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대중문화 읽기 <김복동>: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출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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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넷의 할머니가 있다. 손을 씻고, 또 씻고. 아침마다 머리칼을 곱게 빗어 넘기며 매무새를 단정히 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저 깔끔한 ,평범한 할머니다. 

할머니는 언젠가부터 사람들 앞에 서는 날이 많아졌다. 그때면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었다. 몸의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 날로 쇠약해지는데도, 할머니의 기억의 시간은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던 열여섯에서 멈춰있다. 

할머니의 이름은 김복동,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광복절, 그리고 1400차 수요시위와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에 맞춰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은 고 김복동 할머니의 일본군‘위안부’ 증인이자 평화운동가로서의 삶을 다룬다. 

피해자의 자리에 갇혀있지 않고 전 세계를 다니며 자신이 목격한 폭력과 피해경험을 증언했던 여정이다. 



“내가 살아있는 증거다!”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1924~1997)의 증언을 기점으로 일본군 성노예제가 한일 문제를 넘어 인류가 함께 기억해야 하는 전쟁범죄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필리핀, 네덜란드 등 세계 각지에서 숨죽이며 살아가던 수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자신을 드러냈다. 김복동 할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사 속에서 끔찍하게 희생된 이름 모를 약자들이 다시는 생기지 않고, 후손들이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참상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그 일을 한다고 했다. 가족과 연을 끊으면서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정의와 평화를 향한 희망, 할머니는 그 “희망을 잡고” 산다고 했다. 


이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위안부’는 전체 240명 중 20명만이 생존해있다. 

조금이라도 더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담고 사람들이 기억해야 하지만, 한국 영화 약 2만3천 편 중에 ‘위안부’ 관련 영화는 36편. 그중에 흥행에 성공한 영화는 <귀향>(2016), <아이 캔 스피크>(2017) 단 두 편뿐이다. 

(1995~2000 <낮은 목소리 1,2,3>부터 시작해, 최근 개봉한 영화로 <눈길>, <22>(2015), <귀향>, <어폴로지>(2016), <귀향>, <아이 캔 스피크>(2017), <허스토리>(2018), <에움길>, <김복동>, <주전장>(2019) 등이 있다.)

참고로 2차 세계대전 유대인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영화는 대략 685편이다.



오늘날 평화의 소녀상을 조롱하고 훼손하며 철거하는 현실은 지금까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침묵을 종용하거나 부정하고 때로 왜곡하는 시도들을 수렴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정부 간에 합의된 문제를 왜 자꾸만 들추어 내냐고, 자발적으로 나선 것 아니냐, 이제 그만 좀 하라, 피해자들만 용서하고 잠잠하면 끝날 일 아니냐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의 아픈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평화라고 해서는 안 된다.(렘 8:11) 


이 문제의 시작은 힘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폭력이다. 민족과 민족 간에, 그리고 여성과 남성 간에. 

해결의 방점은 사안 종결이 아니라 재발 방지에 있다. 그래서 용서도 중요하지만 회개가 중요하다. 힘을 남용한 죄를 회개하는 것,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탄식하는 회개(metanoia)야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각주:1] 이 회개의 터 위에 정의와 평화가 세워져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십대에서 멈춘 할머니들의 시간이 다시 흘러갈 수 있다. 역사의 새로운 미래를 열 수 있다.


그리스도는 화평이시며(엡 2:14), 정의가 주님의 길을 앞서가며 닦는다.(시 85:13)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출 때 비로소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도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시작된 이 여정을 이웃과 사회로 확장시키려면 녹록치 않은 일들이 산적하다. 그러므로 이 길을 끝까지 가기 위해서는 진실이 사랑과 만나야 한다.(시 85:10) With You, 우리가 소녀상 옆 빈자리에 앉아서 소녀의 손을 잡아야 할 이유다. 영화 <김복동>을 봐야 할 이유다.



김지혜 목사(문화선교연구원 책임연구원)

디자인과 신학을 공부했다. '문화'와 '타자'는 언제나 인생의 중요한 화두다. 문화분석에 관심이 있으며,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와문화 전공 박사과정 중에 있다. 교회에서는 고등부 목사로 섬기고 있다. 

* 이 글은 기독공보에도 실려있습니다.



  1. 에마뉘엘 카통골레·크리스 라이스, 『화해의 제자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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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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