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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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애
<케빈에 대하여>(린 램지, 스릴러, 청소년관람불가, 2012)

 

 

<케빈에 대하여>는 2011년 칸에서 처음 상영된 후에 수많은 영화제에서 수상하면서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한 가족의 이야기임에도 무섭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쉽게 단언할 수 없는 이해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연출이 돋보이는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실제로 평론가들과 네티즌들의 글을 읽어보면, 영화는 모성애, 가정교육, 집안에서 아내와 남편의 역할, 집단 따돌림, 소시오 패스, 원죄, 선과 악 등의 주제에 따라 다양하게 분석되어 설명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영화의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으로 소설가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소설은 엄마 에바(틸다 스윈톤 분)가 케빈을 낳고 키우면서 아들에 대한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이미 죽은 남편인 프랭클린에게 전하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케빈과 자신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남편과 소통하고 싶었던,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던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생각한다.

제목은 “케빈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케빈에 관해 이야기 해야만 한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케빈을 아들로서 양육하면서 갖게 된 여러 사념들을 포함해서 그에 관해 아직 뭔가를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뜻이다. 아니 어쩌면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가진 엄마의 간절한 심정을 반영하고 있다. 에바는 아들 케빈에 관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고 또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영화는 도무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케빈의 캐릭터와 관련해서 다층적인 이해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질문을 일으킨다. 다음의 글은 필자가 영화를 실존적으로 이해하는 의미에서 기술한 것이다.

세상에서 겪는 난처하고 당황스럽고 때로는 억울하게 여겨지는 일은 내 생각이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일어난 일로 겪게 되는 어려움이다. 사람들이 사건의 진실을 알아준다면 비록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안도의 숨을 쉴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게다가 그 모든 책임을 내가 짊어져야 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된다면, 억울함은 개인적으로는 한으로 응어리지거나 심하면 자살 혹은 복수로 이어지고, 사회적으로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는 일로 평가된다.
그런데 만일 그것이 가족이라면 어떻게 될까? 악의 화신 같은 반사회적인 기질과 성향을 가진 자녀의 잘못으로 인해 엄마가 욕을 먹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그것은 양육의 책임을 묻는 입장에서 볼 때, 당연한 결과인가? 물론 임신과 더불어 자유로운 생활에 지장을 받고, 또 육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엄마들이 아이와의 관계에서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로서 책임감(모성애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은 아이의 양육에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만일 엄마의 양육의 노력과 전혀 상관없이 전적으로 자녀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벌어진 일이라면, 그것에 대한 양육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일까? 엄마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의 한계는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법적인 측면에서 볼 때, 부모는 양육의 책임 때문에 미성년 자녀의 범죄 행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부모들은 자녀 때문에 겪는 일로 답답해하고 힘든 시간들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리고 대체로 부모들은 책임을 통감하는 편이다. 비난에서 자유로울 정도로 양육을 실천한 완벽한 부모는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녀의 비행 때문에 겪는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은 누워서 침 뱉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행을 서슴지 않는 자녀와 관련해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또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비슷한 처지의 부모들에게 자신의 의지와 전혀 무관한 일에 연루될 수도 있고, 그 일 때문에 엄청난 고통과 수모를 겪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동병상련을 나누고 그럼으로써 힘겨운 시간들을 견뎌낼 것을 돕고 싶기 때문일까? 아니면 적어도 세상 모든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적어도 부모만은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의 저자나 감독은 이렇게 볼 만한 여지를 남겨놓고 있지 않다.

한편, 적어도 부모가 자녀에 대해 세상의 이목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것도 가족이 공유하고 있는 좋은 경험에서 비롯한다. 다시 말해서 아이가 자라나는 과정에서 부모에게 준 기쁨이나 성장과정에서 남다르게 보이는 모습들 때문에 부모는 제3자와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언제 혹은 어떤 계기로 잘못된 길을 선택해서 결과적으로 안 좋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이런 사실들을 말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부모는 물론이고 자녀 본인의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친구 혹은 사회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자녀가 범죄에 대한 대가를 받을 때 정상을 참작해 달라는 것이다. 범죄가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다뤄지지 않고 사회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되며 일종의 사회병리현상으로 다뤄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런데 임신이나 출생 그리고 성장과정에서도 전혀 기쁨이 없었다면, 또한 임신 자체가 전혀 원치 않은 일이었고, 그것 때문에 자신의 삶의 자유가 빼앗겼다고 여기게 될 정도라면, 게다가 성장과정 자체가 엄마에게 지속적인 상처와 고통을 주고 심지어 절망감을 갖게 할 정도였다면, 자녀가 처음부터 부모의 양육책임을 물을 수 없을 정도로 부모의 가르침과 전혀 상반된 행동을 보여 왔다면, 가족을 죽일 정도로 악의 화신 같은 삶을 살았다면, 도대체 무엇을 계기로 달리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관계를 부정하며 손사래를 치지 않을까? 처벌이 당연하다고 말하지 않을까?

이제 영화로 돌아가 보자. 케빈은 그런 사람이었다. 엄마 에바는 그런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이었다. 케빈은 엄마라도 관계를 부정하고 싶은 그런 캐릭터를 가진 아이였다. 엄마에게 양육 책임을 물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반항적이었다. 엄마를 절망하게 하고 상처를 주고 죄책감을 불러일으켰고 부부의 관계를 단절시켜 놓았다. 학교 강당의 문을 걸어놓고 나가지 못하게 한 뒤에 아이들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아빠와 여동생에게 화살로 살해하였다. 모두를 경악하게 하는 범죄자였다. 이런 케빈으로 인해 에바는 마치 주홍글씨의 딱지를 달고 사는 듯한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했다. 왜 에바는 그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고 오히려 그가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 주변에 삶의 터전을 마련해놓고 그를 방문하는 것일까? 도대체 그에 관해 무엇을 소통하고 싶었던 것일까?
교도소에서 나눈 마지막 대화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는 데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왜 그랬니?”라고 물었을 때, 케빈은 “처음에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이유 때문에 일을 저질러 왔었지만, 결국 자신이 하는 일을 모르는 채 행한 것이었다는 고백이다. 자신도 모르고 행한 일이라고 말하는 케빈에 대해 엄마는 무엇을 말할 수 있었을까? 어떤 이유에서 범죄를 저질렀든 사람들은 그 행위에 대해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엄마인 에바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 범죄자가 되었든 케빈은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바는 케빈을 가슴으로 안아주었다, 그럼으로써 에바는 자신이 케빈의 엄마임을 나타내 보였다. 대화와 포옹은 에바와 케빈 모두가 치유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엄마 에바와 아들 케빈의 관계와 마지막 대화를 바탕으로 영화를 재구성하면서 이르게 된 지점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며 살기보다는 하나님을 거절하며 자신의 뜻과 의지대로 살면서 자신을 드러내려는 인간의 본성 및 성품에 대한 이해이다. 이런 의미에서 케빈은 단지 소시오패스적인 기질을 가진 캐릭터로만 볼 수 없는, 그래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특별히 마지막 대화와 에바의 포옹을 통해 필자는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와 스데반 집사를 떠올릴 수 있었는데, 자신을 향해 욕하며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보고 스데반 집사와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를 사해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하시면서 저들이 지금 무엇을 행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케빈이 아닌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속해주심으로써 생명을 연장시켜주신 까닭은 양 같은 존재로서 원하는 길로 제멋대로 갈 뿐만 아니라 죄인으로서 살아가는 우리,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 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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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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