 의미를 성찰한다. 음식의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누군가에 의해 요리되지 않으면 맛으로 거듭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두 사람의 관계 역시 그렇다는 말이다. 비록 우울한 정서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두 사람이지만 함께 있을 때 그리고 서로가 서로 안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고자 했을 때 색다른 맛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두 사람이 서로를 보는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조직의 사람들에게 두헌과 세빈은 자신들의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한 도구이다. 거기에는 아무리 오랜 시간 동안 서로 관계를 가졌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단지 소비될 뿐인 소모품에 불과했다. 영화가 두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엮어가는 주변의 이야기들이 다소 느슨하게 진행되어 무게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받지만, 송강호와 신세경 두 배우의 압도적인 연기로 인해 그런대로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카카오스토리 구독하기

게 시 글 공 유 하 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밴드

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미지 맵

    웹진/문화 다른 글

    댓글 0

    *

    *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