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틀 보이>를 보고 - 산을 옮기는 겨자씨만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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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옮기는 겨자씨만한 믿음

<리틀 보이>


(알레한드로 몬테베르드, 드라마, 12, 2015)

 

최 성 수*



※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 <리틀 보이>의 예고 동영상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
특별한 기적을 만든 99cm 소년의 이야기.


키 99cm… 
더 이상 자라지 않는 키 때문에 ‘리틀 보이’라고 불리는 ‘페퍼’, 
친구들로부터 놀림 받기 일쑤인 그는  전쟁에 나간 단 하나뿐인 소중한 친구, 아빠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어느 날, 마술쇼에 간 ‘페퍼’는 우연히 오른 무대에서 
물건을 움직이는 특별한 능력을 발견하게 되고 이 능력만 있으면 전쟁을 끝내고, 아빠도 돌아올 수 있다고 믿게 된다. 
‘페퍼’는 자신의 능력과 믿음을 키워나가고 급기야 지진을 일으켜 자신을 비웃던 동네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데… 
 과연, ‘페퍼’는 전쟁을 끝낼 수 있을까?


<리틀 보이><사이먼 버치><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를 섞어놓은 것 같다. 모두가 아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고 또 실화에 기반을 두지 않고 순수 픽션인 점, 그리고 아이들의 순수한 믿음이 일으키는 기적 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영화 <사이먼 버치> 스틸 컷


<사이먼 버치>(마크 스티븐 존슨,1998)의 주인공 사이먼은 가족마저도 생명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정도로 심장과 폐에 심각한 결함을 갖고 태어났다. 게다가 초등학교 4학년임에도 8살 나이의 키에서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왜소한 체격을 갖고 있어 친구들에게 늘 놀림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먼은 또래 아이들에게서 보기 어려운 강한 소명 의식을 갖고 있다. 곧 비록 정상적인 신체조건은 갖추지 않았다 해도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리고 어느 날 유치원 아이들을 실은 버스가 사고로 호수에 빠졌을 때, 버스를 몰던 목사님조차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스에서 탈출해야만 했던 상황에서도 사이먼은 아이들을 모두 구출해내는 영웅이 된다. 이는 오직 사이먼만이 좁은 버스 창문을 통과할 수 있는 왜소한 몸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로써 그의 소명 의식이 틀리지 않았음이 입증되었는데, 인생에서 강한 소명 의식을 갖고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이야기한다.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스틸 컷


이에 비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11년 작품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아이들의 꿈과 그 꿈의 실현에 대한 열망을 그린 영화다. 일본 고속열차가 서로 지나치는 곳에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소문을 사실로 믿은 동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결코 쉽지 않은 장거리 여행을 떠난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엄마와 지내는 자신과 달리 아빠와 함께 사는 형과 떨어져야 하는 코이치는 부모가 하루빨리 재회하여 형과 함께 살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데, 고속열차와 소원 성취에 얽힌 말을 들은 코이치는 아이들의 여정에 동참한다. 꿈을 위해 결코 포기하지 않는 힘든 여정에서 겪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아이들의 내적 성장 과정과 순수한 모습을 즐겁게 볼 수 있었던 영화였다. 비록 소원은 이루지 못한다 해도 그 과정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산을 옮기는 기적, 믿음으로 정말 가능할까?

<리틀 보이>99cm로 성장이 멈춰버린 왜소한 체격 때문에 친구들에게 난쟁이혹은 리틀 보이라 불리는 페퍼(제이콥 살바티)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다. 페퍼가 아이들로부터 놀림거리가 되고 따돌림 당하자 아버지는 페퍼의 친구 혹은 파트너가 되어준다. 그런데 일본의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이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면서, 가족 중 남자 한 사람은 무조건 입대해야 하는 규정 때문에 평발인 형이 입대하지 못하게 되자, 대신에 페퍼의 아버지가 입대하게 된다. 유일한 친구이자 파트너인 아버지와 헤어진 페퍼의 슬픔은 말로 다할 수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터에서 실종 되었다는 전갈을 받는다. 일본에 대한 분노는 오랫동안 마을 주민으로 살고 있던 하시모토에 대한 증오로 바뀐다.

한편, 페퍼는 동네 마술 쇼에서 할 수 있다는 신념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마술사의 힘을 빌어 실제로 경험하고 또 신부님의 설교를 통해 겨자씨만한 믿음이 산을 옮길 수도 있다는 설교를 듣고 아버지의 귀환을 희망하는데, 이것이 현실이 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신부님을 찾아간다. 페퍼의 간절한 마음을 알게 된 신부님은 믿음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실천 행위들이 기록된 목록을 전해준다. 목록에는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과 친구가 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과연 목록에 기록된 대로 화해와 사랑과 도움과 협력을 실천하면 페퍼의 소원은 이뤄질까?

[스포일러] 오직 아빠의 무사한 귀환만을 바랐던 페퍼는 주변 사람들이 우려할 정도로 신부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믿고 목록들을 하나씩 실천한다. 특히 미국의 적으로 여겨 마을 사람들이 미워했던 일본인 하시모토와 친구가 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는데, 본인 자신도 썩 내키지 않았지만, 특히 마을 친구들과 어른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형의 오해를 극복하는 일은 힘겨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하시모토와 친구로 지내길 멈추지 않는다.

한편, 전쟁이 끝나야 참전한 군인들이 돌아올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한 페퍼는 마침내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자신의 믿음을 강하게 외친다. 하루도 빠짐없이 바닷가에 나와 소원을 외치는 페퍼의 간절함은 마침내 마을 사람 모두가 주목할 정도가 되었는데, 이 와중에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라는 암호명을 가진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곧이어 마을 사람들은 종전 소식을 접한다. 페퍼가 간절히 소원을 빌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특히 리틀 보이라는 동일한 이름 때문에 마을 사람들 중에는 종전 사실을 결코 우연으로 보지 않고 페퍼 때문에 일어난 결과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비록 전쟁은 끝났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고, 오히려 필리핀 포로수용소에 갇힌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전갈을 받게 된다. 모든 소원은 이뤄졌어도 정작 페퍼가 원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아빠의 귀환을 위해 기울였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고, 무엇보다 믿음이 흔들릴 정도였다. 하시모토는 목록대로 행하면서 최선을 다 했다는 사실이 아버지에겐 중요했을 것이라는 말로 페퍼를 위로한다. 그 후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는데, 아버지의 전사 소식이 군번줄이 바뀌어 일어난 착오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야기가 페퍼의 믿음과 기적의 관계를 결코 우연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포레스트 검프>에서 포레스트의 삶을 역사의 현장 속에 삽입해 넣은 것처럼, 페퍼의 믿음에 따른 기적을 역사 속의 사건과 맞물려 놓았다. 믿음으로 산을 옮겨보라는 형의 말에 따라 산을 옮기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순간에 지진이 나서 산의 위치가 조금 바뀌고(이것은 실제로 LA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종전에 대한 믿음이 간절히 표현되었을 때,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란 이름을 가진 핵폭탄이 실제로 투여된 사실은 결코 우연이라 볼 수 없게 만든다. 게다가 아버지의 무사 귀환은 페퍼의 믿음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음을 역설한다. 감독은 비록 겨자씨만 하더라도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성경 구절이 진리임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믿음으로 '산을 옮기기', 괜찮을까?

영화는 분명 픽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현실의 변화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자극한다. 물론 가톨릭 배경의 영화라서 그런지 믿음과 행함의 관계가 매우 강하게 부각되었다. 영화에서도 나오고 있듯이, 산을 옮기는 겨자씨만한 믿음은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문자 그대로 믿는 페퍼가 있는가 하면, 신부님처럼 희망에 대한 간절한 태도가 사람들을 감동시켜 사람들을 통해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소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신부님의 이해는 성서 해석에서 탈신화화(Entmythologierung)를 주장했던 불트만의 입장을 대변한다. 물론 성경 자체를 불신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란 마치 마술 부리듯이 그렇게 산을 옮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자적으로 이해할 성격의 표현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언어 관습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때 산을 옮긴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니까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란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를 겨냥하며, 믿음을 가질 때 문제 해결을 경험할 수 있다, 곧 하나님께 의지함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힘과 능력만을 의지하는 인간의 본성을 폭로하는 말이다.

영화는 믿음대로 된다는 사실에 방점을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페퍼의 순수한 믿음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을 통해 아버지는 물론이고 원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또한 이와 더불어 믿음이 갖는 긍정적인 효과를 강조한다. 믿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며, 믿음과 함께 믿음이 요구하는 실천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렇다면 모든 어려운 문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 다 해결될까? 그렇기도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문제 해결 이전에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 산이라도 산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비록 평지라도 태산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해결책은 어떤 문제를 만나더라도 그 문제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를 만날 때 당장의 문제해결을 추구하기보다 오히려 문제와 관련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계기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말할 때 공동체적인 사고와 삶의 방식을 염두에 두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이다. 형제자매나 이웃이 정복하기 어려운 태산을 만날 때, 그 산을 옮길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은 오직 사람을 통해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된 사람이며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람이다.

<리틀 보이>는 가족과 함께 감상하면 좋을 것 같고, 교회에서 주일학교 학생이나 성인들이 단체로 보기에도 적합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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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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