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지금 게임~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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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넘은 어느 시간, 게임을 제지하고자 하는 세력이 미세한 전기적 흐름이 느껴지는 자녀들의 온라인 놀이터에 접근한다. 현장 타격을 목적으로 방문을 열어 제치는 순간, 게임에 익숙해진 게이머들은 후다닥 온라인 게임기와 더불어 이불속으로 숨어버린다. 작전 실패! 

아침이다. 깨우지 않아도 게이머들은 어느새 눈을 부비고 일어나 간밤에 진행된 전장(戰場) 즉, 게임터의 전세를 파악하고 이내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게임ing ~ 

“학교 갈 준비하지 않고 이른 아침부터 대체 뭘 하는 거니?”라는 부모의 공격에, “classting 보면서 준비물 챙긴단 말이에요!” 라고 맞받아친다. 아~ 다시 작전 실패!! 

게임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이제 부모와의 신경전에서도 어떻게 그 게임을 이기는지 터득하게 된다. 부모는 잔소리 포탄을 그렇게 무수히 쏴대도 한 번도 자녀들의 귓속에 꽂히지 않는 불발탄이 되고 만다. 이것은 다름 아닌 우리 집 삼남매와 우리 부부가 매일 매일 벌이는 치열한 게임ing! 이 게임의 중간 성적, 자녀들의 레벨 up = 부모의 혈압 up ! 

대한민국은 지금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PC방, 회사, 학교, 까페, 지하철 등 wifi 라는 경제적, 전략적 조건이 허락되는 곳에서는 어디나 게임ing.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속도전 게임에 대비한 광속 네트워크 확보전, 장기전에 대비해 원유공급과 식량 배급이 용이한 전략적 요충지 확보전, 게임 참여 여부를 기준으로 내부인과 외부인의 경계가 정해지는, 이른바 게임 행위자와 비행위자간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 또한 게임을 즐기려는 게임 구매자들과 게임 종류를 경쟁적으로 제공하는 컨텐츠 제작업체 및 통신사간의 라이벌전. 또한 같은 종류의 게임을 하는 자와 다른 종류의 게임을 하고 있는 자를 구분하는 동맹/비동맹 분류전 등. 싸움(戰그)으로 표현되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게임의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지금, 온통 게임ing.


이렇게 치열하게 사방팔방으로 게임이 진행중인 전장(戰場)에서 게임의 유해성 내지는 중독성을 말하는 유해론을 펼치는 것은 소모전이다. 반대로 게임을 통한 집단의식 고양 및 유대감 창출이라는 긍정적 의미의 예찬론 또한 별 의미가 없다. 

그렇게 찬반논쟁을 벌이는 것도, 게임 때문에 가정에서 부모-자식간 신경전을 벌이든, 게임에 몰입하여 열심히 게임중이든, 이 모든 현상은 어떤 형태로든 이미 우리 모두가 게임ing임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우리는 게임, 특별히 온라인 게임을 둘러싼 게임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미 국경과 싸움터의 경계가 없어진, 아니 아예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동시에 분명히 실재하는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 치열한 전장에 우리 모두가 참여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사방팔방 게임ing! 우리 모두 게임ing!


이러한 판에 과연 누가 게임을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단언컨대 온라인 게임은 결코 off line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온라인은 다양한 컨텐츠를 공급함으로써 종교적 열정만큼이나 온라인 게임을 따르는 온라인 게임 신도들 내지는 전사들을 양산해낼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 형식의 온라인 게임 ing 상태인 우리는 어떻게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유쾌하게 공존할 수 있을까?



우선, 게임은 놀이로서 기능해야 하며, 게이머는 놀이꾼으로서 게임에 참여해야 한다.

정신과 의사이며 미국놀이연구소 소장인 스튜어트 브라운은 그의 저서 <Play>에서 “놀이는 자발적이며 자유로운 행위로서 목적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놀이는 그 자체로서 즐겁고 자유로운 행위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놀이 안에는 어느새 강제하지 않은 나름대로의 질서와 규칙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와 규칙이 놀이를 지속가능하게 해준다. 만약 게이머가 부단한 level up을 위해 게임의 규칙을 거슬러 정상에 등극하여 또 다른 형태의 사이버 권력을 부여받았다고 해도 그는 한낱 게이머일 뿐 놀이꾼으로 봐줄 수는 없다. 

스튜어트 브라운은 놀이를 사람으로, 이른바 ‘놀이 인격’으로 구분하는데, 온라인 게임이든, 오프라인 경기이든 모든 형태의 게이머는 ‘경쟁자’라는 인격을 입고서 참여할 때 놀이꾼으로서 진짜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게임은 익명성에 바탕을 둔 대상들마저도 ‘나와 너(I-Thou)의 관계 안으로 참여시킬 수 있어야 한다. 

게임에 빠진 사람은 모든 것 -점수, 상대, 상황 등-을 ’나와 그것(I-It)‘의 몰관계적 대상으로 대하기 쉽다. 심지어 게임에 걸림이 된다면 가까운 사람들 - 부모, 형제, 친구 등- 마저 적으로 대할 수도 있다. 

‘게임을 하는 것’과 ’게임에 빠진 것‘의 구분은, 보이지 않는 대상이지만 게임 안에서 분명히 공존/현존하고 있는 상대를 나의 놀이 안으로 초대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점수나 레벨이 목적이 되기 보다는 게임에 참여하는 대상을 놀이의 대상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마이클 코펠은 놀이를 의식적(ritual)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리면서, “거룩한 의식으로서 놀이는 개인과 공동체를 where we are-where we want to go, where we stand-where we are moving 사이의 간격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게임이 이처럼 거룩한 의식을 담보하는 건강한 놀이로서 우리 사회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끝으로, 게임을 둘러싼 ‘포노 사피엔스’[각주:1]들에게 실제적인 조언을 하고자 한다. 

이는 레벨 업을 위한 조언은 아니다. 그저 게임을 하는 자나 그 게이머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서로 더불어 즐거운, 또 다른 형태의 비행위적 게임을 제안하는 것이다. 

게이머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 함께 게임 시간이나 게임 가능 상황에 대해서 약속, 규칙을 정한다. 그리고 온라인 게임을 포함한 모든 게임이 그러하듯, 서로 그 약속과 규칙에 따라 성실히 게임을 수행하는 것이다. 

물론 이 게임에서 이길 때마다 승리감을 고취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승자에게 포상 -선물, 칭찬, 인정의 말 등-을 하는 것도 게임의 즐거움을 더해 줄 것이다. 이렇게 놀이로서 게임에 참여하는 모두가 함께 즐겁고 행복할 때 대한민국은, 계속 게임~ing 될 것이다!!


 박재필 (장신대 교수)



  1. 포노 사피엔스: 2015년 <이코노미스트>에서 처음 등장한 단어. 스마트폰을 통해 변화된 신인류를 뜻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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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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