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섀도우 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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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의 개인사적인 원인에 대한 성찰

<섀도우 댄서>(제임스 마쉬, 2012, 드라마, 15)

 

영국과 아일랜드

 

많은 한국인들이 부담 없이 듣는 서구 음악 가운데 하나는 아일랜드 민요다. 켈트 음악으로 알려진 아일랜드 민요는 슬픈 정서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마치 선천적으로 내재해 있는 듯이 보이는 아리랑의 슬픈 분위기가 우리의 고난사와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아일랜드 역시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일랜드는 영국을 포함하여 숱한 외세의 침략과 국내의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벌어진 종교적인 갈등으로 점철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게다가 1845-1849에 일어난 대기근으로 수십만 명의 아일랜드인은 고향을 떠나 신대륙으로 혹은 해외로 이주해 이방인으로 살아야만 했다.

축구 경기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긴장이지만 영국과의 갈등 관계는 특별하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는데, 양자의 갈등은 12세기 후반 헨리2세의 아일랜드 공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는 비록 아일랜드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물러가야 했지만, 1534년 헨리8세를 통해 재개된 대대적인 침략 전쟁으로 아일랜드는 그 후 오랜 세월동안 잉글랜드의 식민통치를 받아야만 했다. 영국의 지배는 1937년 아일랜드의 독립이 이뤄질 때까지 대략 400년간 지속되었다. 우리의 반일 감정보다 더 강력하고 또 우리보다 더 슬픈 정서를 가질 수밖에 없는 나라이다.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한 이후에도 영국은 개신교도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북아일랜드를 여전히 영국령에 두고 있었다. 이에 가톨릭계의 북아일랜드 과격파 무장단체 IRA(Irish Republican Army, 아일랜드공화국군)는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며 거센 항의를 했는데, 국내 온건 세력과의 갈등은 물론이고 각종 테러로 영국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양국의 화해분위기가 본격화되기 직전인 1993년을 배경으로 하는 <섀도우 댄서>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특히 IRA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이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영화다. 물론 과거 IRA의 긴박감 넘치는 각종 테러와 정치 활동을 기대하고 보았다간 실망할 수밖에 없다. IRA와 관련된 영화는 많이 있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짐 셰리단, 1993),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켄 로치, 2006), 1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Hunger(스티브 맥퀸, 2008) 등이 있다.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 자주 인용되는 <블러디 선데이>(폴 그린그래스, 2002)는 영국정부에 대항하는 IRA의 무력투쟁 방식에 반대하여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아일랜드 시민에 대해 영국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한 사건을 다룬 영화다. 영화들은 영국에 대한 아일랜드의 부정적인 정서를 잘 엿볼 수 있게 한다.

 

영화 이야기

 

톰 브래드비의 동명 소설에 기반을 둔 영화의 제목 섀도우 댄서는 자신은 드러내지 않고 오직 그림자를 통해서 비쳐지는 춤을 추는 사람을 가리킨다. 마치 실체가 없는 듯이 보이지만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갖가지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춤이다. 사회가 더욱 복잡해짐으로써 흐릿한 형태로밖에는 현실을 인식할 수 없고 정체성을 상실한 현대인의 음울한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외연적으로는 영국 정보부에 의해 조종되는 스파이 역할을 가리키지만, 내연적으로는 영화의 비극성을 시사한다. 긴장감으로 가득한 이야기를 대사로 표현하기보다 배우들의 절제된 표정 연기와 음악 그리고 상황전개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점은 감독의 남다른 연출 감각을 돋보이게 한다. 특히 콜레트로 분해 표정만으로 갈등과 긴장 그리고 절망감을 잘 표현한 안드레아 라이즈보로의 연기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콜레트는 아직 소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아들을 두고 있는 엄마로서 IRA 소속 요원이다. 어린 시절 자신을 대신해서 영국군의 총격에 사망한 동생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어쩌면 그녀와 가족이 IRA에 속하게 된 것도 이런 과거 때문이고, 또한 영화는 남편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데, 혹시 그녀의 남편 역시 영국군에 의해 희생당한 것은 아닐까라는 강한 추측을 낳게 한다.

여하튼 콜레트는 영국 지하철 폭탄 테러에 실패한 후에 영국 정보부에 의해 붙잡힌다. 테러리스트라고 보기에는 일련의 과정에서 드러난 그녀의 모습은 너무 유약하다. 심문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이 실패한 이유가 내부의 고발 때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폭탄테러 혐의로 평생 감옥에 갇혀 살 것인지, 아니면 스파이로 활동할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정보요원 맥의 제안을 받는다. 처음에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러나 아이의 신변을 담보로 회유하고 또 가족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IRA내의 다른 스파이들도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이 잘 살고 있고, 또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를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들은 후에야 콜레트는 무엇보다 엄마로서의 책임감을 의식하여 마지못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녀가 할 일은 IRA에 속해 있는 오빠와 동생의 활동을 보고하는 것이다. 가족(아들)을 위해 자신의 가족을 배신해야 하는 비극적인 선택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영국정보부의 속셈은 딴 데 있었고, 콜레트를 이용한 첩보활동이 하나의 미끼에 불과했음을 알게 된 맥은 지도부에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 게다가 IRA의 계획이 사전 노출로 실패하자 IRA 지도부는 콜레트 가족 중 누군가의 배신을 염두에 두고 가족을 한 명씩 심문하기 시작한다. 콜레트가 처한 위험한 상황을 알게 된 맥은 해결책을 찾던 중에 마침내 자신 몰래 진행된 지도부의 비밀프로젝트를 밝혀낸다. 그리고 자신의 약속을 믿고 따랐던 그녀를 위기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영화의 반전에 해당하고 그래서 스포일러에 해당되는 부분이지만) 그는 앞서 영국의 스파이로 활동하고 있었던 엄마를 보호하기 위해 영국정보부가 콜레트를 끌어들였고 그 때문에 그녀가 위기에 놓여 있음을 콜레트 엄마에게 알린다. 영국정보부는 IRA를 감시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얻으려고 두 차례나 걸쳐 모성애를 이용했던 것이다. 20여 년 전 아들을 잃었던 아픔, 그리고 지금 또 다른 가족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은 콜레트 엄마로 하여금 조국을 배신하게 했고, 또한 콜레트는 자기 때문에 동생을 잃은 상처와 또 자기 때문에 아들이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에 대한 염려로 어쩔 수 없이 스파이로 살아야 했던 것이다.

영국정부의 정보 수집행위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가족을 감시하기 위해 가족을 담보로 엄마의 신분으로 첩보활동을 하게 만든 것이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 자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매우 스마트한 프로젝트이고 또 그것이 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모성애에서 비롯하는 인간의 연약한 점을 이용한 것이라는 사실은 인간의 기본 양심을 악용한 것으로 인권침해의 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선을 위해 악에게 손을 빌리는 일은 지식욕에 사로잡혀 자신의 영혼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판 파우스트 박사와 다르지 않은 행위다.

 

테러에 대한 개인사적인 성찰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엄마로서 살아야 했지만, 그 때문에 양국 모두에게 버림받아야 했던 콜레트가 겪어야 할 불운한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궁금한 점이 있었다. 아마도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의 여왕이 아일랜드를 방문할 정도로 평화의 분위기가 지배적인 이때에 감독은 왜 하필 불운했던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든 것일까? 역사를 돌아보고 새로운 미래를 모색해보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영국 정부부의 첩보행위에는 문제가 많았고 또 그 방법이 너무 반인륜적이다. 공동의 협력관계를 위해서는 차라리 감추어두면 좋았을 내용이었다.

이런 고민과 함께 애써 떠올린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뮌헨>이었다. 이 영화는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에 대한 테러에 보복하기 위해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조직된 테러팀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스필버그는 하나의 정치영화로서 이 영화를 통해 당시 부시 정부의 9.11 테러에 대한 보복공격을 비판했다. 뮌헨 올림픽 테러에 대한 보복 테러의 결과가 결국 9.11 테러로 볼 수 있다면, 부시 정부의 보복 공격은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인지를 묻게 만드는 영화였다. 이런 비판적인 내용을 스필버그는 일의 수행과 관련해서 갈등을 겪는 두 사람 사이에 쌍둥이 빌딩을 미장센으로 보여줌으로써 암시했다.

<뮌헨>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 옳다면, 제임스 마쉬 감독 역시 테러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보려는 성찰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가족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테러에 참여할 동기는 충분하고 또 모성애를 이용해서 첩보활동을 하게 한 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믿음을 흔들리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자비한 첩보활동에 대한 분노는, 가족을 처벌하려는 경찰에 대한 테러 시도에서도 드러나 있지만, 충분히 테러로 이어질 수 있다. 그동안 수많은 테러의 배후로 정치와 종교가 지목되고 있지만, 개인사적인 이유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마쉬 감독은 테러의 개인사적인 이유를 성찰하고 영화를 통해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태극기 휘날리며>를 생각해볼 때도 충분히 수긍하리라 생각한다. 전쟁의 실상을 리얼한 장면으로 보여주면서 이런 끔직한 전쟁이 이념의 차이와 갈등으로 일어났다기보다는 오히려 가까운 가족이 당한 고통과 죽음에 대한 상호 보복행위 때문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양국간의 관계에서 <섀도우 댄서>가 갖는 의미는 매우 분명해진다. 적대관계 자체 없어야 하겠지만, 아무리 적대관계에서 일어나는 행위라 하더라도 적어도 야비한 방식으로 인권을 침해하고 또 한 가족을 분노하게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1차 세계대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의외로 작은 일에서 시작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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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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