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탄생, 그리고...수<그을린 사랑>(드니 빌뇌브, 2010, 1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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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탄생, 그리고....
<그을린 사랑>(드니 빌뇌브, 2010, 18세)


최성수

  프로이드가 말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모친에 대한 애정으로 인해 모친을 차지하고 있는 부친을 질투 혹은 증오하는 감정을 일컫는다. 프로이드는 모든 아동들에게 있는 일시적인 혹은 고착될 수 있는 성향으로 보았다. 이것이 부친살해와 근친상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오이디푸스 신화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신화라는 것이 대체로 인간의 근원적인 경험을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프로이드의 해석은 가능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이렇게 일반화시키는 일은 가능할까? 프로이드의 추론은 신경증 환자를 중심으로 행한 임상 실험 결과라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이미 프로이드의 제자인 구스타프 칼 융에 의해서 비판되었지만, 사실 건강한 사람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들먹거리는 일은 공연히 죄책감과 죄의식을 주입하는 일일 뿐이다.
 
  필자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다시 읽어보는 가운데 다른 독해방식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신화에서 신탁의 역할에 대한 것이었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가 들은 신탁의 내용으로 인해 라이오스가 아들을 버리게 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라이오스의 행동은 당시의 분위기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신탁에 따른 것이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부친 살해라는 비극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아야 한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양자로 키운 코린토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신탁을 오해했기 때문인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자신의 운명이 코린토에서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운명은 신탁에 따라 진행되었다. 운명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행위의 동기가 신탁에 의해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유발한 것은 결국 신탁이었다. 다시 말해서 종교가 인간행동에 영향을 미쳐 비극을 낳게 한 것이다. 오이디푸스 비극의 기원은 종교에 있었다.

  <그을린 사랑>은 그 충격적인 내용과 복잡한 다층구조의 스토리텔링으로 인해 너무나 할 말이 많은 영화이기에 오히려 단순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기독교와 팔레스타인 이주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곧 레바논 내전의 배경에서 한 여인의 삶에 주목한다. 처녀 때 사랑하며 사귀던 팔레스타인 이주민 청년은 오빠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본인은 가까스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지만 이미 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다. 할머니의 도움으로 몸을 풀자마자 아이는 고아원에 보내지고, 그녀는 아이를 다시 찾을 때를 기다리며 대학에 입학한다. 내전으로 인해 아이가 머물고 있는 지역이 폭격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녀는 위험한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를 찾아 나선다. 아이를 찾지 못한 채 돌아온 그녀는 보복의 기회를 엿보며 기독교 지도자를 암살하고 13년 동안 정치범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수감기간 동안에 ‘노래하는 여인’으로 불리며 온갖 고문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고문 기술자로 소개된 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임신하게 되고 쌍둥이를 낳는다. 버려져야 할 아이이지만 간호사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진 두 아이는 출소 후에 엄마에게 되돌려진다. 그녀는 후에 아이들과 함께 캐나다로 이주하여 살다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게 된다. 영화는 그녀의 과거를 전혀 알지 못하는 두 자녀가 유언장에 적힌 대로 그들의 아버지와 고아원에서 행방불명된 형을 찾는 여정으로 구성된다. 이런 여정을 통해 감독은 특히 그녀의 고통과 슬픔으로 뒤범벅이 된 운명을 보여줌으로써 감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비극의 기원을 물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탐색하고 있다.

  엄마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와 형을 찾는 과정에서 두 자녀는 엄마의 삶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고 또 그녀의 삶의 비극과 결과들을 발견하며 충격을 받는다. 성폭행과 근친상간으로 얼룩진 자신들의 운명을 알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빌뇌브 감독은 종교 간의 갈등이 자신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인간을 이끌고 가고, 또 그 결과로 일어나는 전쟁으로 인해 인간성이 어떻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폭로한다. 즉, 그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간의 전쟁인 레바논 내전에서 인간성을 파괴하는 비극의 근원을 봄과 동시에 어떻게 하면 그 비극적인 결과들을 치유할 수 있을지를 영화를 통해 성찰한 것이다.

  관객을 압도하는 뛰어난 서사적인 구조로 말을 잊게 만들지만, 영화의 메시지는 마지막 유언의 편지에 잘 드러나 있다. 즉, 어떤 상황에서 일어난 비극이든, 그 갈등은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일 때, 서로 함께 있을 수 있게 될 때, 희망이 있을 수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엄청난 비극을 받아들임과 용서로 승화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자녀들에게도 수용되길 기대한 것이다.

  한편, 9.11 테러에서 볼 수 있었듯이, 종교 간의 갈등이 비극의 탄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이지만, 그 고통을 영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9.11테러 이후 이슬람과 기독교의 갈등을 다룬 영화들이 많이 있고, 또 그 가운데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낸 작품들이 많았지만, <그을린 사랑>이 담아내고 있는 고통의 깊이와는 결코 비교할 수 없을 것 같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종교와 인간의 상관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을린 사랑>의 비극의 기원은 종교간의 전쟁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영화를 대하면서 갖게 된 가장 우선적인 질문은, 그녀는 왜 모든 것을 스스로 말하지 않고 자녀들로 하여금 스스로 찾아내도록 했던 것일까? 엄마의 삶과 경험을 추체험하도록 함으로써 그들에게 어떤 변화를 기대한 것일까?, 였다. 그녀 자신 뿐만 아니라 두 자녀들에게도 충격적인 사실로 인해 스스로 말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녀가 평소에 보여준 이미지에 비추어보면 그것을 원인으로 보는 것은 합당치 않게 여겨진다. 아마도 자녀들로 하여금 단지 듣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직접 경험하게 한 이유는, 뒤엉킨 운명적인 사건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과 그 안에 얽혀 있는 관계 속에 있는 모두에게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를 가슴 깊이 받아들이도록 하려 한 데에 있지는 않았을까? 사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두 자녀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형제를 찾는 여정에 동참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경험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녀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그 결과들을 받아들이며 갈등의 골을 극복할 수 있겠는가?

  포스트 그리스도를 살면서 동시에 그의 현존을 기대하며 사는 신앙인들에게 신앙 경험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추체험하는 것이다. 그에게 행하시고, 그 안에서 행하신 또 그를 통해 행하신 하나님의 행위가 우리 자신에게 나타나기를 원하고 또 기대하는 삶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경험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삶이 재현되지 않는 것은 그분의 삶을 추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이런 경험을 통해서만 비로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영성이 형성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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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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