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박성관] '새로운 무신론'에 대한 한 그리스도인의 변증 - 기독교와 무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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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무신론에 대한 한 그리스도인의 변증


                                                                                          박성관 박사 (문선연 객원연구원)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도전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무신론(atheism)입니다. 무신론에서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설사 하나님이 존재한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최근 서구 기독교의 새로운 현상은 ‘무신론자’들이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입니다. 국내 대학가에서도 무신론 동아리가 만들어지고 있고 스스로를 반종교주의자가 아닌 타종교의 다양한 생각을 존중하는 사람이라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신론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무신론에 대한 대답의 어원에서 변증이라는 말이 시작됩니다. 사실 성경은 어떻게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변증하는 변증서이기도 합니다. 신약성서에서 변증의 의미는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행22:1, 빌1:7, 벧전3:15-16). 바울은 사도행전 17장에서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변증하는데, 예수와 부활이라는 공격받기 쉬운 주제를 다룸으로서 오히려 기독교의 장점을 부각시켰습니다.


무신론자들이 질문하는 주요 쟁점은 신정론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 즉 고통이나 악, 그리고 세월호같은 불행한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로부터 시작합니다. 또한 정치인이나 연예인과 같이 유명 인사들이 발표하는 극단적이고 무조건적인 신앙 고백들과 대형교회 목사들의 실수가 교회 공동체에 많은 피해를 주는 안타까운 일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집중하죠. 물론 신앙인들의 고백과 행위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할 장치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기독교 비판이 그리스도인들의 사적인 신앙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상당한 공헌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 변증을 통해 누군가를 설득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논리적인 변증은 오히려 무신론자들의 반대 의견을 부추기게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증은 필요합니다. 이 글에서는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논리적 모순을 기독교신앙 입장에서 변증하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무신론은 신 그 자체를 절대 부정하기보다는 어느 특정한 신 개념을 부정하는 입장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서구의 전형적인 무신론은 19세기와 20세기 초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에 의해 발전했습니다. 이들의 이념도 결국은 근대 유럽과 미국에서 자라난 신 개념에 대한 대응이자 그에 좌우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최근의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좀 다른 경우입니다. 이들은 오로지 근본주의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가 만들어낸 신에 주목하며 그것이 종교의 본질이자 핵심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들이 비판하고 있는 근본주의는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신앙 전통을 왜곡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무신론자’들(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샘 해리스, 대니얼 데닛)은 전통적인 유럽뿐 아니라 좀 더 세속적 사회인 미국에서도 엄청난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저서가 널리 읽힌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신 개념에 당황해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들 저서들은 종교에 대한 비판이 도덕적으로 시급하게 요구된다고 주장합니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같은 경우에서, ‘종교는 악이며,’ 심지어 히친스는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서, ‘종교는 모든 것을 타락시켰다’고까지 주장합니다. 종교적 폭력으로 히친스보다 더 합리적인 접근을 하는 해리스를 포함한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창조론과 반대되는 진화론적 입장입니다.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특정한 신개념을 비판한다


그러나 새로운 무신론자들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신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 신자개인이나 공동체에 의해 드러난 특정 신 개념에 대한 비판입니다. 특히 이들의 치명적인 약점은 최신의 신학자들과 논의를 피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다보니 신학의 초보적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K. Armstrong)에 따르면,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좀 더 주류 전통을 대변하는 신학자들과 대화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진화심리학이라는 첨단 학문을 하는 최고의 지성인들이 다른 학문의 영역을 비판할 때, 최근의 이론들(신(新)신학)과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은 최소한의 기본적인 상식도 없다는 것이죠.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 문학평론가요 가톨릭 신자인 테리 이글턴(T. Eagleton)도, 디치킨스류(도킨스와 히친스)의 자기모순은 종교를 유아기적 단계로 보면서 인류 발전의 걸림돌이라 생각하지만, 결국 자신들은 무신론의 종교화를 내세우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또한 이들은 종교의 폭력과 악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된 자본주의 시스템의 해악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물론 디치킨스가 기존 종교를 비판하는 가운데 종교문제에 죽비를 든 아동에 대한 성직자의 성적 학대와 종교의 여성비하를 지적한 것은 칭찬받을 일입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한쪽으로 치우친 이들의 일방적인 시각에서의 기독교비판은 결국 실망스러울 정도로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으로 합리적 이성과 믿음 가운데 어느 쪽이 세상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까요? 초월적 의미를 구현하는 믿음에 의해 지탱되지 않는다면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만약 기독교가 없으면 무엇이 이 세상에 대한 대안이 될까요? 해리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믿음이야말로 종교의 핵심입니다. 그에게 믿음이란 증거와 부합하지 않는 신념에 대한 확신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과학과 신학적 입장에서 글을 써 온 존 호트(J. Haught)는 이것은 ‘믿음’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인류의 미래에 종교적 토대가 필요 없다고 말한 이들도 있지만, 종교학자 존 티한(J. Teehan)은 <신의 이름으로>에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폭력과 증오에 주목하면서 종교적 토대는 항상 필요했었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논의는 참 믿음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인류가 기독교신앙(Christianity)으로부터 전혀 혜택을 받지 못했을까? 


사실 인류 가운데는 기독교적 가르침에 따라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히친스는 ‘세속적 자유주의자는 과학에 어긋나거나 이성을 능욕하는 모든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믿음이 과학과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글턴도 <신을 옹호하다>에서, ‘이성을 능욕하는 모든 것을 불신해야 한다는 히친스의 믿음이 합리적인 믿음의 한 예라면, 모든 믿음은 맹목적이라는 그의 믿음은 비합리적인 믿음의 사례’라고 말합니다. 이성의 능욕을 말한다면,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대한 히친스의 지지가 바로 그런 경우일 것입니다. 도킨스 자신은 과학기술이 인류에게 초래한 엄청난 실패와 재앙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이 믿음은 단순한 신념의 결과가 아니라 의지가 포함된 신앙(faith)입니다. 기독교신앙은 전인격적으로 성서의 가르침대로 맡기고 따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무신론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실제적 무신론(practical atheism)입니다. 철학자이면서 기독교인인 강영안은 <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에서, 우리의 교회 현실에서 중요하고 더욱 심각한 것은 바로 이 현실적, 실제적 무신론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론적 무신론자들은 교회 바깥에 있지만 현실적 무신론자들은 교회 안에 있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것이 바로 기독교인들 가운데 있는 무신론’이라고 주장합니다.이와 같이 머리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바로 현실 속에서 무신론자들입니다.


앙드레 지드 <탕자, 돌아오다>와 탕자의 비유 이 두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아우는 형이 있는 집을 떠났습니다. 형이 있는 집은 ‘현실적 무신론자들’이 사는 사랑과 헌신이 없는 교회(예수 당시 유대교)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우는 사랑이 없는 집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형이 없는 집 밖에도 계시고 어디에나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집나간 아우는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음의 한계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이 기다리는 영원하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고민은 아직도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다 무신론이 종교가 되었을까요? 기독교가 ‘사랑’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어령은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에서, ‘아버지에게 복종할 줄 아는 사람은 반드시 형에 대해서 반항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순교자가 생기고, 마르틴 루터, 쟝 칼뱅 같은 종교개혁자들이 나온 게 아닐까요.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기독교 비판은 특정 성경 구절과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가지고 전체 기독교를 악과 폭력의 기원으로 악의적으로 왜곡하였습니다. 이전 세대의 무신론자들(샤르트르, 프로이트, 러셀)은 논리적 귀결이 허무주의나 부조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그들 스스로 무신론 근본주의라는 환원론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든 착하게 살든 생존 기계일 뿐 인간임을 포기한 또 다른 폭력과 전쟁을 선동하는 경계에 경계(사28:13)를 해야 할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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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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