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제국의 상실? 하우어워스와 교회의 정치학: 책 『교회의 정치학』을 읽고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린다. TIME2001년에 그에게 ‘America's Best Theologian’이라는 호칭을 주었다. (2010년 듀크대학 연구실에서 만났을 때, 하우어워스 자신은 이 표현을 꽤나 어색해했다) 그리고 Christianity Today가 선정한 20세기 영향력 있는 100권에 그의 책이 두 권(A Community of Character, Resident Aliens)이나 들어있다. 인문학의 명예로 여겨지는 기포드 강연에 초대되었고(2001), 스코틀랜드 애버딘대학의 초빙을 받아 가르치기도 했지만(2014) 듀크대학 홈페이지에서 여전히 검색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마도 명예교수로 남아있는 듯싶다.

하지만, ‘소종파주의’ 내지는 자폐적 교회관이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다닌다는 점은 하우어워스에게 치명적이다. 아니라고 항변하고는 있지만, 쉽지 않은 부분이다. 그의 윤리에 붙은 ‘ecclesial ethics’라는 별칭에 양면성이 있는 셈이다. 기독교 윤리는 교회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하우어워스의 관점이 오해 혹은 냉소되고 있는 정황이다. 교회의 정치학(IVP, 2019) 역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원제목에는 물음표가 붙어있다. After Christendom?덕의 상실로 번역된 맥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After Virtue를 따라 『기독교제국의 상실로 옮길 수 있겠지만, 물음표를 붙인 것으로 보아 단순한 패러디는 아니다. 이 책은 호주에 초청받아 강연한 원고를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으로서, 공저한 Resident Aliens의 신학적 배경을 심화시키는 기회였다고 하우어워스 자신이 회고했다. 기독교 제국(여담이지만, ‘Christendom’의 발음기호는 [ˈkrɪsndəm]이다)의 상실을 아쉬워하기보다 기독교제국 그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현하는 뜻으로 물음표를 붙인 것 같다.

교회의 정치학이라고 번역한 것은 아마도 예수의 정치학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학이라는 번역에 꽂히지 마시기 바란다. 교회들 사이의 이권에 개입하거나 인사에 관여하려는 교회정치와는 확연하게 구분하면 좋겠다. 하우어워스의 관심은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며, 오히려 대안을 제시한다. 세상 정치에 기웃거리고 동화되거나 결탁하기보다 교회의 고유하고도 본질적인 정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육성하는 정치에 관심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책은 다시 읽기혹은 새로운 시각을 권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바로 읽기를 촉구한다. 그래서 어려운 책일 수 있다. 자유주의 정치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고 복음에 충실한 교회 됨을 강조하는 하우어워스의 관점이 불편해 보인다면, 그만큼 우리가 자유주의에 익숙해져 있다는 반증일 수 있겠다. 하우어워스의 강조점은 교회가 자유주의 정치에 동화 내지는 결탁된 상황(이것을 콘스탄틴적 동화라고 부르면서, 기독교제국의 본질은 기독교의 승리라기보다 로마의 정치와 결탁함으로써 순교적 신앙을 상실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현대사회에서 교회가 자유주의의 정치와 결탁함으로써 복음을 상실하고 있다는 진단으로 이어진다)을 벗어나 하나님의 주되심을 고백하라는 데 있다.

이러한 논지를 설득력 있게 펼쳐내기 위해, 하우어워스의 강연 원고는 일관성을 지닌 목차로 표현되었다. ‘1: 구원의 정치학 교회 바깥에는 왜 구원이 없는가?’에서, 오늘의 교회를 진단한다. “교회가 로마를 이긴 것은 순교를 통해서이며 로마에 맞서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정치적 증언이 바로 순교였다.”(55)고 하면서, 하우어워스는 교회를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정치적 공동체가 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40) 이러한 바탕에서, ‘2: 정의의 정치학 그리스도인에게 정의는 왜 나쁜 생각인가는 관점의 전환을 촉구한다. 불의를 편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모든 사회에 앞서 우선적으로 붙잡아야 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94)에 주목해야 한다는 뜻이다. ‘3: 자유의 정치학 종교의 자유는 왜 교묘한 유혹인가에서는 교회가 복음을 선포할 자유가 있는가가 아니라, 교회가 복음을 진리로 선포하는가”(101)에 주목하도록 촉구한다.

이 책의 핵심은 4장이다. ‘4: 교회의 정치학 어떻게 벽돌을 쌓고 제자를 키울 것인가교회가 구매자 혹은 소비자 시장 안에서 존재하게 되면서 부름 받은 교회에서 자발적 선택의 교회”(129)로 전락했음을 개탄하면서, “벽돌 쌓는 법을 배우듯”(138) 복음의 제자로 훈련을 받는 공동체로 회복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특이점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도덕성은 예배와 분리될 수 없다.”(146)고 말한 부분은 교회가 예배를 비롯한 펀더멘탈에 충실해짐으로써 그리스도인을 복음의 제자로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5: 성의 정치학 결혼은 어떻게 전복적 행위인가는 교회의 정치학을 예증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국가의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러한 삶을 기뻐하심을 알기 때문에 자녀를 낳고 환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으며, 자녀를 낳고 기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정적인 정치적 실천”(174)이다. 마지막 ‘6: 증언의 정치학 자유주의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는 교육에 대한 강조라기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 의식 즉 복음의 증인 됨에 관한 제언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예수님의 하나님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194)

사회정의를 비롯한 기독교윤리학의 개념들을 업데이트 해 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읽으면 실망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의 고정관념에 도전하면서 자성을 촉구하는 책이다. 세속정치에 대한 열정으로 교회가 정체성을 망각했으며, 기독교의 이름으로 사회정책을 제시하고 사회를 선하게 만들고자 하다가 교회 됨에 소홀했다는 주장이다. 콘스탄틴적 결탁 혹은 기독교제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이다.

하우어워스는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현실정치와 결탁하기보다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비전을 불어넣어 준다. 교회의 으뜸가는 책무는 교회 그 자체가 되는 것’(the first task of the church is to be itself)이라는 명제는 이러한 문제의식의 반어법이다. 신실한 교회라고 한다면, 낯선 혹은 다른 (foreign or alien) 근거들 위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벽돌쌓기에 도제 훈련이 필요하듯,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훈련시키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관심할 정치라고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의와 자유에 무관심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제자도에 근거한 사회적 영성을 구현하라는 뜻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 (자폐적 교회관이라고 그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하우어워스처럼 예수 내러티브에 충실하게 제자를 육성하는 교회가 되라고, 세상을 향하여 교회됨을 보여주라고 말하는 신학자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글쓴이 문시영은 남서울대 교수/교목실장이다. 고백록윤리에 꽂혀 아우구스티누스의 윤리를 연구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교회에 대한 관심에서 하우어워스의 A community of character교회됨으로 번역하는 등 열심히는 하지만 신통치 않다. 생명의료윤리에도 기웃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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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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