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성석환] 우리에게 '정의(Justice)'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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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정의(Justice)'란 무엇인가? 



  성석환(문선연 객원연구원, 안양대 기독교문화) 



  한국은 20세기에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이룬 몇 안 되는 나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각종 국가 순위에서도 상위권이고 경제 규모도 10위권으로 인정받고 있다. 문화예술 분야에서 두드러지는 활약과 스포츠 분야에서의 선전은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매우 긍정적으로 변화시켜왔다. 그런데 대부분의 영역에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고 있지만 유독 정치나 부패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최근 이명박 정부는 '공정한 사회'를 국정기저로 삼겠다고 밝혔다. 특히 고위공직자나 사회 지도층의 도덕성과 법의 공정한 집행을 강조하였는데, 출범 초기부터 부르짖던 선진사회로 가기 위해서도 '공정한 사회'라는 목표는 반드시 성취해야 할 이상일 것이다. 빈부의 격차 심화와 그에 따른 사회적 갈등, 부자 감세와 조세형평성 문제 등은 '공정한 사회'의 실천을 위해서 앞으로 풀어야 할 중대한 과제들이 될 것이다.




'정의'를 묻는다.

  하버드 대학 교수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의『정의란 무엇인가?』(Justice)는 현대 (미국)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정의'라는 관점에서 조명하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정의'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정의로울 수 있는가? 정의로운 삶, 정의로운 사회란 어떤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사실 이미 고전적인 철학의 질문들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칸트를 거쳐 롤즈에 이르기까지 '정의'는 단어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과 그 실천적 의미를 물으며 다양한 논쟁을 벌여왔다. 그런데 오늘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정의'는 여전히 질문을 제기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언제나 상황을 전제한다. 그래서 정의는 윤리적 차원에서 규칙(rule)이 아니라 원칙(principle)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샌델은 미국 사회에서 벌어진 몇 가지 사례들에 대한 시시비비가 도덕적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근대적 자유주의가 표방하는 합리적 판단에 대한 맹신 때문으로 본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예컨대 낙태나 부자감세 등에 대해서 옳고 그름, 정의와 부정의 입장에서 서로 다른 주장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판단과 주장은 생각하는 것처럼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개인적 주관이나 도덕, 종교관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샌델의 말하려는 진정한 의도는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답하기 전에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의미는 무엇이고, 또 그것에 대답하는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가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진정으로 객관적인 규칙을 도출해 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단 것인가?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사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 각 자에게 합당한 몫을 나눠 주는 것인데, 누가 왜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묻는다. 이에 대한 대답의 세 가지 방식이 철학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행복, 자유, 미덕 이 세 가지는 정의를 고민하는 서로 다른 방식을 암시하는 것이다. 


  공리주의에서 정의로운 사회란 행복의 극대화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정의라는 견해는 특히 정치 논쟁에 있어서 시장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자유방임주의와 공정한 기회와 평등을 강조하는 공평주의자들이 있다. 정의를 미덕, 즉 좋은 삶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입장은 주로 보수주의나 종교적 우파와 연관되어 있는데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삶에 대해 명확하게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본다.
  



공동체와 이야기

  샌델이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근대의 자유주의가 도덕과 정의의 문제를 중립적 판단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즉 선은 스스로 선택할 문제이다. 중립을 강조하는 입장은 평등주의자나 자유지상주의자 모두에게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도덕과 종교로부터 벗어나서 객관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경우 희생과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공동체적 책임과 의무를 받아들이는 경우를 해명하기 어렵다. 


  즉 근대적 개인의 선택과 판단은 철저히 그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의 영향 아래에서 수행되는 것이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정의로운 삶이란 언제나 공동체를 향한 연대와 충성을 고려해야 한다. 결국 샌델은 공동체의 도덕적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는 방법을 찾는다. 그것은 공동체적 도덕을 고려하는 것이 편견에 사로잡히거나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해석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곧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를 위한 도덕적 부담감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격을 갖춘다는 것은 여러 부담을 인식하며 산다는 것인데, 우리의 삶을 더 큰 삶의 일부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샌델은 이것을 '공동선'의 추구로 가늠한다. 좋은 삶을 지향하는 사회는 개인을 공동체의 일부로 보고 '공동선'을 추구한다. 그것이 곧 정의다. 


  도덕과 가치를 배제한 중립적인 정의는 실제로 전혀 중립적이지 않고 반드시 특정한 입장이 개입되며 주로 기득권과 권력을 보호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시민 의식, 희생, 봉사, 연대, 미덕의 장려, 도덕에 기초한 정치 등이 샌델이 주장하는 공동선의 사회, 즉 정의로운 사회의 중요한 가치들이다. 서로 다른 도덕적, 종교적 이견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공적 삶에서는 서로 다른 생각이 서로 경쟁하고 경청하고 학습해야 한다. 



 
한국사회, 정의 그리고 교회

  지금 많은 독자들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열광하는 이유는 물론 최근 한국사회에 불고 있는 인문학적 관심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람들은 불확실한 현실에서 고전과 인문학적 지혜에서 생존의 길을 찾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상상력과 창조력을 강조하는 기업들에서도 인문학에서 그 원천을 빌려오는 경우도 많다. 샌델의 해박하고도 논리적인 강의를 듣고 읽고 있으면 어려운 문제들도 쉽게 이해되어 사람들은 고급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가 정의라는 점에서, 이 책의 인기는 단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오늘 한국사회와 긴밀히 연관된 공적 관심들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도 이미 다원화,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공정한 배분과 공정한 경쟁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절실한 조건이다. 미국의 경우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책 노선의 차이와 갈등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정권이 교체되면서 이러한 질문을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만들고 있다. 


  샌델처럼 생각한다면, 산업화나 민주화나 우리가 함께 고려해야 할 우리의 이야기이다. 워낙 온정주의가 강해서 비판받기도 하지만 한국이 이처럼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정치적 민주화를 이룬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그 공동체 의식이라고 보는 견해도 많다. 그런데 지금 정의에 대한 관심은 우리의 공동체 의식에 대해 거꾸로 질문을 던진다. 지나치게 우리끼리의 이야기에 매몰되어 타자의 이야기를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부자는 빈자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여야는 서로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남과 북은 서로를 부정한다. 서로가 믿는 가치와 신념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높이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내 가족, 내 회사가 이익이 된다면 얼마든지 타인을 외면할 수 있다. 공동의 선을 추구하기보다는 개인 권리와 자유의 이름으로 자기끼리의 이야기 만들기에만 열을 올린다. 


  이기적 공동체 의식을 이타적이고 상생적인 공동체 의식으로 전환시켜야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마 샌델의 주장이 매우 반가웠을 것이다. 21세기의 이 살벌한 경쟁의 시대에 도덕적 정치와 공동체적 선을 말한다는 것이 가당치도 않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한국사회에도 그러한 주장을 줄기차게 하는 이들이 많아져야 공적 영역의 정의가 정당한 방식으로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에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어쩌면 교회나 그리스도인 스스로 개인의 종교적 입장이나 견해를 공적 영역에서 밝히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고 자제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일방적이고 공격적이며 강제적으로 표현하여 오히려 반감을 사는 것은 지양해야 하겠지만, 신앙의 가르침과 주장을 개인적 고백에만 가두어 두는 것은 기독교의 공적이고도 사회적인 책임을 유기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정의의 문제에 있어서 더 급진적이다. 단지 공동체적 이야기 속에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책임과 배려를 감당하는 것이 성경적인 정의이다. 그 사회의 공동체는 이들에게 우선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공동선이 아니라 타자의 유익을 먼저 고려하는 것이 기독교의 정의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불의에 저항하는 것이 사랑의 다른 이름인 정의인 것이다. 


  탁월한 변증가이자 신약학자인 톰 라이트(Nicholas Thomas Wright)는『마침내 드러난 하나님나라』(Suprised by Hope)에서 하나님나라의 정의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인정하고 세상의 부정의에 맞서며 동시에 마지막 종말을 고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정의를 위해 일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다시 오심을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한국교회가 정의를 말하기 전 먼저 진정한 부활의 신앙을 회복해야 할지 모르겠다. 


  또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오늘날 세계의 많은 학자와 단체들이 급속도로 '정의'를 주제어로 삼고 있다. 특히 오늘의 세계의 모순과 불평등, 부정의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자선과 나눔을 정의라는 시각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일시적이고 시혜적인 '던져주기'로는 오늘의 부정의한 모순이 해결될 수 없다는 자각에서 정의로운 세상의 지속가능한 조건들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덕과 신앙은 공적 영역에도 충분히 영향을 끼쳐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갈등하고 전쟁하는 현장에서 화해와 평화를 만들어 내는 역할을 감당하되, 약자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착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나약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부활신앙을 가진 이들은 세상의 어두움과 부정의에 대항하고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한다. 이 신앙으로 정의를 세우는 빛과 소금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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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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