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정재후] 기독교 문학의 정의와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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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문학의 정의와 상상력

정재후 목사(문선연 객원연구원, 장신대 ‘기독교와 문화’ 신학박사 과정)




문학은 모든 예술과 문화 영역의 기초가 된다. 인간의 언어가 기본 텍스트가 되기 때문이다. 문학적 능력은 소설과 시 뿐만 아니라, 연극과 뮤지컬의 기초가 되고 드라마와 영화의 기초가 된다. 대본 없는 연극이 불가능하고 시나리오 없는 드라마가 불가능하듯이 문학은 모든 문화의 장르에 기본적이다. 따라서 현대 문화 속에 등장하는 많은 논쟁점들과 갈등들에 대해서 그 기본을 점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문학에 대한 이해와 비평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특별히 ‘기독교 문학’을 구분해서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상상력을 동원한 다양한 표현물들에 대한 비평 문제가 문화 논의의 기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독교 문학의 정의와 상상력’에 대한 소고를 써 보려고 한다.

 

필자가 기독교 문학을 정의를 해 본다면, ‘기독교인의 신앙과 세계관으로 수용할 수 있는 내용에 상상력을 더하여 감동과 재미, 그리고 교훈 - 반성과 치유, 화해와 용기 등등 -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 낸 문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경과 역사, 삶의 리얼리티가 소재와 내용을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고 그것에다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서 미학적, 실용적, 윤리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정의를 들어보자, 김봉군 교수는 짧은 한 문장으로 기독교 문학을 정의한다.

기독교 문학이란 기독교적 상상력으로 창작된 문학이다. 기독교 문학이 전제로 하는 기독교적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서에 기초를 두고 그것을 정신적 지주로 하는 인간의 창조적 영성과 그 역동적 에너지를 뜻한다.

 

 

이어서 김봉군 교수는 ‘정신적 지주’가 ‘문학의 위대성을 결정하는 요소’로서 엘리엇의 용어임을 설명하면서 문학 속에 문학성 외에 신학적이며 윤리적인 평가를 배제할 수 없다는 엘리엇의 견해를 인용하고 있다. 김봉군 교수는 그러므로 기독교 문학은 타락을 회복하는 생명의 언어로 복원 시키는 것이 기독교 문학의 지표임을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 문학은 복음을 정신적 지주로 한 기독교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한 말씀의 예술이다. 복음, 곧 말씀을 정신적 영적 지주로 한 언어 예술이므로, 타락한 인본주의적 문명사의 흐름 속에서 훼손된 ‘반생명의 언어’를 ‘생명의 언어’로 복원시키는 것이 문학의 지표다.

 

김봉군 교수가 강조하는 생명의 언어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회복시키는 것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가 용서되고 서로 화해되며 사랑하는 삶의 회복을 담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인간의 죄성을 심각하지 않게 묘사한다던지 상투적인 회개로 너무 쉽게 그리는 것은 리얼리티에 부합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인간의 죄성을 그려내더라도 그 자체에 너무 몰입해서 인간의 잔혹성이나 음란성에 과도하게 집중이 된 표현을 지양하고 소망과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때로는 인간의 죄성, 미련함, 욕망으로 인한 실패와 고통을 묘사한다고 해도 그것 자체의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과 존엄함을 잃지 않아야 할 것이다.

 

문학적 상상력의 소중함에 대해서는 익히 리런드 라이컨이 강조했었다.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작품을 읽을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좋은 대답은 ‘우리가 읽는 문학작품의 예술적 미를 열정적으로 즐기고 하나님을 우리가 즐기는 미의 궁극적 근원으로 인식함으로써 열광을 돌릴 수가 있다’고 하는 대답이다. 선물을 받았을 때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은 곧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홍문표는 기독교적 상상의 이미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상에서의 이미지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자로 오신 것처럼, 작가의 주제 의식이 보다 구체적으로 독자에게 다가서는 방식이며 궁극적으로 이성적 사고가 저지른 불평등과 차별성과 분열과 그로 인한 절망을 극복하고자 하는 구원의 방식이다. 너와 나의 막힌 담을 헐고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한다.

 

‘기독교 문학’을 기독교 신앙과 가치, 세계관으로 수용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상상적 문학이라고 다시 정의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의 질문은 어떤 구체적인 소설이나 영화를 봤을 때 우리가 그 작품이 기독교적이냐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건강하고 휼륭한 작품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나?의 문제가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리런드 라이컨은 문학 작품이 세계관을 내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살아가면서 결정을 내리는 근거로 삼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주요한 문학 작품들 또한 세계관을 드러내 준다. 문학작품은 어떤 것을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높이고, 그 외 인생의 다른 면들을 거기에 연관시킨다. 그래서 “세계관을 탐지하며 읽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작품 전체의 중심이 되는 핵심적인 가치 - “형태 없는 삶의 재료에다 구조와 내적 일관성을 부여해 주는, 존재의 본질에 관한 기본적인 가정들”을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소설이나 시 속에는 어떤 세계관이 담겨 있다. 즉, 실재와 도덕과 가치관들을 그려 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독자들은 기독교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문학 작품에 대해 행하는 작업의 하나는 그 작품의 세계관을 자기가 가진 기독교 세계관과 비교하는 일이다. 이런 비교 과정을 통해서 자기의 세계관이 보다 분명해지고, 확장되며, 적용되는 것이다.

 

어떤 작품이 성경을 인용하거나 성경의 인물로 제목을 정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기독교 문학이나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려워요!” 어떤 작품이 기독교적인지, 기독교 문학은 아니라고 해도 읽을 만한 것인지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문학적 예술적 능력들을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개발하는 시간을 더 투자한다면, 그것에 대한 능력과 소양도 커질 수 있음을 기대해야 한다. 그래서 수잔 갤러거는 우리 인간의 문학적 능력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한다. 아울러 그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할 수 있음을 즐겨 말한다.

 

문학 작품을 읽고 쓰는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선물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 중에 단지 인간만이 비유와 이야기들, 그리고 문서를 사용한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이러한 선물들을 주셨을 뿐 아니라 비유와 이야기들로 가득한 책, 성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셨다. 문학 작품을 읽고 반성하는 경험을 통해서 나의 편견이나 탐심, 미련함을 더욱 더 깨닫고 이웃을 이해하는 관용이 커질 수 있다. 곧 기독교 문학의 상상력은 그저 재밌는 공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이해하고 그들과 형제 자매로서 화해하며 사랑하고자 하는 지향점을 갖는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내게 이런 역할을 했다. 즉 엘리자베스 베넷이 경험한 이야기를 읽을 때 나는 나 자신의 오만과 선입견을 발견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 나는 나 자신의 이런 오점을 이해해야 한다. 텍스트에 의해 깨달은 자기 각성은 자기에 대한 혐오를 가져올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용서가 가능한 세상에 살면서 우리의 부족함을 인식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준비를 할 수 있다. 문학 서적을 읽고 세상과 이웃을 이해하고 그 문화에 참여하는 것은 또한 우리 기독교 세계관에 맞지 않는 왜곡된 것들을 개혁하는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문학적인 상상력과 지식, 감동이 개혁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중요한 지적이다.

 

결론적으로, 문학 서적을 읽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타인, 문화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증가시키는 것같이 우리의 통찰력을 확장시킨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그들의 많은 단점을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를 좀 더 완전하게 탐구하고 우리 이웃을 더 잘 이해하고 좀 더 실제적으로 평안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시각을 확장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태도와,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종교체계에서 왜곡된 것들을 개혁할 때, 우리의 지식과 이해력은 분석과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

 

상업주의를 기반으로 한 대중 문화의 생산력이 날로 증가되고 있기에 너무나 많은 대중문화 상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의 세계관(기독교 문학과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테마 또한 중요하기에 다음 지면을 통하여 다뤄 보면 좋을 것이다.)을 토대로 비판적 수용의 능력을 길러야할 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성경의 내용과 감동을 통하여,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예술적인 문학적인 소양을 통하여 ‘수용’과 ‘거부’를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 할 수 있음을 기대하며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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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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