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소통/영화] 노아 이야기: 역사로 읽으면 꼬이기만 합니다.(당당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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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아>에 대한 다양한 리뷰들을 소개해 드립니다.^^

다음은 당당뉴스에 기재된 박경은 목사의 기사입니다.






노아 이야기: 역사로 읽으면 꼬이기만 합니다. 

http://www.dangdang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650

입력 : 2014년 03월 21일 (금) 13:33:19 / 최종편집 : 2014년 03월 21일 (금) 14:33:58 [조회수 : 3604]박경은0117669763@nate.com




영화 노아가 개봉되었군요. 보신 분들은 은혜 많이 받으셨겠지요? 그러나 아직 못 보신 분들은 다음의 문제들을 생각해 보면서 ‘성서의 본문’을 역사로 읽어야 할지, 문학으로 읽으면서 신학을 찾고 거기서 말씀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지를 많이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노파심(老婆心)에서 미리 말씀을 드리는데, 노아의 이야기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기록된 모든 내용이 그대로 다 역사상에서 실제 발생했던 사실 그 자체라고 우기면 본문 안에 담겨있는 말씀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노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다르게 “노아 이야기를 전해주는 본문 기록자, 혹은 ‘노아 이야기가 담긴 본문전체를 지금의 형태로 만든 최종 편집자(저자)’가 받아 전하는 신학, 나아가 지금 있는 이 모습 이대로의 본문을 통해 영감 된 말씀을 받도록 하기 위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몇 가지를 질문해 볼까요? 영화 노아를 만든 영화감독은 아래의 질문들을 어떻게 처리했을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본문에 나타나는 장면을 만들 때 장면들을 이어가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감독은 나름대로 구약성서의 노아 관련 본문을 ‘해석’을 했을 것이고 그 해석에 따라 우리가 알고 있는 본문의 내용과 전혀 다른 장면이 나와서 본문에는 없는 이야기도 집어 넣게 된 것이지요. 

1.노아는 그의 아버지 라멕이 182세 때에 출생했습니다(5:28~29). 그의 아버지 라멕은 할아버지 므두셀라가 187세 때에 출생했습니다(5:25). 따라서 노아가 출생했을 때 노아의 할아버지인 므두셀라의 나이는 369세였습니다. 대홍수는 노아가 600세 되던 해에 발생했습니다(7:11). 성서본문에 의하면 아버지 라멕은 대홍수 5년 전에 사망했습니다(5:28,31; 7:11참조하여 계산). 그러나 대홍수가 발생하던 해에 할아버지 므두셀라는 생존 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 노아는 할아버지를 장례 치르고 방주에 올랐을까요? 아니면 할아버지도 대홍수에 희생된 걸로 보아야 할까요? 영화감독은 이 부분을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성서본문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은 이 장면을 어떻게 처리하실지? 

2.성서본문에 의하면 노아의 아들들은 모두 같은 해에 태어난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5:32). 우리말 성서는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대홍수가 있기 전까지 100년 걸쳐 세 아들이 출생한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과 킹제임스 및 독일어 성서들은 노아가 오백 세 되었을 때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세쌍둥이 형제라는 인상이 큰데.... 한 해에 세 아이를 차례로 낳았다고 생각되기는 어렵고... 여러분은 이 부분을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영화 ‘노아’를 만든 감독은 이 부분을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한편 노아가 방주에 오를 때 노아의 세 아들은 이미 결혼한 것으로 나타납니다(7:13). 실제로 그들이 방주에 오르기 전에 모두 결혼을 했다면 손주들은? 손주들을 버리고 배에 탔다는 끔찍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 부분을 성서본문은 어떻게 처리했으며(10:1; 11:10참조) 영화 ‘노아’를 만든 감독은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비교해 보시면서 영화를 만든 감독은 왜 그렇게 처리했을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3.무엇보다도 궁금한 것들 중의 하나는 방주의 크기가 과연 세상 모든 생명체들을 암수 한 쌍씩 모아들이기에 넉넉했을지(6:19~20)? 나중에 정결한 동물들은 암수 일곱씩, 그리고 부정한 동물들은 암수 둘씩으로 확대되었는데(7:2~4) 방주가 더 커졌을 리는 없고.... 

남극동물, 북극동물, 나아가 적도동물들.... 심지어는 수륙양생 동물들(악어나, 하마, 거북이와 같은...), 거기에 더하여 홍수가 40일 동안 둥그런 지구전체를 둥그렇게 뒤덮었다면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 혼합되었을 텐데... 민물고기들은 바닷물과 섞인 물에서도 살 수 있었을까요? 반대로 해양생물들은 민물이 섞인 물에서 생존할 수 있었을까요?

수생물들은 그렇다치고 방주에 오른 동물들을 먹이기 위해 노아의 식구들은 어떻게 지냈을까요? 잠이나 제대로 잤으려나? 방주 안에 여러 동물들을 먹일 수 있는 먹이도 충분히 비축이 되었겠지요(6:21참조)? 동물들을 굶길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문제는.... 육식동물들을 위한 먹이감은 어떻게, 무엇으로 비축했을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무슨 이적인들 일으키지 못하시겠습니까? 그러나 기적도 정도껏이죠. 여러분은 이를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영화를 만든 감독은 아주 간단히 처리해 버렸군요. 아주 그럴 듯합니다. 40일 동안 모든 동물들이 음식을 먹고 배설하는 일들을 일절 중단한 것으로 만들었네요. 어떻게? 영화를 보라고 은근히 권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4.엄청난 크기의 방주를 짓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재목들이 필요합니다. 노아는 거대 방주를 지으면서 어느 정도 크기의 나무들을 사용했을 할까요? 성서본문에 의하면 코페르 나무로 되어 있습니다(6:14). 코페르 나무가 정확히 어떤 나무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키가 거대하고 굵은 상록수 계열의 사이프러스 종류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거대 방주를 만들기에 적합한 나무라면 그런 종류의 나무일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방주를 짓기 위해 재목을 마련할 때와 관계되는 질문에서 생겨납니다. 방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거대한 상록수계 나무들을 운반하고 짜서 맞추고 세워서 기둥삼고 가로대를 지르고 하는 등의 건축술을 발휘해야 했을 텐데... 그 엄청나게 거대한 방주를 짓기 위해 동원된 인력은 없었을까요? 

오랜 기간에 걸쳐 지었기 때문에 노아와 세 명의 아들들, 그리고 아내와 세 며느리의 협조만 있어도 3층으로 된 거대방주를 능히 만들 수 있었을까요? 이 부분을 여러분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영화를 만든 감독은 이 부분을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5.방주를 짓는 것과 관련하여 대답하기가 매우 궁색한 결정적인 질문은....방주 제조용 거대수목들을 자르고 켜고 깍고... 등의 작업을 해야 한다는 필연적 작업에서 발생합니다. 과연 그때 사용한 도구가 무엇이었을까요? 만일 거대 나무들을 자르고 켜고, 깍는 등의 일을 할 때 철로 된 연장을 사용했다면? 그렇다면 완전히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소설이 되는 거죠. 왜냐하면 노아시대에는 도무지 철기연장이 있을 수 없는 때였으니까.... 

여러분은 이 부분을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영화를 만든 감독은 거대한 나무들을 자르고 켜고 깍는 등의 작업을 할 때 어떤 연장을 사용하도록 했을까요? 철연장? 청동연장? 돌연장? 시대는 노아시대, 그때는 철연장이 있을 수가 없던 때였습니다. 

6. 마지막으로, 노아의 대홍수 사건이 마감된 후에 노아와 세 아들들은 방주를 나와 생활하면서 후손을 퍼트리게 됩니다. 셈과 함, 그리고 야벳으로부터 온 땅에 퍼졌습니다(9:19). 홍수 후에 지구상에 퍼진 다양한 인종들.... 아프리카 원주민, 호주 원주민, 아메리카 인디언,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 이들의 조상은 누구입니까? 

아마도 그때는 지구 대륙이 지금처럼 오대양 육대주로 갈라지기 전이었을 것이므로(?) 호주원주민은 아프리카 원주민계열? 가나안의 조상 함의 자손(9:22)? 북반구 백인계열은 셈족의 후손? 몽골이나 중국 및 한국과 일본의 선조는 야벳의 후손?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성서의 이야기는 인간의 경험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인간세계의 시간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사건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모든 이야기들은 다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본문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역사적 배경에 대해 ‘역사성이 없는 이야기’라고 단정적으로 확언할 수 없습니다. 분명하게도 성서본문은 역사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서에 기록된 사건 그 자체가 문자 그대로 역사 안에서 발생한 사실이라고 고집하는 것에서 생깁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집할 때 본문 안에 들어 있는 영감 된 말씀, 본문을 통해 지금도 받게 되는 계시의 말씀이 여전히 강력하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에서와 같이 대답하기가 점점 더 궁색해지는 질문들만 자꾸 제기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대할 때 본문이 역사성이 있는 내용이라고 해서 역사 그 자체를 문자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라고 전제하고 그런 측면에서 역사서를 대하 듯 읽어서는 안 되고 그와는 전혀 다르게 신학과 생명의 말씀이 담겨 있는 ‘문학’으로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본문을 문자로 남긴 하나님의 사람은 발생사건 그 자체를 그대로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 본문을 통해,  자신이 받은 영감을 나누려고 지금의 형태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위의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영화 ‘노아’를 감상하시면서 영화감독은 ‘왜’ 성서본문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내용을 ‘추가, 첨가, 부연’하면서 ‘자기 멋대로’ 성서본문과는 다르게 내용을 ‘수정, 교정, 편집’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서본문과는 다르게 만들어진 ‘노아’라는 영화작품을 통해 그것을 만들어낸영화감독이 나누고 싶어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겠는지를 생각하시는 중에 ‘본문을 읽기만 했을 때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감격’을 경험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새소망이 움트는 새봄맞이에 큰 기쁨이 임하길 바랍니다.


박경은
감신대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신학박사(신약학)학위를 취득했다. 성서신학의 현장화를 추구하며 한책의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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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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