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영화 <귀향> 보기 : 공동의 기억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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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의 기억을 위하여 <귀향>

(조정래, 드라마, 15세이상 관람가, 2016)

 

최성수 *


1943년, 천진난만한 열네 살 '정민(강하나)'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 손에 이끌려 가족의 품을 떠난다. '정민'은 함께 끌려온 '영희(서미지)', 그리고 수많은 아이들과 함께 기차에 실려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한다. 제2차 세계대전, 차디찬 전장 한가운데 버려진 '정민'과 아이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일본군만 가득한 끔찍한 고통과 아픔의 현장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우리의 아픈 이야기! - 다음 영화 소개



1. 이미지의 힘

누구의 기억 속엔 아주 또렷하게 남아 있지만, 누구의 기억 속엔 희미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을 때, 기억을 소통하기 위해선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기억을 공유할 필요가 있을 때,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는 대부분 그림과 말과 글이다. 벽화나 구두 전승 그리고 문서 전승은 이렇게 해서 생겨난다.

그런데 전승의 방식은 다분히 매체 의존적이다. 당대에 어떤 매체가 지배적이냐에 따라 기억의 공유를 위한 매체는 변한다. 벽화와 구두 및 문서 전승이 나타난 것은 그 시대에 적합한 매체였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즐겨 사용하는 기억 매체는 이미지(정영상과 동영상). 이미지만이 소통 방식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미지를 선호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미지는 무엇인가의 부재와 그것에 대한 의식(기억)을 전제한다. 있다면 실재가 되는 것이니 굳이 이미지가 나타날 까닭이 없고, 그 실재가 우리의 감각에서 사라질 때,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려는 의지에 의해 이미지는 태어난다. 잔상 효과로 나타나는 이미지가 있지만, 대체로 의도적인 기억 작용에 의해 생성된다.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실재를 다시 대할 때 인간은 기억을 통해 재인식한다. 동일한 모습을 보며 바로 그것이었다고 재확인할 수 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억에 변화가 일어나 실재가 오히려 낯설게 여겨지는 현상도 발생한다.

 

참고로, 이미지의 이런 속성에 비춰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이미지를 만들지 말라는 말은 무엇보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우리의 기억에 따라 믿지 말 것과 하나님의 부재를 결단코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으로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기에,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당신을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으로 믿기를 바라신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은 믿는 자들과 함께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상호 관계에서, 곧 성도의 교제에서 우리 스스로 이 사실이 진리임을 확인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진리를 세상 가운데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부재하시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상황을 종종 만난다. 문제는 부재 상황 자체보다는 부재의 상황에서 느끼는 고통이며 또 그런 상황을 홀로 겪어야 하는 환경이다. 공동체가 아닌 고립된 개체로서 겪어야 하는 부재의 상황이 계속되면 외롭고, 좌절하고, 심지어 절망한다. 일의 이런 진행은 우리가 아니라 나 혼자의 일로 여겨지도록 하는 상황 때문에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신 분이 아니라 나만의 하나님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하나님의 부재를 극복할 만한 힘을 얻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억에 의해 하나님은 왜곡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계시고 또 우리 가운데계시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재는 공동체 의식이 사라지고, 개인주의적인 신앙이 가져오는 상황이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하나님의 부재가 강하게 여겨진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방법은 정의와 사랑이며, 또한 올바른 법을 제정해서 공정하게 집행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 사이에서 온전히 공유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은 출애굽 과정에서 하나님이 부재하는 듯한 상황 때문에 끊임없이 불평했다. 하나님이 화를 내실 정도였다. 그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해서 하나님이 부재한다고 생각했을까? 부정적인 현실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공동의 기억은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모세는 그들에게 기억하라고 외쳤지만, 그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기억의 힘보다 더욱 컸다. 결국 기억을 통해 부재의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했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화를 내신 이유는 바로 이점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기 위해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기억으로 이겨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과정을 직접 경험했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

기억은 사람의 행동을 좌우하는 일에 있어서 감정에 비해 차순위로 작용한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에 따르면, 기억은 일종의 선택의 과정인데, 우리 안에 무수히 많이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선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기억이다. 결국 선택을 좌우하는 것은 감정이다. 그러므로 바른 기억을 위해선 감정을 통제해야 한다. 하나님의 행위를 기억해내기 위해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우선이다. 기억을 통해 신뢰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먼저 신뢰가 있을 때는 바른 것을 기억할 가능성이 커지고 또한 기억의 강도 역시 더 커진다.


한편, 부재 때문에 이미지가 발생한다면, 이미지는 부재하는 것을 존재로 바꾸는 역할을 한다. 이미지는 부재하는 것을 있게 하고, 실제로 존재할 때 발생하는 일들을 부재의 상황에서 기대할 수 있게 만든다. 하나님의 이미지는 비록 부재를 전제하여 만들어진 것이나, 이미지를 대하는 사람에겐 더 이상 부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자가 된다. 이미지는 존재를 대신하고 또 존재의 작용을 재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미지에 대한 예배 행위가 이뤄진다. 두 번째 계명은 바로 이것을 금한다. 비록 하나님의 존재를 잊지 않도록 하고 또한 확신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은 무방하나, 그것을 존재와 동일시하여 예배하는 행위를 금지한다.

 

이미지가 존재를 상기하고 또 확신하게 하는 기능을 염두에 두고, 오히려 이미지를 통제해서 영원히 부재의 상태로 남길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정 이미지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서 불이익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이럴 때 그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태도는 기억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또한 사실을 더 이상 기억해내지 못하도록 이미지의 생성을 방해한다. 동시에 보다 적극적으로는 또 다른 이미지로 치환하려 한다. 기억을 왜곡하기 위한 역사 왜곡은 이미 진행 중이고, 공영 방송국 장악과 종편 신설을 통해 오락과 예능 프로그램에 전념할 뿐만 아니라 특정 이미지 제작을 방해해 진실에 대한 기억을 억제한다. 또한 적극적으로 그들의 이익에 맞는 이미지 제작(예능과 오락)으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2. 영화 <귀향>이 재현한 것들


서두가 길어졌지만, <귀향>은 바로 이런 대한민국 상황에서 태어났다. 총 제작 기간이 14년이라는 사실은 그동안의 제작과정이 얼마나 험난했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귀향>은 첫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만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들을 이미지로 소통하려는 노력의 결실이다. 둘째, 친일파 후예들이나 한일관계에서 부당한 협약을 체결한 정부가 더 이상 '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소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한 상황에서 정부기관으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두레제작 과정을 거쳐 태어났다. 셋째,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개봉할 장소를 얻지 못하는 중에 어렵게 상영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 상영관 수도 늘고 또 현재(45일 기준)까지 350만 관객을 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귀향>은 한국에서 태어나 꽃다운 시절을 보내는 중에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의 성 노예로 살아야 했던 '위안부' 피해자의 이야기다.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특정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있는 이미지들, 그리고 그것을 소통하면서 공동의 기억을 통해 진실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는 영화다. 특히 먼 타지로 끌려가 그곳에서 명을 달리한 사람들의 혼을 다시 우리의 땅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선 특별한 도구가 사용되어야 했는데, 일명 초혼의식이다. 죽은 자들의 혼을 불러들이는 의식인데, 이것은 일종의 망자의 혼을 위로하면서 또한 산자와의 화해를 추구할 때 사용하는 의식이다. 그 어떤 종교로도 가능하지 않은 일을 위해 전통 무속의 방식을 사용했다.

영화 제목 귀향은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의미가 아니라 혼을 고향으로 불러들인다는 의미다. 초혼의식을 매개로 사용한 것은, 타지에 묻힌 육체는 비록 백골이 되었지만, 그들의 혼만이라도 고향으로 불러들이려는 의도에서 선택한 방편이었다고 생각한다. 전형적인 무속의 인간관과 세계관에 근거한다. 종교다원주의자가 아니라면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의식을 반갑게 여길 사람은 없다. 실제로 기독교인들 중에는 영화를 통해 보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 공감하지만, 무속적인 의식을 매개로 영화를 전개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대체 어떤 종교가 죽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이 땅에 사는 사람들 모두의 기억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을 것인가? 불교는 모든 것을 다 인연과 업으로 생각할 것이고, 기독교에는 한번 죽은 인생에게 무엇을 더할 수 있는 가르침이 없다. 이런 까닭에 감독은 전통 무속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성경에도 죽은 사무엘의 혼을 사울이 당시 무속인을 통해 불러들인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이를 생각한다면, 비록 혼의 독립적인 존재를 믿지 않는다 해도 초혼 의식을 일종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왜 꼭 그래야 하느냐는 질문도 생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현실을 보여주면서 굳이 망자의 혼을 고국으로 불러들여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또 이미지로 표현해서, 그들과 그들의 고통이 결코 부재하는 것이 아니고 또 시간과 함께 사라져가는 것이 아니고, 실재이며 또 우리 기억 속에 영원히 존재하도록 한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만일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꽃다운 어린 나이에 끌려가 낯설고 무섭고 고통스럽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명을 달리 했던 그들을 생각해보라. 얼마나 고향과 고국을 그리워했을까? 고향에 있는 형제자매들과 부모님들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을까? 꿈에서라도 가보고 싶었던 곳이며, 죽어서라도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감독은 바로 기억하고 싶은 자의 입장보다는 피해자 할머니의 입장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망자의 혼을 고국으로 불러들이는 의식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종교적인 이유로 영화를 멀리하기보다, 고향에 대한 그들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게다가 정부마저 가해자인 일본 정부와의 밀약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려 하는 상황에서 죽은 이를 초혼의식을 통해 불러들이는 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지를 통해 존재를 확인하려는 노력과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서 <귀향>은 무엇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마음과 현실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강하다. 성 노예로 끌려가 혹사당하는 그들의 실제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지로 재현한 것이다. 그 현실에는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있고, 또한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그들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결코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귀향>은 아직 소수가 생존해 있지만,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는 피해자들이라도,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결코 잊지 않아야 할 기억이며, 또한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이런 비극적인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경각심을 다져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선 또한 베트남전쟁에서 베트남인들에게 자행한 일부 한국군의 만행에 대한 진실도 언젠가는 기억되기 위해 영화로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기독교적 가치 

작품성 

대중성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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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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