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최성수] 성경의 권위에 대한 단상




성경의 권위에 대한 단상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누구는 세상에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지만, 누구는 인생의 비참함과 곤고함을 겪는다. 다양한 양상의 인간, 이들에 대해 하는 말들 가운데 종교와 현인들에게만 주목해도 인간은 결코 온전하게 행복할 수 없는 존재다. 무엇 때문일까?

바로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탐색은 다방면 다각도에서 이뤄졌다. 철학과 종교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철학은 세상내적인 존재로서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종교는 세계외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조명한다. 두 가지가 합치면 제대로 된 인간 이해를 얻을 수 있을까?

철학과 여러 종교가 제시하는 여러 해결책들에 기독교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다양하다. 혹자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혹자는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 인간은 자기 뜻대로 살면서도 행복할 수 없는 것일까? 근본적인 원인은 자기 뜻대로 살면서 또 다른 인간, 곧 자기 뜻대로 사는 인간을 만나기 때문이다. 사사건건 서로 충돌되니 행복해질 수 없다. 잠시 동안 행복함을 누리다가도 금방 사라진다. 아마도 무인도에 가면 행복의 절정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인간은 관계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 딜레마다.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이면서도, 함께 살면 반드시 서로가 부딪힐 수밖에 없다.

아,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 그런데 만일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따르면서 함께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100% 순도의 복종과 순종은 기대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마찰을 피하며 살아갈 수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법이 만들어지고, 함께 살 수 있는 삶의 방식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문화다.

문화는 함께 사는 삶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삶을 살도록 하고 또 풍성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제대로 작동되면 오랫동안 유지되고, 어딘가 어색하거나 공동체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이내 사라진다. 문화 역시 낳고 자라고 죽는 일을 겪는다. 가족, 씨족, 부족, 국가, 세계로 소통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인간이 동의해야 할 규범은 더욱 포괄적인 것이 되어야 했다. 혹자는 힘과 이념으로, 혹자는 종교적인 권위로, 혹자는 자본으로, 혹자는 크기와 양으로 규범을 주장했지만, 이젠 그것의 구속력을 관철시킬 수가 없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은 료타르가 제대로 말했듯이, 거대담론의 해체다. 전체를 구속할 수 있는 것들을 해체시켜, 부분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자유를 베풀었다. 소수자에게는 그야말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초기에 던진 화두, 곧 함께 살면서도 제 멋대로 살 수 있고, 그러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는 규범을 찾다가 결국 원점으로 돌아갈 추세다. 이러다간 소수자도 아니라 개인에게로 돌아갈 것만 같다.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세상 사람들이 무엇이라 해도 자기만 좋으면 좋은 것인 양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그렇게 살면 행복할까? 자기만 사는 세상이라면 모를까,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강대국의 논리와 얽히고 섥힌 거대담론의 폭력성을 인정한다.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가 여성과 약자인 어린이들에게 행한 폭력 또한 인정한다. 소수자의 의견이 반영되는 삶이 필요함을 인정한다. 다국적 자본의 횡포를 인정한다. 그렇다고 해도 규범은 필요하지 않을까? 적어도 두 사람이 모여도 규범은 필요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족에도 필요하다. 사회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하물며 국가와 세계 안에서 규범이 없을 수 있겠는가?

기독교가 그런 규범, 곧 거대담론이 성경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폭력적인 일일까? 종교적인 권위를 등에 업고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는 못된 사람들의 경우가 없지는 않겠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그런 것은 아니다. 거대담론의 대표격으로 주목받는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소수자는 늘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기독교는 제자리를 찾아가곤 했다. 곧 다시 돌아서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역사가 반복된다는 사실은 긍정적이지 않을까?

문제는 바르지 못한 신학함과 올바르지 못한 삶에 있지 않을까? 성경의 메타내러티브적인 본질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논리, 그리고 결실로 이어지지 못한 삶은 성경의 신뢰성을 떨어뜨릴 뿐이다.거대담론으로서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 이 시대 기독교의 핵심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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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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