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교회가 학대 피해자에게 안전한 장소가 될 수 있을까?



교회가 학대 피해자에게 안전한 장소가 될 수 있을까? (A Safe Place for Victims of Abuse)

가난하고 병들고 억압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안전했기 때문에 수천 명씩 예수님께 모여 들었다. 가끔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따르라고 명하셨다. 또, 가끔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따르게 해달라고 빌었지만 예수님은 따르는 대신에 평안 속에 살라고 사람들을 떠나 보내셨다. 예수님은 교회로의 초청을 정의와 상처 입은 자들을 돌보는 것보다 높이지 않으셨다. 이 기고문은 필자가 정말 사랑하는 두 사람이 썼는데, 이 둘 모두 학대 피해자의 안전한 공동체에게 정말로 무엇이 제공되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놀랍도록 도움이 되는 글이다.

―지미 힌턴(Jimmy Hinton)


“교회가 학대 피해자를 상담하는 방식은 종종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주는데, 그것도 자주 주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장소이다... 교회가 피해자들이 도움 받기에 최악의 장소라는 것을 말하게 되어 정말 심히 유감이다. 

―레이철 덴홀랜더(Rachael Denhollander) 리, 모건(Lee, Morgan). [각주:1]


지난 몇 년 “교회는 가장 안전하지 못한 곳이다.”라는 말이 이렇게 맞은 적이 없었다. 초대형교회에서 초교파적인 교회까지, 근본주의 독립 침례교에서 남침례교까지, 진보에서 보수까지, 종교 공동체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비극으로 넘쳐난다. 교회가 피해자를 대상으로 행한 정말 끔찍한 이야기를 자주 들으면 의심할 여지없이 교회는 지구상에서 학대 피해자가 있어서는 안 되는 가장 안전하지 못한 장소라고 볼 수 있을것 같다. 

믿음 공동체는 가해자가 활개치고 피해자는 피해 숨 죽여야 하는 치명적인 문화를 너무나 자주 숨긴다. 권력에 있는 자의 거만, 힘없는 자의 소외, 권력의 불균형 등에 조용히 지내며 ‘용서하는 것’이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우리의 신학과 그리스도의 복음은 책임보다 면죄부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자주 빼앗겨 왔으며, 교회 문화는 제도적 보호의 침묵하며 이에 공모해 왔다. 오늘날 더 이상 그 누구도 교회의 현재 상황에서 안전하지 않다.

피해자와 있다 보면 종종 “안전한 교회는 어딘가요? 어떻게 다시 돌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걸 알지요?”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가장 최근 통계에 따르면, 여성 세 명 중 한 명과 남자 여섯 명 중 한 명은 인생의 어떤 지점에서 성적 학대를 경험했다. [각주:2]

성도 100명에서, 25%는 필시 출석하기 때문에, 이 수치는 정말 낮게 잡은 추정치인 것 같다. 가정 폭력, 정서적·영적 학대를 포함하면, 몇몇 전문가에 따르면 이 수치는 무려 40%로 올라간다. [각주:3]

우리 모두는 깨닫지 못할지라도 학대 피해자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피해자는 미투 운동과 사회의 다른 학대 사건, 특히 현재 교회와 관련된 비극적 사건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있다. 

그러나 교회 출석을 잠시 하지 않는 피해자 일부는 많은 기독교인에게 문제가 된다. 많은 피해자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교회 모임을 잠시 쉬는 것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학대 피해자는 교회 공동체와 관련 없이 여전히 예수님을 믿을 수 있지만, 이 교회 공동체란 기독교인이 가한 정신적, 성적, 영적 학대의 깊고 오래가는 상처에서 벗어나는 장소가 될 수도 있다.

피해자와 있다 보면 종종 “안전한 교회는 어딘가요? 어떻게 다시 돌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걸 알지요?”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교회를 안전한 장소로 만드는 것은 우리 손에서 시작된다. 이 글이 안전한 교회에 대하여 배운 통찰력을 나누어 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교회를 안전한 장소로 만들기

피해자에게 하게 되는 가장 최악의 말은 “완전한 교회같은 것은 없어요.”이다. 이 혼돈스러운 정의는 피해자를 위축시킨다. ‘안전한’이란 단어는 ‘완벽한’이라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사람은 항상 타락한 세계에서 우리를 실망스럽게 하고 아프게 할 것이지만, 학대를 참는 것은 결코 우리의 최종 선택권이 아니다. 학대나 착취적 행위는 절대 어떤 상황에서도 용납되지 않는다. 

간단한 정의로 줄여보면, 학대는 누군가가 소외시키거나, 왜곡시키거나, 조종하거나, 협박하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동을 말한다. 학대는 성적, 육체적, 언어적, 정서적, 영적일 수 있고, 다양한 맥락에서 학대가 어떤지 말해주는 자료는 충분하다.

안전한 교회는 평범한 교회 출석자에서 대단히 존경 받고 재능 있는 유명한 목회자까지, 그 어떤 일원의 어떤 학대도 용인하지 않는다. 누구도 안전한 교회의 의무 위에 있지는 않다(참고. 마태복음 18장, 디모데전서 5장 19절). 그러나 안전한 교회는 모든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죄를 즉시 신고하고, 피해자의 입을 다물게 하거나 수치스럽게 하지 않고, 명확한 자료로 피해자를 지지한다. 

대부분의 목회자는 상처 입은 피해자를 상담하는 데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안전한 교회는 피해자를 상처 치유 전문가에게 맡긴다. 안전한 교회는 슬픔과 애통이 상처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라는 것과 분노는 부정행위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라는 것을 안다(참고. 시편 82절). 안전한 교회는 피해자에게 상실에 대한 슬픔과 배신을 충분히 풀 수 있는 여지를 주는 한 공동체로 피해자와 슬퍼한다(참고. 로마서 12장 15절). 안전한 교회는 사람들이 거짓 양성에 순응하지 않도록 한다(고린도전서 12장 26절). 안전한 장소는 피해자가 말하는 것을 그저 들을 뿐만 아니라, 피해자를 알고자 하는 공감의 마음으로 진실 되게 듣는다. 피해자와 함께 한다는 것은 장기간의 과정이며 상처를 극복한다는 것은 인생의 긴 여정이다.

고압적이고 독단적인 배경의 사람들이 듣고자 한다는 것은 특히 어렵다. 우리는 종종 한 사람이나 어떤 상황을 빨리 해결하고자, 불편한 마음에서 상처에 대한 조언을 내뱉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이런 상처는 피상적인 상처가 아니라서 빨리 치유될 수 없다. 다이앤 랭버그(Diane Langberg)는, 기독교 치료사로, 피해자는 ‘말하기, 눈물,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각주:4]

사실상 용서를 강요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치유를 방해하고 그 치유의 범위도 피해자에게 크게 줄어든다.

가해자는 자신이 피해자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기만과 변절을 사용하는 조작의 전문가이다. [각주:5]

그러나 가해자가 책임지게 하지 않는 한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이것은 가해자가 권력자일 때 정말 중요하다. 왜냐하면 가해자가 주목 받을 때 상처 입은 피해자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해자가 호감이 가고, 멋지고, 번지르르한 영성을 두르고 있기 때문에 끔찍한 학대가 간과된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 형태는 계속해서 반복돼도 피해자가 양산되며 아예 묻혀 있을 때, 사람들은 항상 “피해자의 얘기를 들어줬어야 했는데.”라며 아쉬워한다. 

그러나 한 지도자가 도망가거나 불명예로 물러났다가도, 종종 다른 장소에서 다시 나타날 때,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될거라고 경고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교회 문화는 듣지 않는다. 우리는 반드시 가해자보다 더 똑똑해져야 하고, 바로 이것은 피해자를 믿고 모든 상황을 교회가 제대로 다루고자 할 때 시작된다.

너무나 자주, 피해자는 믿음의 공동체의 무지, 공감 부족, 상황을 빨리 바꾸려는 조급함에서 더 큰 고통을 받아, 이미 상처 받는 있는 누군가에서 깊고 지속적인 상처를 남기게 된다.

안전한 교회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중시하는 곳이며, 하나님이 이들을 고치시면 이들이 늘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강인한 정의의 요원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학대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종종 수용에 대한 공동 사회의 갈망은 다른 상황이었으면 분명하게 보게 되는 우리의 지혜와 인식을 손상시킨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셔서 경고하시는 데 열심이시다. 종종 충고할 수 있는 피해 당사자를 보내실 때도 있다. 이들은 살아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조작과 학대가 어떤지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연륜 있는 선구자와 같이, 언제나 하나님은 값진 지혜로 조작자의 매력을 넘어 그 악을 꿰뚫어보는 면역 체계를 당신의 몸에 주신다.


교회 문화 다루기

진정한 영성은 측정하기 힘들기 때문에 기독교 기관에는 기만의 문화가 있을 수 있다. 이미지를 의식하는 공동체는 다친 사람들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겉치레만 남아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안전한 교회는 피해자가 다른 사람들과 떨어지지 않고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으며, 이들에게 무게를 두고 함께하는 곳이다. 우리 모두는 짐을 지고 그리스도에게 다가가고,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생기는 상처를 감수하기도 한다. 안전한 장소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그것에 가치를 두고 누군가의 본능적인 상처에 대한 반응과 ‘죄’ 사이에 차이점을 조심스럽게 구분한다. 안전한 교회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즉 PTSD나 상처, 슬픔을 죄와 혼동하지 않지만 연민은 갖는다. 사랑의 공동체에서는 ‘반감’이나 ‘무관용’에 대한 주장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너무나 자주, 피해자는 믿음의 공동체의 무지, 공감 부족, 상황을 빨리 바꾸려는 조급함에서 더 큰 고통을 받아, 이미 상처 받고 있는 누군가에서 깊고 지속적인 상처를 남기게 된다.

기관의 변화가 수용될 때, 안전한 교회는 투명성과 책임을 포용하고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개인적이고 기업적인 회개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문화를 바꾸려는 의지로 해로운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갈망을 갈아치우는 장소를 피해자는 찾고 있다. 가해자는 모르게 만들어져 있는 기독교의 천국을 이용하고 있다. 학대와 상처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갈수록, 우리 사회의 정치, 근무지, 가정, 교회, 그 어디나 바뀌어야 함을 알게된다. 

교회는 지도자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권력에 다가가는 방법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어떤 곳에서는, 목회자가 성령을 대신하며, 목회자가 성도에게 바라는 복종에 대한 기대는 종종 우상숭배에 근접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믿음의 공동체를 상처 입은 자에게 안전한 장소로 만드는 데 책임이 있고, 이는 사회의 영향과 동료의 압박, 강압적인 제어가 교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모두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물고기가 물 만난 듯, 사회화의 결과를 경험한다. 우리는 내적 경고의 빨간 불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만약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으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고, 그럴 책임도 있다. (참고. 요한1서 4장 1절,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0~21절)


예방과 교육

우리 중의 피해자를 돌보는 것을 넘어, 교회는 예방에 대한 가장 좋은 책략을 갖추었는가? 그레이스와 같은 국가 기관을 알고 있고 상처 입은 자들을 보호하고 이해하는 믿음의 공동체에 힘을 줄 수 있는 지역 자원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몇 가지 질문과 함께 학대 예방 정책이 있는지에 대하여 교회 지도자에게 물어야 한다. 없다면, 이는 문제이다. 교회 리더십이 우리에게 제공해야 하는 데 책임을 피하고 있다면, 이것도 문제이다. 유능하고 제대로 진료한 봉사자인가? 해마다 경력 확인을 수행하고 있는가? 많은 가해자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경력 확인에만 의지하기보다는 행동을 살펴보는가? 항상 아이가 있는 곳에 최소 두 명이나 세 명의 봉사자가 있는가? 봉사자 한 명 이상이 돌보는 아이들과 화장실에 가는가? 탁아소와 교실에 창문이 있는가? 목회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거나 목회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임원이나 장로가 있는가? 가정 폭력 소장을 진행하는 배우자를 적절히 지지하는가? 소송에서 진다면 어떻게 반응하는가?


결론

피해자가 교회에 출석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교회를 안전한 장소로 만들 수 있도록 뭐든지 다 해야 한다. 피해자는 준비가 되면 출석할 것이다. 하나님은 어디든 계시고, 피해자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많은 구절 중에서 시편 139편은 예배에 참석할 수 없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끊임없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 있게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은 피해자에게 화를 내지도 성가셔 하지도 않으시며, 교회를 따라 우리도 그래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와 함께 하신다(시편 34편). 안전한 교회를 지으려면 안전한 사람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줄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레미 디더릭(F. Remy Diederich)의 <Broken Trust>에서 나온 말은 분명 더 이상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기독교인에게 다가가는 방법에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에게 특히 도움이 된다.

“이전 집단이나 어느 단체라도, 바로, 돌아가려는 유혹이나 의무감을 참아야 한다. 실행 기초의 환경에서 벗어나면, 자연스럽게 ‘좋은 기독교인’이 되어 돌아가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게 될 것이다.

하나님보다는 사람이나 기관에 건강하지 않게 의지한다는 것은 영적 학대의 병적 일환이다. 조직된 종교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은 하나님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방법이다. 선의의 성도는 믿음의 교제를 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은 위험하다, 성도의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으면 모든 종류의 문제를 초래할 것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학대받는 결혼을 막 끝난 사람에게 바로 결혼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두 시나리오에서, 이 사람은 이제 막 일어난 일을 반추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들의 영혼은 다시 공동체에 들어가기 전에 치료가 필요하다. 

영적 안전은 조직된 종교에 있지 않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에서 나온다. 믿음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어느 날 건강한 공동체의 활동적 일원이 되어 돌아갈 것을 바라지만, 공동체의 일원으로 활동하지 않아야 한 계절을 살아남을 수 있다. 이는 마치 상처 입은 운동선수가 상처를 돌보기 위해서 경기에서 떠나 있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상처 입은 성도는 속해 있는 믿음의 공동체에서 떠나 있어야 할 때가 있다. 이 두 경우에서, 목표는 돌아가는 것이다. 선의의 친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종종 영적으로 학대받은 경험을 한 후에 생기는 미숙한 감정이다. 너무 빨리 예배로 가는 것은 사실 상처를 입힐 수 있다. 과거 학대를 상기시키는 경험에 스스로 너무나 민감하게 반응해서 깜짝 놀라게 될 수 있다. 조직된 종교에 안식년을 스스로에게 주어야 깨어진 신뢰가 치료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성육신하는 안전한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 다이앤 랭버그는 <The Spiritual Impact of Sexual Abuse>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직접 하나님의 성품을 시간에 따라 증명하는 우리의 존재가 피해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리의 지표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거나 축소하는 방법으로는 안 된다. 종종 말씀은 우리가 정말 의미하는 바를 이해만 하라고 쓰여진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런 일은 어렵기도 하고 큰 영광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섬기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이 이해되고 믿어진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는 실로 능력 밖의 일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을 받으면. 하나님에 갈급한 마음으로, 무릎 꿇게 할 일이라서, 그가 아직 모르는 매우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끌 수 있다.


어둠과, 절망, 고통스러운 아픔이 있는 곳에, 예수님이 계신다. 결코 우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신다. 사랑이 넘쳐나든 그렇지 않든 몇몇 대부분의 신성한 교회 예배가 있는 곳에 바로 어둠이 있다는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 안전한 장소가 교회 건물 자체일 필요는 없다.


그리셀 머디나(Gricel Medina)는 목회자이자, 강연자, 작가이고, 세 군대의 교회를 개척하여 미드사우스 콘퍼런스(MidSouth Conference)의 기도 운동을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리셀 머디나 목사는 커버넌트 콤패넌(Covenant Compamion) 외에, 스페인어와 영어로 멀리 배부되는 몇몇 잡지, 묵상집,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다. 수상 잡지 <Mutuality>와 CBE 블로그 어라이즈(Arise)에 정기 기사를 싣고 있다. CBE 인터내셔널 콘퍼런스(International Conference)와 커리지 콘퍼런스(The Courage Conference)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Twitter: @pastorgricel


라이언 애슈턴(Ryan Ashton)은 피해자, 대변자,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밥 존스(Bob Jones) 대학의 2018 졸업자인, 라이언 애슈턴은 그레이스(GRACE)의 SNS 기술과 커리지 콘퍼런스(The Courage Conference)의 총감독이다. 현재 성적 학대의 피해 지지자로 그린빌즈 줄리 밸런타인 센터(Greenville’s Julie Valentine Center)에서 봉사하고 있다.

Twitter: @ryanllanshton


원문은 여기를 클릭하면 된다.


지미 힌턴(Jimmy Hinton)

지미 힌턴은 학대를 증오하고, 보호와 추위를 사랑한다.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목회자이자, 전직 트럭 운전사이자, 아동성애자의 아들이다.


원문은 www.churchleaders.com 에 게시된 "A Safe Place for Victims of Abuse"이며, 문화선교연구원에서 비영리 목적으로 번역, 편집하여 한국교회에 소개하는 글입니다. 



   

  1. “래리 나사르의 증언은 계속됐다. 그러나 용서보다는 복음에 더 많은 것이 있다.” Christian History\오늘날의 기독교 역사와 오늘날의 교회와 기독교를 알게 되다. www.christianitytoday.com/ct/2018/january-web-only/rachael-denhollander-larry-nassar-forgiveness-gospel.html 2019년 1월 15일 [본문으로]
  2. “미국 내 성폭행” 성폭행 통계\전미성폭력재원센터(National Sexual Violence Resource Center, NSVRC), www.nsvrc.org/stastistcs [본문으로]
  3. 아동을 보호하고 피해자를 옹호하는 목회자에 관한 레이철 덴홀랜더(Rachael Denhollander)와의 인터뷰. 2018년 2월 15일. Practical Shepherding practicalshepherding.com/2019/02/14/interview-with-rachael-denhollander-about-pastors-protecting-chidlren-and-advocating-for-victims/ [본문으로]
  4. 다이앤 랭버그(Diane Langberg)에서 방문 Helping Up Mission, 2017년 5월 11일 helpingupmission.org/217/05/langberg 2019년 2월 8일 [본문으로]
  5. “What is DARVO?” Commentary: Loftus, Bugs Bunny, Memory, & Media, Center for Advanced Study in the Behavioral Sciences, Standford University, https://dynamic.uoregon.jjf/defineDARVO.htm?fbclid=IwAR29jTrqhzHHliPt0GxdZZDBPX5y16-a_idcFthXIB05dYj8prcU8q3NUK#Short%20Definition 2019년 2월 18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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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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