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사일런스> 보기 - 배교자의 변론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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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가 엔도 슈사쿠(1923~1996)1966년에 장편소설 <<침묵>>을 출판하였다. 17세기 일본에서 일어난 박해와 순교 그리고 배교 역사의 한 단면을 다루고 있다. 한국에서는 1973년 성 바오로 출판사에서 번역하여 처음 소개되었고, 1982년 개신교 출판사인 홍성사를 통해서도 출판되었다. 여하튼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으며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는 작품인데,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영화적인 표현에 대한 궁금해 할 것이다. 비교적 소설을 충실하게 재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모든 내용을 스크린으로 옮길 수 없는 상황에서 감독은 소설을 어떻게 이해하고 영화적으로 표현했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감상 포인트다.

내용은 일본 기독교 박해사와 순교사의 단면이지만, 영화의 의미를 묵상할 때는 무엇보다 가톨릭 신앙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을 명심하면 좋겠다. 개신교 박해 및 순교의 역사와는 달리 오직 가톨릭 신앙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직자에 대한 성도들의 의존도에 있어서 특히 그렇다. 그러나 성도의 고난과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주제는 보편적인 정서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영화와 관련해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과거 <예수의 마지막 유혹>(1988)으로 전 세계적으로 논란의 중심에 섰던 적이 있다. 한국에서도 교회의 반발이 거세 개봉관을 찾지 못했고, 단성사에서 개봉할 기회를 겨우 얻었지만 교계의 반발이 거세 개봉된 지 1주일 만에 종영해야 했을 정도다. 니코스 카잔차스키(1883~1957)의 동명 소설을 각색하여 제작한 영화였는데, 소설에 대해서는 큰 반발을 보이지 않았던 한국 교회가 영화로 제작되어 개봉하자 내용이 예수 이미지를 심각하게 훼손하여 신성을 모독한다는 이유로 비판의 날을 세웠었다. 극장 앞에는 상영을 반대하는 목회자들이 지키고 서 있어서 호기심에서 극장을 찾았던 성도들은 발을 돌려야 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화는 2002년에 비로소 정식으로 개봉할 수 있었지만, 이때도 교회는 영화 상영을 거세게 반대하였었다. 이런 그가 만든 <사일런스>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그리고 관객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하다.

 

한국에서는 2017년에 개봉했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201612월에 개봉되었다. 촬영은 일본이 아닌 대만에서 이뤄졌다. 2016년은 소설이 출간된 지 40년이 되는 해이고, 엔도 슈사쿠 서거 20주년을 맞는 해이다. 공식적으로 소설을 영화로 제작하겠다는 발표는 2014년에 나왔지만, 영화제작이 기획되고 있다는 소문은 이미 그 이전부터 있었다. 스콜세지 감독에 따르면, 소설을 처음 접했던 1988년부터 영화 제작의 꿈을 꾸었다고 한다. <예수의 마지막 유혹> 이후 30년이 조금 못된 시기에 다시금 기독교 영화를 만든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사일런스>17세기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데 과거와 같은 양상의 논란은 아니겠지만, 이번 영화 역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특히 개신교 내에서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킬 소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두고 전개되는 논쟁은 환영하지만 근본주의적인 신앙에 근거하여 필요 이상으로 과열되지 않기를 기대한다.

 

영화 이야기의 얼개는 이렇다. 일본은 새로운 문물을 가지고 오는 서양 선교사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야심을 위해 총포와 화약을 가지고 있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인 야심을 숨기지 않았던 서구의 진면목을 접하면서 그는 서구의 정신으로 간주된 가톨릭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태도를 돌변하여 나가사키에서 26명의 신자들을 처형하였다. 본격적인 박해는 그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반국가적인 이념으로 간주하였다. 불교를 국가 중심의 종교로 삼았던 당시에 정치 및 군사적인 야망을 위해 일본 통일을 필요로 했던 당시 지배자들의 셈법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의 기독교 박해는 외국 선교사들을 상대로 직접 고문하기도 했지만(고통을 못 이긴 선교사들이 배교하기도 했다), 소설에는 성도들에게 심한 고통을 안겨주면서 그 장면들을 지켜보도록 하는 방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성도들이 겪는 고통을 지켜보아야 하는 고통을 대비시킨 것은 감독의 의도적인 기획으로 여겨진다. 선교사들은 자신이 직접 당하는 고통보다 지켜보는 고통을 더욱 크게 느꼈고, 그 결과 기꺼이 배교자의 길을 걸었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이었다. 자신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울지언정 백성들을 구해달라고 기도했던 모세의 경우와 비교할 수 있을까?

 

(이하 스포일러 있음)

한편, 포르투갈 예수회는 일본으로 선교의 길을 떠난 페레이라(리암 니슨) 신부의 선교편지가 중단된 후에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그가 배교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일본 선교를 위해 로드리게스(앤드류 가필드)와 가르페(아담 드라이브) 신부 두 명을 일본으로 파송한다.

과거 배교한 적이 있었던 일본인 기치지로(쿠보즈카 요스케)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 잠입한 신부들은 일본에 도착한 후에 신앙을 숨기며 지내던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하고는 놀라워하면서 또 기뻐한다. 비록 환경은 열악했지만, 신부들은 미사를 집례하고 성사를 거행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한다. 원주민들 역시 신부가 그들에게 있다는 사실만으로 천국에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숨어 있다는 첩보를 접한 일본 관리들이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심문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그들은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기독교 신앙을 확인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콘을 밟고 지나갈 것을 요구하였고, 한층 더 나아가서 십자가에 침을 뱉을 것을 강요했다. 이 일을 거부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해서 잔혹한 방식으로 고문을 했는데,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고통을 이기지 못해 사망하였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신부들은 아무리 기도해도 형편과 사정이 나아지지 않으며 성도들만 계속해서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소위 하나님의 침묵을 고통스럽게 경험하며 괴로워한다. 신학적으로는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었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과연 침묵하시는 하나님은 존재하는 걸까? 결국 계속되는 성도들의 고통을 지켜보는 일을 더 이상 참지 못한 로드리게스 신부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이콘을 밟는다. 그는 과연 배교한 걸까?

 

로드리게스 신부의 행위가 있기까지 영화는 크게 세 가지 동기가 작용함을 보여준다. 하나는 성도들이 신앙 때문에 겪는 고통이며, 다른 하나는 마찬가지 이유로 이콘을 밟은 후 가톨릭 사제가 아닌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페레이라 신부의 권고다. 그는 일본의 불교사찰에 머물면서 불교를 공부하며 지냈는데, 기독교의 진리가 일본 불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마지막 하나는 환상 중에 나타난 예수님이 십자가의 의미는 약한 자를 위한 것이며, 밟히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씀하시는 음성이다.

로드리게스 신부가 이콘을 밟았을 때 스크린 밖으로 울려 퍼지는 닭 우는 소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생명의 위협을 느껴 예수를 모른다고 부정했던 베드로를 연상케 하는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그 후 스스로 배교했다고 여기는 로드리게스 신부는 과부가 된 일본 여자와 결혼하여 일본인의 신분으로 살다 죽는다.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며 마지막까지 일본인의 정체성으로 죽는 것 같았지만, 관객은 마지막 장면을 통해 그가 비록 한 번도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고 또 하나님을 말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는 많은 언론에서 소개하는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고난과 하나님의 침묵 그리고 배교의 관계를 성찰하는 데에 집중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스토리 전개상 필요한 구조이고 또 주제였을 뿐, 주제를 통해서 영화가 드러내는 논점은 다른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스콜세지 감독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서 특별히 부각했던 점은 몇 개의 장면을 통해 드러나는데, 먼저는 배교와 회개의 관계다. 둘째는 이콘과 실재의 관계다. 셋째는 기독교 신앙과 성직자와의 관계다. 넷째는 익명의 그리스도인 문제다. 필자가 서두에서 영화가 가톨릭 신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점을 유념하며 감상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는 바로 영화가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네 가지 논점에서 분명해진다. 만일 개신교 박해를 다루는 내용이었다면 아마도 논점은 달라졌을 것이라 확신한다. 네 가지 논점은 분명 가톨릭 신앙의 속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이것들을 차례로 살펴보자.

 

첫째, 배교와 회개의 관계는 기치지로에게서 형상화된다. 그는 일본 관리들의 요구에 따라 거듭 이콘을 밟고 지나가면서 위기를 벗어나지만, 그것으로 괴로워하다가 신부들에게 고해하면서 용서를 구한다. 배교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행하면서도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배교했을 뿐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치지로에게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 신앙에서 배교와 회개를 반복하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사람들의 잘못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잘못이 아닌 배교와 회개의 반복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둘째, 일본 관리들은 그리스도인을 박해할 때 가톨릭의 성상 숭배의 신앙을 이용하여 이콘을 밟으라고 요구하였다. 이콘은 다만 예술작품으로서 상징에 불과하고 또한 상징은 실재를 환기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실재를 경험하게 하는 수단에 불과하지만, 성상에 종교적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신앙인에게는 상징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콘에 대한 태도에 따라 신앙의 진정성을 평가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이콘에 대한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개신교에서 이콘에 대한 모독 행위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걸까? 기독교 신앙에서 종교적인 상징과 실재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셋째, 개신교 신앙에서 성직의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성도이며, 굳이 구분하여 말한다면 교역자와 교우로 구분된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성직을 받고 살아간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교역자와 교우 모두 성도이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명확하다. 그래서 평신도의 성직자에 대한 의존도는 매우 크다. 영화에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일본인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감수하는 이유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을 지켜보는 성직자들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교우들의 신앙생활에서 교역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교역자와 가까운 관계를 갖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신앙은 현상적으로 차이가 있다. 가까이 할수록 신앙생활에 더욱 열심이다. 물론 가식적인 경우가 있어서 문제지만, 적지 않은 수의 교우들은 교역자와의 관계를 하나님과의 관계로 투영하면서 신앙생활을 유지한다. 이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들은 교역자에게서 배우고 또 설교를 들으며 양육을 받지만 그들에게 교역자는 종종 하나님을 대변하는 자로 여겨진다. 이것은 종교개혁 이전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다.

 

넷째,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은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에게서 유래한 개념이다. 라너는 비록 명시적인 기독교 신앙고백을 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보았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다른 신앙을 가지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염두에 둔 개념이다. 이것은 종종 종교다원주의적인 신앙을 낳는 산파의 역할을 한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받아들이면, 비기독교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약속의 기업을 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페레이라 신부와 로드리게스 신부가 만나 나눈 대화에서 서로 갈등하는 논점에 해당한다. 과연 일본 종교의 틀 안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 다른 종교의 틀 안에서도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유지될 수 있을까?

 

영화는 배교자의 변론을 넘어선다. 그리고 이상의 네 가지 논점을 통해 영화를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많은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신부들이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면서까지 일본인과 동일한 모습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오직 성도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평생 일본인으로 살았지만, 마음으로는 그리스도인 됨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이야기에서 들을 수 있는 주장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는 그들이 신부로서 살았다면 생명을 잃어야 했을 일본인들의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음을 암시한다. 일본의 토착 종교의 혼합주의적인 모습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게 하는 부분이면서, 또한 그것이 어느 정도 기독교적일 수 있는지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이기도 하다.

 

최성수 박사가 본 <사일런스>는?   기독교적 가치     작품성     대중성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영화 <사일런스>를 보시고, 주변의 지인과 영화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눠보세요.

은혜가 보다 풍성해질 것입니다. 

공동체 나눔을 위한 <사일런스> 무비톡가이드 "침묵의 소리" 다운로드 www.cricum.org/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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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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