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주광우] 영화와 함께…(포스트모던시대의 영화 II-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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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상영되는 과정 또한 해체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영화는 인간의 감각기관의 불완전함, 일종의 착각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예술 양식이다. 우리는 영화를 움직임으로 느끼고 기억하지만 사실 관객이 보는 것은 빠른 속도로 영사되는 정지된 그림이다. 현존하는 사진들과 그 사진들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어두움의 연속적 교차인 것이다. 영사기에서 나온 빛이 정지된 프레임을 지나 일정한 시간 동안 스크린에 영상을 비춘다. 영사기로부터의 빛이 차단되고 스크린이 아주 짧은 순간 어두워진 사이에 영사기는 필름을 움직여 다음 프레임을 정위치시킨다. 다시 빛이 들어오면 새로 정 위치된 프레임이 정지 상태에서 스크린에 비추어지고 또 다시 빛이 없어지며 스크린이 어두워지고….

이 과정이 끝없이 반복되면서 관객들은 자신들이 움직이는 그림을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든다. 다시 말하면 빛의 presence와 absence의 연속적인 교차를 통해 영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데리다의 해체 이론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서양 지성사에서 presence의 의미는 가치판단에 있어서 항상 절대적인 위치를 향유하고 있었다. 글쓰기가 말하기보다 열등하게 취급된 것 역시 주체자의 absence에 기인한 것이었다. 데리다는 그의 에세이 “Plato’s Pharmacy”에서 고대 사회에서 전체 시민의 안녕과 미래의 보장을 위해 희생되었던 scapegoat (고대 서양 사회에서는 양이나 염소가 아닌 인간을 희생제로 사용하였다)의 예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고대 서양사회 속에서 속죄제로 선택되었던 사람은 아주 흉하고 건장하였는데 그들은 나머지 정상적이고 온전한 모습의 시민들을 위해서 희생되었다. 데리다는 여기서 속죄제로 사용되는 scapegoat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면서 서양철학의 오류(presence 우선의 존재론적 인식에서 오는)를 지적한다. 비록 속죄제는 당시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는 철저한 소외인들이었으나 이들의 존재가 없었다면 다른 시민들은 시민으로서의 온전한 삶을 살지 못했을 거라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희생자들과는 구별되는 삶이었으나 또한 희생자들에게 예속되는 삶이었던 것이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당시 일반 시민과 희생자들간의 적서구분이 해체되었음을 암시한다. 중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개념과 그렇지 못한 개념들과의 계급적 관계가 분리된 것이다.

영화의 상영 과정 속에서도 이런 구분의 해체가 잘 나타난다. 정지된 프레임에 비춰지는 빛의 presence만으로는 영화가 상영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빛이 비춰주는, 현존하는 상(image)과 빛의 존재는 분명히 필요하지만 만일 이곳에 아주 짧은 순간 어두워지는 빛과 빛 사이, 상과 상 사이의 어둠과 공백이 없다면 현존하는 상과 빛의 존재는 무의미해져 버린다. 단지 서로 다른 그림들의 겹침이 되어버리며 우리에게 착각 현상을 일으킬 수 없다.
이와 같이 영화는 해체주의적 모습을 그 자체 속에서 내재하고 발전하고 있다. 해체주의 이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더 이상 적서구분을 좌시하지 않는 시대적 사조 앞에서 영화는 자신의 빛과 자화상을 더 뚜렷이 발산하고 있으며 오히려 종합적이며 통전적 장르로서 현대 지성과 예술 동향을 대표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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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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