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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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상실의 시대>(트란 안 홍, 멜로, 드라마, 청소년관람불가, 2011)

없어지거나 사라지기를 원치 않지만 없어졌거나 사라졌을 때를 일컬어 ‘잃는다’라고 한다. 사람을 잃고, 기억을 잃고, 물건을 잃고, 사랑을 잃으며 시간과 생명과 재물 등을 잃는다. 버리는 것은 주체의 결단에서 비롯하는 능동적인 행위이지만, 잃는 것은 의지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에 달가운 일이 될 수 없다. 잃은 것들에 대한 반응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을 수반한다.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을 잃은 후에 오는 감정을 상실감이라고 한다. 아픔, 고통, 슬픔 등으로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그야말로 잃어 본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복합적인 감정이다. 상실감은 허망함이나 절망감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심한 우울증을 야기하기도 한다. 깊은 상실감이 동반하는 각종 현상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상실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상실감 중에서도 가장 큰 상실감은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가 아닐까? 트란 안 홍 감독의 작품 <상실의 시대>는 바로 이런 상실감을 주제로 만든 영화다.

<상실의 시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되었다.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이며 1987년 작품이다. 기독교인들이 쉽게 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성적인 표현이 많지만, 성(性)을 의미를 담고 있는 하나의 코드로 본다면 감상을 주저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명성을 그대로 되살리지는 못했어도, 게다가 소설과는 다소 다른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영화를 보았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느낌이 있다. 특히 사랑하는 여자인 나오코가 상실의 고통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겨울 바닷가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서는 모습으로 표현된 와타나베의 상실감은 소설만으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장면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나오코가 머물러 있는 요양원의 노스탤직한 배경 역시 마찬가지다. 감독은 소설의 글귀를 그대로 대사로 사용할 정도로 소설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해도, 영상적인 표현에는 감독 특유의 감각을 발휘했다. 세부적인 감정 묘사와 정치 사회적인 배경, 그리고 다분히 선정적인 표현으로 가득한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생략된 많은 것들로 인해 영화에 실망하겠지만, 둘은 서로 구분되어 이야기 되어야 할 성질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배경은 일본 역사에서 격동의 시기였던 60년대다. 좌우 이념의 대립과 학생 운동으로 시끄러운 때인데, 이런 혼란의 시기에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현실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철없는 청춘남녀의 연애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정치 사회적인 혼란이 인간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그려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두 가지 모두가 독자나 관객에게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인다. 격동의 80년대를 대학생으로서 살아왔던 필자로서는 아무래도 후자에 방점을 두고 영화를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혼란의 시기를 지배하는 암울한 정서를 온전히 체감하며 살아가는 청춘 남녀들의 사랑이야기라고 할까. <글루미 선데이>(롤프 슈벨, 1999)가 암울한 정서를 불러일으켜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에 이르게 하는 음악으로 2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범죄적인 행각이 야기하는 절망감을 표현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영화를 감상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보든 영화의 내용은 분명 남녀의 이야기다. 특히 상실에 초점을 두고 전개된다. 그리고 상실의 이유를 언급하는 부분은 대체로 성을 매개로 이뤄지는 남녀 관계를 통해 설명되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레이코가 와타나베와의 성관계 후에 ‘잃어버린 것을 7년 만에 다시 찾았다’고 말한 대사에서 엿볼 수 있듯이, 영화에서 말하는 상실은 서로 온전하게 소통하지 못해서 오는 결과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실제로 그렇다. 나오코는 남자 친구 키즈끼의 자살로 존재의 상실과 동시에 관계를 잃어 깊은 상실감에 빠지고 결국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키즈끼는 나오코와의 애정 관계에서 결코 성관계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가 자살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온전한 소통의 부재에서 온 절망감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무수한 여성을 오가며 애정행각을 벌이면서도 전혀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나가사와를 사랑하는 그의 애인은 처음부터 잘못된 관계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살아간다. 왜곡된 소통 관계 속에서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자살하였다. 그녀의 죽음 역시 소통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도리는 엄마를 잃고 난 후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상실감 속에서 포르노적인 사랑 이야기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사랑을 통해 소통하고 싶었지만, 그녀 역시 매번 온전한 소통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리고 이 모든 상실감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상실의 시대를 책임 있게 증언하는 자는 주인공 와타나베다. 그는 어그러지고, 온전하지 못하고, 열망만으로 가득한 채 결코 상대에 이르지 못한 여러 소통 관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는 자의 캐릭터를 재현한다. 그러나 그 역시 마지막에 미도리와의 전화 통화에서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되묻는 질문을 던지는데, 자아를 상실한 듯한 모습이다. 이것은 소통하지 못한 삶, 곧 허망함으로 가득한 현대인의 현주소를 그대로 말해준다. 소통하지 못하는 삶은 비록 살아있다 해도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위치라는 것이 사실 관계에서 정립되는 것이다. 수학은 x와 y 그리고 z로 표시되는 좌표로 3차원의 공간을 만들고 어떤 존재를 그 안에 정립시킨다. ‘나’는 ‘너’와의 관계 속에서 정립되는 언어이며 위치이고, ‘너’의 위치는 ‘나’와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우리’는 ‘그들’ 혹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리매김 된다. 즉자는 대자를 필요로 한다. 인간은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정체성을 찾는 법이다. 그런데 대상이 사라지거나 소통하지 않고 단절되어 있다면, 도대체 나 혹은 우리의 위치는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영화가 던지는 화두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실감은 결국 자아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대한민국의 80년대와 같이 정치사회적인 격동기를 살았던 60년대의 일본의 젊은이들이 온몸으로 겪어야만 했던 것은 소통의 부재였다.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기에 바빴던 시대에서 관계는 일방적이었고, 단절되었거나 혹은 왜곡된 관계로 자족해야만 했다. 혹은 자조적인 태도로 시대의 흐름과 무관하게 살아가든가. 오늘날 그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일본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으로 삶을 전전하고 있다. 이런 소통의 부재가 편만한 시기에 젊은이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정서를 하루키는 “상실”로 표현한 것 같다. 영화나 소설이 특별히 성에 주목해서 표현한 것은 성이 성인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과 마찬가지로 소통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환기한다. 이런 의미에서 <상실의 시대>는 소통의 부재를 현실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절망감과 허무감을 잘 표현한 소설이며 영화라고 생각한다.

소통의 부재가 상실의 시대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 한국 사회 안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문화, 종교 등 사회 전 분야에서 나타나는 소통의 부재는 국민들로 하여금 많은 상실감을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소통의 부재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다. 상실은 또 다른 상실을 낳고, 소통의 단절로 인해 계속해서 자살과 절망감, 허무감으로 이어지는 까닭은, 소통의 부재로부터 오는 상실이 단지 소통의 재개를 위한 노력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구원을 필요로 함을 암시한다. 소통이 부재하는 시대는 상실의 시대이다.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깊은 상실감을 겪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실감의 원인이 되는 소통의 부재가 근절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다. 하나님이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소통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여셨듯이, 기독교는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소통의 통로로써 위치를 차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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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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