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에게 적이 있다면?



교회의

(원문 The Greatest Enemy of the Church)


Benjamin Vrbicek

 


때로 시험과 같은 험난한 시간이 찾아오곤 한다. 그 순간에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원수는 누구일까?

얼핏 생각하면, 미국의 진보적인 대법원의 대법관일 수도 있다. 혹은 세속적인 이 세대의 성() 윤리일 수도 있다. IS 조직과 위협적이고 극단적인 이슬람 사상일 수도 있고,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무종교인일 수도 있다. 지나친 가족계획 관습, 그리고 어른의 인권옹호를 빗대어 어린 생명을 잔인하고 무참하게 살해하는 낙태가 문제일 수도 있다. 

나의 얕은 소견으로 오늘날 이 세계를 돌아보며 깨닫게 된 나의 관점이 아주 명쾌한 정답을 내려주지는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성경의 사사기에서 명시하는 답변이 뭔지는 알고 있다. 더 나아가, 이 답변은 성경의 전반에 걸쳐 전하고자 하는 바이다. 사사기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의 가장 큰 원수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거울을 보라고 말하고 있다.

 



사사기가 밝히는 진짜 원수


사사기 시대에는 굉장히 무섭고 강한 원수들이 존재했다. 그들은 억압하고 강탈하고, 겁탈하는 것을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자행했다. 만약 우리가 그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과 이야기할 시간이 주어졌다면, 그들은 아마 이런 외부적 두려움을 나열했을 것이다. “그들에겐 강한 전차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없잖아요,” “그들은 평지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더 싸움을 잘하는 대군이에요,그들에겐 더 뛰어난 장군과 왕이 있어요. 그러니깐 우리가 땅을 상속받지 못하게 된거죠.”

만약 이때 예루살렘 타임즈가 존재했다면, 이들의 비통함을 실은 기사들이 매일매일 실렸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실제로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이 기사들은 굉장히 표면적인 시각으로 당시 시대를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더 심각하고도 깊은 문제가 있었다. 그들의 가장 큰 원수는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사기서는 바로 이 점을 계속해서 외치고 속삭이며 고발하고 있다.

사사기의 마지막 문장을 살펴보자.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21:25; 사사기 17:6 참고).” 당시 시대적 정황과 풍습을 이해하고 이 문장을 다시 들여다보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장 큰 원수는 바로 내부에 있음을 굉장히 강하게 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사기의 다른 부분인 사사기 210절 또한 굉장히 핵심적인 본문이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 문장을 봐도 이들의 적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사기는 이 주장을 부드럽게 속삭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사사기 101-2절에 등장하는 사사 돌라는 사사기 331절의 사사 삼갈처럼 1-2개의 구절에만 잠깐 언급된다. 하지만, 삼갈과 돌라의 차이점이 있다면, 삼갈은 외부의 적인 블레셋 군대와 전쟁을 했다고 소개되지만 돌라의 적군은 명시되지 않는다. 돌라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선택된 순간은, 외부의 적이 아닌 오히려 이스라엘 민족 자신들로부터 구출되기 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사사기는 야비한 시대의 여러 인물과 이야기들을 구구절절 나열한 성경이다. 탐욕스러운 제사장, 첩을 살해하고 열두 토막낸 레위인, 지파를 거의 멸종시킨 내전. , 이 사건들은 모두 더 흉악한 적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사기뿐 아니라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사람의 가장 큰 적은 내면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이 밝히는 진짜 원수

 

과연 사사기만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을까? 아브라함의 서약과 다윗과 왕정 시대, 바벨론 포로 시기를 지나 초대교회 시대 등 여러 시대를 걸쳐 성경은 결국 신앙의 정결함과 신실함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베드로는 마귀를 우리의 대적이라 지칭하며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라고 말한다(베드로전서 5:8). 바울 또한 악의 영을 상대하는 영적 전쟁이라고 언급했다(에베소서 6:12).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대죄를 지었을 때, 아담의 변명은 사탄이 나한테 그리하라고 시켰다라고 둘러댔다. 그 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안에서 기뻐할 수 없었다. 물론 이 가운데에도 외부의 적은 존재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의 내면, 불신과 불순종에 기인한 것이었다.

민수기 13-14장에 등장한 12명의 정탐꾼을 기억하는가? 그들은 거인 앞에서 스스로가 메뚜기 같다고 묘사하였다. 그들의 문제점은 상대적인 규모나 신체적 조건에 있지 않았다. 메뚜기 같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들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로마서 1장은 또 어떤가? 악랄한 죄의 목록을 나열한 이후, 로마서의 저자가 날리는 최후의 한방, 죄 중의 죄는 신앙과 관련된 것이다. 이미 죄에 대해 배운 자들이, 알면서도 저지르는 죄에 대한 경고이다(로마서 1:32).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교회들에 대한 편지 또한 마찬가지다. 계시록이 다루는 죄의 문제 또한, “발람 혹은 니골라당의 교훈을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전파하고 있음을 비난하고 있지 않다. 바로 교회 안에서 이들의 교훈을 지키고 있는 자들을 향해 경고하고 있다. 두아디라에서 여자 이세벨을 용납했음을 꾸짖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요한계시록 2:20-24). 이 구절에서 보여지듯이, 교회를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하느냐 하나님에게 신실하느냐의 문제였다.

진정한 적이 내부에 있음을 밝히는 성경 본문은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

 


우리는 내부의 적을 인정하고 있는가?


우리는 사실 이미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저항하며 살고 있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가? 당신이 속한 교회는 기도제목들을 공개하는가? 그 기도제목들 중 영적 무기력,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랑, 공동체의 분열, 미묘한 혼합주의/다원주의에 대한 내용들이 있지 않은가? 기도제목의 얼마나 많은 부분들이 하나님이 주신 복음에 기반되어 있는가? 하나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는 것과 관련된 기도들인가 말이다. 아마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이다.

교회의 가장 큰 적은 IS나 낙태의 문제가 아니다. 할리우드 영화물들도 아니다. 대학 새내기들의 순수하고 맑은 신앙을 망가뜨리는 무신론자 교수도 아니다. 세속적인 정치인들이나 대법관들은 더더욱 아니고, 환경을 파괴하고 가난한 자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악덕 기업들도 아니다.

우리가 현재 직면해야 할 문제점들은 보다 더 현실적이다. 모태에서 살해당하고 장기매매 등의 용도로 거래되고 있는 이 현상을 실로 잔인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심히 학대하고 (사사기 4:3)” 포로된 여자들을 겁탈한 가나안의 군대대장 시스라 또한 악한 사람이었다 (사사기 5:28-30).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인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을 때 (사사기 2:13),” 그들이 정결함과 신실함을 잃었을 때, 그리고 외부가 아닌 내부적 우상이 전체적으로 확산되었을 때가 문제가 되는 시기이다.

만약 당신의 가장 큰 적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먼저 거울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우리는 끊어내고, 나를 영원이 망가트릴 수 있는 원수는 바로 나의 내면에 있다. 물론, 나의 내면을 직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굉장히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을 깊이 들여다보고 나에게 오랫동안 깃들여진 죄성을 직면하게 되면, 오히려 더 늦기 전에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으로 인해 우리가 치유를 얻었음을 감사하게 될 것이다



Benjamin Vrbicek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하리스부룩의 Community Evangelical Free Church의 교육목사이다. 그의 블로그는 Fan and Flame트위터 @BenjaminVrbicek. 본 기사를 이용할 경우 원작자는 'Benjamin Vrbricek', 번역자는 '문화선교연구원'으로 표기할 수 있다. 본 글은 비상업적 목적으로 한국적 상황과 독자들을 고려해 번역 및 수정되었다. 저작권은 ‘ChurchLeaders.com’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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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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