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영화 <부활> 보기 - 모든 걸 올인 할 만한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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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올인 할 만한 가치

<부활>

(케빈 레이놀즈, 드라마, 전체, 12, 2016)

최성수

 <부활> 공동체 나눔자료 다운로드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던 십자가 기적의 새로운 이야기 피로 물든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  로마군의 수장 클라비우스(조셉 파인즈)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처형을 명한다. 로마군은 예수의 시신을 돌무덤에 봉인하고,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3일 뒤, 예수의 시신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예수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메시아로 부활했다는 희망의 소리가 점차 거세진다. 예수의 시신을 찾아야만 모든 것을 뒤덮을 수 있는 클라비우스는 보좌관 루시우스(톰 펠튼)와 함께 사라진 예수의 3일간의 행적을 뒤쫓기 시작하는데.... 위대한 인류구원의 역사, 감춰졌던 놀라운 여정이 펼쳐진다! - 네이버 영화 소개


'기독교 영화'와 상상력

기독교 영화에서 상상력은 매우 조심스런 요소이다. 지나치면 비성경적이란 비난을 받고, 부족하면 재미가 없다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 <노아>는 재미와는 달리 비성경적이라는 비난 때문에 흥행에서 참패를 겪어야 했다. 성경적인 교훈을 주면서도 재미있는 <벤허><십계> 같은 영화 제작을 고대한다.

최근 미국 영화계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 영화 제작 편수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이브 어 라이프>, <레터스 투 갓>, <선 오브 갓>, <신은 죽지 않았다>, <노아> . 과거에는 성경 재현 영화가 주를 이뤘는데, 근자에는 기독교 신앙을 삶의 이야기로 표현하거나 기독교적인 가치와 관련해서 벌어지는 갈등을 다루는 영화들이 많다. 재미와 신앙의 교훈을 주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작품들이다.

케빈 레이놀즈 감독의 <부활>은 성경적인 배경을 갖고 있지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내용을 상상력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다. 특히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한 이방인의 변화를 추적한다. <루터>에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번민과 갈등 그리고 강인한 투쟁의지를 보여준 조셉 파인즈가 이번에는 예수 부활에 얽힌 음모설을 파헤치면서 부활신앙에 이르는 로마군으로 출연하였다. 강인한 군인의 모습에서 진실에 대해 회의하는 구도자의 길을 거쳐 밝은 미래를 보장하는 로마군에 등을 돌리고 마침내 예수를 따르는 신앙의 결단력을 보여주기까지 변화의 과정을 잘 보여주었다.

 


조셉 파인즈는 <루터>에서 마르틴 루터의 번민과 갈등 그리고 강인한 투쟁의지를 보여줬다면, 영화 <부활>에서는 주인공 '클라비우스'로 분해 예수 부활에 얽힌 음모설을 파헤치며 부활 신앙에 이르는 로마군으로 출연하였다.



계속되는 '부활' 논쟁

부활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사망 판정을 받은 육체를 전제한다. 역사적으론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살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후 사흘째 되는 날, 곧 안식 후 첫날에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예수에게 일어난 이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면서, 동시에 이미 기독교 형성 시기부터 지금까지 논쟁 중에 있는 화두다. 논점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다. 예수의 부활은 사실인가? 물론 부활 자체를 부정하는 사두개인을 염두에 둔다면, 예수의 부활은 차치하고라도 논쟁은 이미 부활 자체와 관련해서 벌어지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일은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예수가 부활했다는 주장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부활에 대한 주장은 물론이고 예수와 그의 가르침이 진리임이 입증된다.

여호와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되는 문제라면,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가 부활했다는 말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단순히 믿는 자들 사이에서 오가는 헛소리에 불과할 것인가, 아니면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받아들일 만한 근거가 있는 증거일까?

 


'부활' 논쟁에서 '부활' 신앙으로

이 영화는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묻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에 답하기 위해 영화 <부활>은 성경 배경에 충실하면서도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앙이 없는 한 사람이 성경 이야기로 들어가 그것을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방인으로서 로마군 클라비우스가 예수의 부활을 두고 전개되는 음모설의 배후를 추적하는 구조로 진행된다. 음모설은 복음서에도 나오는데, 이에 따르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예수 사후에도 종교적인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의 시신을 훔치고 그가 말씀대로 부활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무덤을 지키던 로마 군인을 돈으로 매수하여 소문으로 퍼트리게 만든 내용이다. 또 다른 주장은 예수는 처음부터 죽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모두 부활을 부정하기 위한 것들이다. 부활을 긍정하는 주장은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이 안식 후 첫날에 경험한 부활에 대한 증거에 근거해서 예수의 제자들이 선포한 것으로, 예수는 말씀하신 대로 사흘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예수는 부활 후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다가 마침내 승천하셨다는 주장은 부활의 사실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증거다.

음모설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 그리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에 대한 이야기가 단순히 역사에서 종종 일어나는 한 일화로만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 죽음 이후에도 가르침이 지속한다면, 그것은 진실인 것이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죽음과 더불어 영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어 사람들에게 더 이상 기억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표현한 것인데, 이는 역사적인 경험에 바탕을 두고 행한 정치적인 포석이었다. 이에 반해 제자들의 주장은 구약의 예언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으며, 부활은 예수께서 살아 있는 동안 가르치신 말씀에 따라 일어난 사건이었다. 결국 예수의 부활을 두고 전개된 논쟁은 처음부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에서 평행선을 달려 결코 일치점을 찾을 수 없는 문제였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에 대한 증거들을 바탕으로 믿지 않는 자가 부활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가능할까?

영화는 음모설의 진위를 밝히는 과정에서, 아니 부활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해 관련자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불신자의 시각에서 출발하여 결국 부활 신앙을 갖게 된 로마군 클라비우스의 변화를 추적한다. 달리 말해서 철저히 이교도적일 뿐만 아니라 로마의 군인으로서 자부심이 강하고 또한 출세에 대한 야심이 컸던 그의 변화를 통해 부활 신앙의 가능성을 설득하려고 한다. 그가 어떻게 또 무엇을, 근거로 로마군에게 등을 돌리고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로 하여금 부활신앙을 갖게 한 것은 부활 소문을 퍼뜨리는 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우연한 기회에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이교도인 그에게 있어서 부활의 사실성에 대한 근거는 제자들에게 들은 증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적어도 영화적인 맥락에서 볼 때, 그가 변화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직접 부활의 예수를 만났으며, 부활 이후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보낸 시간들을 공유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부활 신앙'에서 '부활 신앙을 사는 삶'으로

놀라운 사실은 이 경험을 한 후에도 그가 의심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인상을 주는 장면이었다. 예수의 부활이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 이것을 믿고 사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고 또 이 일이 자신의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그는 확신하지 못했다. 부활의 사실이 아니라 부활 신앙을 갖고 사는 것의 의미를 물은 것이다. 사실 이것은 부활의 의미를 묻는 현대적인 관점이 투영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 당시에는 부활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부활 신앙이 아니라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해진 때는 예수의 재림이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부터다. 현대적인 시각을 삽입한 흔적이 역력한데, 예컨대 클라비우스는 승천의 순간까지도 회의적인 태도에서 자유롭지 못한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그의 확신은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나는데, 이 장면은 그가 광야에서 지낸 영적 여정을 거친 후에 비로소 부활신앙을 자신의 주체적인 삶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로마군의 호민관으로서 이교도인 그가 부활신앙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영화가 말하려는 메시지는 단순한 부활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부활신앙을 삶으로 살아내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클라비우스의 주저와 더불어 마지막 장면에서 제자들의 입을 통해 더욱 분명해지는데, 부활신앙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 그의 인격과 사역을 경험함으로써 가능하나,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직접 보거나 들어도 믿지 못하는 자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을 믿고 또 듣고 싶은 것을 듣는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영화의 메시지는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은 부활신앙이 인생을 걸만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게 될 때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린다 해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때, 바로 그 때 부활은 삶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는 부활이란 단순히 사후에 있을 영원한 삶만을 위한 사건이 아니며, 오히려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알 수 있도록 빛을 비춰주는 사건임을 역설한다. 따라서 예수의 부활에 집착하기보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부활의 소망을 갖고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환기한다.

그렇게 해서 영화는 부활의 사실을 밝히려는 탐색과정으로 시작해서 결국 부활신앙의 현대적인 의미를 밝히는 것으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서 부활신앙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고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부활의 주님을 육체적으로 만날 수 없는 현실에 비춰볼 때, 또한 디트리히 본회퍼가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를 물으면서 기독교 신앙의 현실성을 고민했던 것을 염두에 둔다 해도, 이는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현대적인 맥락에서 부활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해도, 부활신앙의 핵심은 예수가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증언과 고백에 근거하고 있음을 결코 잊진 말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고백에 따르면, 부활신앙은 우리의 모든 것을 올인 할 만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기독교적 가치 

작품성 

대중성(기독교인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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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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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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