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에 대한 신학적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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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호모 데우스를 통해 인간과 인간 역사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논의에 우리를 초청한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 전 학문 분야를 포괄하면서 인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관해 논하는 하라리의 탁월함과 성실함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하라리가 던져 주는 많은 성찰과 논의의 주제들이 있지만 지면의 한계로 인해 몇 가지를 선별하고자 한다. 특별히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우선적으로 응답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한 주제들을 크게 세 가지로 논할 것인데, 하라리의 생각에 대한 기독교의 응답을 모색할 것이며 이러한 모색이 대화의 전개와 심화를 위해 작으나마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1. 과학과 종교의 만남

 

먼저, 과학과 종교의 관계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라리는 과학은 사실을 밝히는 반면 종교는 윤리적 규범이나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식으로 과학과 종교를 엄격하게 분리하는 이분법적 인식을 경계하며 또 윤리적 판단과 사실적 진술을 분리하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님을 인정한다. 다만 종교의 언명에도 사실에 대한 진술이 내포되어 있고 또 그럴 수 있다는 여지를 열어두면서도, 종교가 사실에서 윤리적 규범으로 경로를 바꾸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종교는 사실적 진술을 윤리적 판단으로 바꾸어 심각한 혼란을 일으키고, 비교적 간단한 논쟁으로 끝날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집요한 습성이 있다”(271).

 

여기서 하라리는 과학의 발견과 서술에서 종교적 윤리적 규범으로의 전환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하라리는 이른바 자연주의 오류옹호 입장에 동의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입장에 대한 일방향적 동의는 규범의 원천을 존재에서 찾음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결정론이나 규범의 절대화 등의 오점을 경계하는 데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겠으나, 서술에서 규범으로의 경로를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써 과학과 종교 사이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의미와 규범의 차원에서의 소통이나 협력의 가능성을 낮추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서술에서 규범으로의 전환을 허용하는 대표적인 접근으로서 자연법 윤리를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기독교의 주요한 옹호자는 아퀴나스이다. 자연법 윤리는 사실에서 규범으로의 전환을 규범 생산의 본질적 과정으로 인식한다. 이성으로 자연 혹은 인간의 본능(nature)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성찰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자연스러운 역동이나 지향을 발견하고 그것을 원리로 규정한다. 자연법의 제1원리는 선은 추구되어야 하고 악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자명하기에 부가적인 논증이나 증명이 필요 없으며, 다른 모든 규범의 원천이 된다. 서술규범진술의 근본적 토대가 되는 것이다. 자연법적 접근을 수용할 때, 과학과 종교가 인간의 목적에 관한 의미 추구나 인간의 행위와 삶을 규율하는 규범 탐색에 있어서 만날 수 있는 지점은 그 빈도나 강도에서 증가하게 될 것이다.

 

이를 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창조질서에 대한 서술이 규범의 원천이 된다. 다만 창조질서에 대한 창조신학적 이해와 해석 그리고 서술은 창조의 맥락에 국한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기독론적 구원론적 관점도 존중하며 읽을 때 온전한 의미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밝혀 두고자 한다.

 

이러한 읽기의 한 보기로서, 몰트만(Jürgen Moltmann)의 창조에 대한 기독론적 구원론적 해석을 주목하여 볼 필요가 있겠다. 몰트만에 따르면, 창조자이시며 창조된 모든 것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태초의 창조에서 보여주신 존재와 행위의 모범은 자기 제한이다. 창조의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고 비우고 개방하고 나누심으로써 세계를 창조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에 창조와 구원의 신학적 규범적 융합이 있다. 창조 안에 성육신적 자기 제한이 들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제한의 빛에서 창조와 창조의의 전개는 규범적 방향성을 찾게 된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하여 무()로부터의 창조 곧 태초의 창조에 대한 기독론적 구원론적 해석을 내린다. 인간을 포함하여 온 피조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하신 하나님은 피조물의 죄악과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전체 세계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며, 이 소원을 완수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사역 가운데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무에 드러내신다. 특별히 십자가라는 절대적 유기(遺棄)의 상태 속에 성자 예수를 통해 성부 하나님이 죽음과 지옥에 던져짐으로써 하나님이 속으로 곧 하나님 자신의 자기 제한으로 이루어지고 또 거기로부터 세계를 창조한 바로서의 속으로 들어가신다.

 

이제 하나님은 그 무 곧 절대적으로 버림받은 상태를 신적 현재로 채우신다. 그 현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확연하게 드러난 신적 자기 비움 안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고 나누어주고 고난을 당하며 결국 죽음까지도 경험하는 바로서의 사랑의 현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 사랑의 현재는 영원한 삶을 모든 피조물에게 선사하며 피조세계를 궁극적 완성으로 이끌어 가신다.[각주:1]

 


#2. 힘의 추구’와 바벨탑 이야기

 

다음으로, 인간 문명과 의 상관성이라는 주제이다. 하라리는 근대 이후 인간 문명의 핵심적 특징을 힘의 추구로 규정한다. 전근대의 인류가 힘 대신 의미를 추구했다면, 근대 이후 인류는 의미를 포기하는 대신 힘을 얻고 또 그 힘을 더 확장하려 한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의 삶은 의미가 사라져버린 우주 안에서 끊임없이 힘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근대 이후 문화는 역사상 가장 위력적이고, 쉼없이 조사하고 발명하고 발견하고 성장한다”(280).

 

하라리는 문명의 진보와 인간 진보를 결정적으로 또 본질적으로 연결하면서, 그 진보의 핵심적 내용을 힘의 창출과 확장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라리는 을 문명과 인간의 진보를 평가하는 척도로 보는 듯하다. 힘의 유무와 힘의 확장 여부가 기준이 된다는 말이다. 다만 힘의 규범적 성격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위한 관심이나 열심은 그렇게 커 보이지 않는다. 힘은 생존과 진보의 동력이라는 점에서 힘의 존재와 발현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지만, 어떻게 또 무엇을 위해서 발현되느냐에 대해 신중하게 검토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힘 자체가 가치판단의 척도로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할 때, 무엇보다도 인간을 포함한 전체 생명 공동체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과 위계의 부정적 결과로 고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슈바이커(William Schweiker)에 대한 신학적, 성서적 성찰은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슈바이커에 따르면, 현대 사회에서 인간에게 의미 있는 삶이란 힘을 추구하는 삶이다. 힘을 창출하고 확장하는 데 기여하는 삶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라는 말이다. 도덕적 가치와 규범은 초월적 기원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고안물이며, 그 목적 설정의 핵심에는 힘의 창출과 확장에 대한 욕구가 깔려 있다고 슈바이커는 강조한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 사는 인간은 가치를 힘의 증대와 동일시하며 힘이 증대될수록 세상은 더 나은 세상으로 변모할 것이라는 신념을 견지한다. 힘의 증대에 기여하는 인간의 가치들이란 결국 인간의 목적을 위해 사용될 뿐이다.[각주:2] 슈바이커는 현대 사회의 윤리적 현실을 성서적 사유를 통해 분석·평가하며 기독교적 대안을 제시한다. 특별히 그는 힘의 추구와 가치창조라는 관점에서 바벨탑 이야기와 현대 사회 사이의 유비를 찾는다. 바벨탑을 건설한 인간과 인간 공동체의 목적론적 역동 안에서 현대적 역동을 발견한다.[각주:3] 이 둘 사이의 유비의 관점에서 슈바이커는 기술의 힘을 통한 생존의 기반 마련, 힘을 통한 문명 통합, 가치 판단의 척도로서의 힘에 대한 강조 등에 주목한다.[각주:4]

 

한편,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과 인간 공동체의 문명적 시도를 판단하신다. 특별히 인간만의 독특한 가치 창조를 위한 힘의 사용을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술로 대표되는 힘의 사용을 통해서만 생존의 필수적 요소를 마련할 수 있고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를 극복하는 문명적 통합에 이를 수 있다는 신념에 도전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슈바이커는 바벨탑 이야기는 선사시대와 이스라엘 족장 역사를 잇는 연결고리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보는데, 바벨탑 이야기와 아브라함 이야기를 대비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를 좀 더 심도 있게 밝힌다. 바벨탑의 인간은 스스로 가치를 만들고 창출하는 인간이며, 그러한 인간중심적 가치창조의 삶의 동기는 스스로 이름을 내는데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은 다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름을 주시며 다른 민족과 달리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민족적 실존의 초월적 기반을 부여받는다. 바벨탑과 아브라함(그리고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대비를 통해 인간에게 더 중요한 것은 힘의 사용 여부가 아니라 힘에 대한 바른 관계 설정이라는 점이 드러난다.[각주:5] 인간의 힘을 통한 가치 창조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인간의 힘에 한계를 설정하시고 가치의 측면에서 윤리적으로 인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 안에서 이루어져 한다는 것이다.

 


#3. 진보사관과 인류의 진화 vs. 계속적 창조와 Adventus

 

마지막으로, 역사관에 관해 생각해 보자. 하라리의 역사관은 진보관념을 핵심으로 한다. 인간론적으로 말한다면,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에 머무르지 않으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인간의 운명은 호모 사피엔스 이전 단계의 인간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발전하며 다시 호모 사피엔스의 필연적 쇠퇴에 이은 더 나은 단계의 인간 곧 호모 데우스 단계의 인간으로 진보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데우스곧 하나님은 기독교의 전능하신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 존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신성(divinity)을 확보한 인간으로서 호모 사피엔스의 본질적 특징들은 그대로 보유하지만 육체적, 정신적으로 향상된 능력을 갖춘’ ‘훨씬 우수한 인간 모델이며, 그리스 신들이나 힌두교의 천신들처럼 약점, 꼬인 구석, 한계를 가질 테지만 우리보다 훨씬 더 큰 차원에서 사랑하고 증오하고 파괴할 수 있[]” 새로운 인류인 것이다(74).

 

이러한 인류와 역사의 진보에 대한 하라리의 생각은 역사에 대한 반추의 결과이기도 하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관찰과 서술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라리의 역사관과 그 역사관에 근거한 인간 진화에 대한 견해에 따른다면, 호모 데우스마저도 인간의 궁극적 완성이 아니다. 진보가 인간의 내적 본질이며 인간 역사의 실증적 증언이기에, 호모 데우스 이후의 발전은 필연적이다. 진보에 대한 역사적 안목과 확신이 인간 문명 발전의 중요한 동인이 된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나, 진보에 대한 단편적 혹은 일방향적 신념에 내재된 위험을 식별할 필요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미래에 있을 발전된 양상에 초점을 둠으로써 어제오늘의 인간에 대한 가치 평가가 정당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점, 인류의 역사가 진보라는 것이 결코 전면적(혹은 총체적)이지 않고 언제나 진보의 이면에 퇴보가 있어 왔다는 이중성을 증언한다는 점 등을 대표적인 위험의 보기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라리의 역사 이해에 대해 기독교는 어떤 비평적 성찰과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가?

 


 

진보 사관에 대한 대안이 될 만한 기독교 역사관의 대표적인 보기로서, 몰트만의 역사 이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몰트만에 따르면, 태초의 창조의 본질적으로 중요한 한 측면은 시간의 창조이다.[각주:6] 시간은 오직 변화에서만 나타나고 인지될 수 있기 때문에 태초의 창조는 변화의 창조’(creatio mutabillis <크레아티오 무타빌리스>)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창조된 세계는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으며, 시간 속에서 자신의 역사를 향하여 개방되어 있다. 하나님이 인간과 세계를 그의 영광의 나라를 향해 지으셨다면 피조된 인간과 세계를 뒤로 돌이킬 수 없는 앞을 향한활동 가운데 두셨다는 뜻이 된다.[각주:7] 여기서 몰트만은 계속적 창조를 논한다. 하나님의 창조는 태초의 창조로 끝난다는 의미에서 일회적이지 않고, 계속된다. 다만 이 계속적 창조는 태초의 창조를 통해 무에서 창조된 에서 새로운 유를 창조하는 것이다. 계속적 창조는 구원론적 섭리의 관점에서 두 가지 전망을 내포하는데, 피조된 세계의 보존과 피조세계의 완성에 대한 준비이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하여 말해 본다면,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는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으로부터 들어와 그 완성으로 작용하는 것이며 궁극적 완성의 목적을 향해 준비함으로써 태초의 창조를 보존한다.[각주:8] 여기에 계속적 창조라는 관념이 진보 사관과 구분되게 하는 중요한 신학적 요소가 있음을 밝혀 두어야 하겠다. 계속적 창조는 종말론적 지평을 본질적으로 포함한다. 만일 이 지평을 제거하고 역사내적인계속적 창조만을 말한다면, 자칫 기독교의 계속적 창조론이 진화론적 진보 사관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 될 수 있다. 역사의 궁극적 완성이 있을 마지막 날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계속적 창조는 진보된 미래의 영속적 지속을 상정하는 진보 사관과 강한 유비를 띨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에 진화론적 진보와는 분명하게 구분되면서, 세계의 궁극적 완성을 향한 보존과 혁신 행위로서의 계속적 창조를 견지하기 위해 몰트만의 종말론적 이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몰트만은 종말론을 에 관한 가르침이라기보다 시작에 관한 가르침으로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예기적 선취된 하나님 나라의 시작에 가르침인 것이다. 몰트만은 도래’(adventus <아드벤투스>)로서의 미래 개념을 제시한다.[각주:9] 그는 하나님의 미래는 직선적 시간 개념으로 온전히 포착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하나님이 이러이러하셨고 또 이러신 것처럼, 앞으로 이러실 것이라는 식()의 관념으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미래는 하나님이 오심’(coming) 안에 있다. ‘도래혹은 오심으로서 미래는 직선적 시간관에 따라 과거와 현재의 시제 다음에 이어지는 시점으로서의 미래와 미래에서의 완성을 가리키기보다, 역사적 시간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의 미래의 능력이다. 이 도래 안에서 하나님은 현재적으로 역사하신다. 다시 말해, 구원의 종말론적 영광의 미래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은 이 세계와 역사 속에서 옛 것을 사라지게 하고 새 것을 불러일으키는 새 창조의 능력을 나타내시며,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불러일으키신다.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불러일으키심 안에서 인간의 역사를 궁극적 완성을 향해 움직여 가신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기적으로 선취되고 이미 시작된 종말론적 완성으로부터 이 역사 속으로 들어오심이 세상이 종말론적 미래를 향해 움직여 가는 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 나가며

 

하라리는 인간진화의 핵심 요인을 과학기술 문명의 진보에서 찾음으로써 인간론 논의의 지평을 확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기독교 신앙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역할을 찾는다. 하라리가 인간과 과학기술 문명을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기에, 새로운 인류를 향한 진보의 핵심적 요인으로서 과학기술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윤리적 성찰은 필수불가결한 과업이 될 것이며 기독교 신학과 윤리는 이 과업을 충실하게 수행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하라리가 인간 문명의 본질적 특징을 힘의 추구와 지속적인 진보로 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인류가 추구하는 힘과 진보에 대한 신학적 윤리적 관점에서의 비평적 논의와 성찰 그리고 대안의 제시는 인간 공동체가 바벨탑의 오류에 빠지지 않고 참된 인간됨을 구현하는 문명을 이루어가는 데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바라 할 것이다.

 

글쓴이. 이창호 교수(장신대, 기독교와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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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ürgen Moltmann, 김균진 역,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1), 117-18. [본문으로]
  2. William Schweiker, 문시영 역,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윤리』 (서울: 살림, 2003), 66-68. [본문으로]
  3. 위의 책, 72-73. [본문으로]
  4. 위의 책, 73-74. [본문으로]
  5. 위의 책, 74-75. [본문으로]
  6. Jürgen Moltmann, 김균진 역,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143-44. [본문으로]
  7. 위의 책, 249-50. [본문으로]
  8. 위의 책, 251-52. [본문으로]
  9. Jürgen Moltmann, Das Kommen Gottes, tr. by Margaret Kohl, The Coming of God (Minneapolis: Fortress, 1996), 25-2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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