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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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혼

<퍼펙트 게임>(박희곤, 드라마, 2011, 12세)

철학자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진리는 세계와 대지의 투쟁의 격돌 속에서 일어난다고 말했다.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진리는 인간의 삶의 터전이요 환경, 곧 이미 주어진 “것”들이 하나의 작품으로 거듭나게 될 때,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것”들이 단지 인간의 필요나 장식물로만 여겨진다면, 진리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이 작품이 될 때, 진리가 작품 속에 안착할 때, 예컨대, 돌이 조각품이 될 때, 자연이 화폭으로 옮겨졌을 때, 신분고하와 남녀노소를 떠나 사람이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본질인 하나님의 형상됨, 곧 돕는 자의 삶을 진정성을 갖고 살아갈 때, 적과의 치열한 싸움이 승패의 결과가 아니라 화해와 평화로 이어질 때....비록 이렇게 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갈등과 번민, 심지어 치열한 투쟁의 과정이 있더라도, 긴장과 갈등의 순간이 지나갔을 때, 진리가 작품 속에 고요히 머물러 있게 될 때, “것”은 예술작품이 되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데올로기와 전체를 전면에 내세우는 폭력을 통해 작품이 “것”으로 전락할 위험에서 예술을 구제해내는 일은 미학이 할 일이다. 미학은 때로는 작품을 다방면으로 비판하지만 때로는 작품 형성에 방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폭력으로 작품이 변형되거나 왜곡되지 않도록 보호한다.

<퍼펙트 게임>은 스포츠 영화로서 이점을 매우 잘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점에서 그런지 살펴보자.

1987년 6월은 뜨거웠다. 그러나 6월 항쟁을 통해 획득한 ‘서울의 봄’, 1987년은 정치적인 관심만이 집중된 해는 아니었다. 스포츠 역사상 기록적인 한 페이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5월 16일 부산에서 열린 최동원과 선동열 선수의 맞대결이 그것이다. 두 스포츠 영웅에 주목된 경기를 스크린으로 옮겨 놓은 <퍼펙트 게임>은 바로 이 감격과 감동의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사실 야구에서 말하는 “퍼펙트 게임”이란 한 명의 투수가 선발 등판해 단 한 명의 타자도 진루시키지 않고 끝내는 경기를 말한다. 1982년 프로 야구 창단 이래로 한국에서는 한 번도 이뤄진 적이 없을 정도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영화는 또 다른 의미에서 ‘퍼펙트 게임’을 생각하게 하는 이미지 구현을 시도한다.

여론의 폭발적인 관심에 밀려 열리게 된 두 선수의 맞대결은 2대 2로 끝났다. 15회 연장전까지 이어지면서도 양팀은 승부를 내지 못하고 결국 통산 1승1무1패의 기록으로 양자의 스릴 가득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대결은 끝이 났다. 승패를 가르는 경기에서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없이 끝나는 것은 미완성인 게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두 선수의 맞대결은 단순히 야구라는 ‘물적인 것’에 불과한 것, 당시 파쇼 정치의 오락거리로 전락된 것, 연세대와 고려대의 연장전이고 선배와 후배의 갈등을 유발시키고, 경상도와 전라도로 양분시키고, 해태와 롯데의 자존심 싸움에 불과했던 “것”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 모두를 감동시키고, 적에게까지 박수와 환호를 보낼 수 있었던 것, 다시 말해서 대중문화로서 스포츠가 하나의 진리를 매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아니, 그 당시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이든 있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든 모두에게 새로운 감동을 전해준 스포츠 영웅들의 이야기로서 영화가 예술이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실제로 두 선수 사이에서 감도는 팽팽한 긴장감에서 감독은 질투를 감지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을 두 지역과 두 팀 그리고 두 선수의 맞대결로 이어지게 한 동력으로 보았다. 그러나 어떤 동기에서 시작했든 결과는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정치적인 놀음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오락거리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로 말한다면, 투혼이 아닐까? 어의적으로는 ‘끝까지 싸우려는 굳센 마음’으로 정의되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싶은 말이다. 어깨가 망가지고 손가락 끝이 찢어지는 아픔과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기자들을 감동시켰고, 함께 뛰는 선수들의 투혼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을 지켜보는 관중들은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양쪽 관중들이 상대편 선수를 향한 환호와 박수갈채로 가득하고, 전라도와 경상도 관중들 모두가 하나가 된 경기장에는 피터지게 싸워서 누구든 이겨야만 속이 후련하다고 느끼는 파쇼 정치인들이 발붙일 만한 곳은 없었다. 감격의 도가니에서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여준 장면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었다. 그들은 단지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앙은 종종 마라톤에 비유된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리는 정신, 약속을 향한 열심에서 결코 포기하거나 중단해선 안 되는 것이 신앙이다. 그러나 신앙을 나 홀로 싸움이나 혹은 승리에 비유하며 전투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편 가르는 행위이다. 사람을 ‘것’으로 보려는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은 승자를 가능하게 하지만, 오히려 패배한 자들을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투혼을 발휘하는 일이다. 약속을 향해 가는 자들이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도 원하시지만, 무지하여 제 멋대로 사는 사람들이라도 먼저 믿는 자들이 투혼을 발휘하여 보는 자들의 감동을 이끌어내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끝까지 함께 갈 수 있도록 고무하기를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 우리를 먼저 부르신 것이다.

한국 스포츠 영웅 고 최동원 선수와 선동열 선수의 이야기는 자신들의 투혼으로 2012년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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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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