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피니시드>




진실과 거짓의 경계에 있는 십자가

<언피니시드(The Debt)>(존 매든, 2011, 드라마, 스릴러)

 



최성수




<언피니시드>의 원제는 The Debt()으로 2007년 아사프 베른쉬타인(Asaaf Bernstein) 감독이 모사드라는 이스라엘 정보기관에서 일어난 실화를 근거로 이스라엘에서 만든 동명의 영화를 2010년 미국에서 존 매든(John Madden) 감독이 리메이크 한 것이다. 홀로코스트 영화이지만 기존의 유사한 작품들에서 느낄 수 없는 색다른 면을 경험할 수 있는 수작이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과 분노는 아직 끝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형태로 변형되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나찌 전범자 처리 문제와 관련된 스토리를 매개로 인간이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으로 포장된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이유들을 탐색한다. , 인간이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실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먼저 <언피니시드>에 내재된 채 드러나 있지 않은 정서를 이해하고 또 주제를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한국 관객에게 도움이 될 만한 두 개의 영화가 있다. 첫째는 <밀양>이고 둘째는 <그을린 사랑>이다.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화두를 던져주었던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은 유괴 살해범으로서 타인에게 심한 고통을 안겨주었던 사람이 하나님에게 용서받았다는 이유로 아무런 일이 없었던 듯이 편안하게 살아가는 아이러니한 현실로 인해 촉발된 피해자의 분노와 고통의 문제를 다루었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행한 생체실험으로 유대인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었던 범죄자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오히려 신분세탁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피해자의 고통과 분노는 <언피니시드>의 정서적 배경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을린 사랑>(2011)은 레바논 내전 가운데 한 여인이 겪어야 했던 비극적인 삶 속에 숨겨져 있는 비밀(성폭력과 근친상간)을 자녀들에게 밝히는 내용이다. 한편으로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자녀들이 겪을 고통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알았을 때의 해방감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인 이유로 서로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는 현실을 경고하는 한 방법으로서 자신의 비극적인 삶을 드러낼 것을 선택했다. <언피니시드> 역시 비슷한 결말을 보여준다. 비록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작된 거짓과 함께 30년의 세월을 살아왔고 또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래서 진실이 밝혀지면 가족의 행복이 무너질 것을 염려하며 끝까지 숨겨지기를 원했지만, 결국에는 비록 고통스럽다 해도 진실을 선택하는 결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배경은 나찌 전범자들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의 계획이다. 나찌 전범자들 가운데 다수는 전쟁이 끝난 후에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재판을 통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일부는 전후의 혼란한 틈을 이용해 세계 전역으로 숨어 버렸고 일부는 도망한 국가의 힘을 빌어 신분세탁을 함으로써 나찌 전범자 색출 과정에서 용케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사실로 인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해온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는 20대의 세 젊은 남녀를 동독으로 파송한다. 통독 이후에 밝혀진 바로는 거짓된 통계라는 것이 판명되었지만, 통독 이전의 동독은 나찌 전범자 처리에 있어서 철저했다며 당시 전범자 처리에 미온적이었던 서독을 비난했었다. 과거 끔찍한 생체실험을 행한 전범자는 동독 지역에서 스스로를 철저하게 은폐하며 살고 있었다. 포겔이라 불리는 산부인과 의사로 신분세탁을 한 후에 의료행위를 하며 살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이스라엘은 그를 재판정에 세워 만행을 온 세상에 드러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세 명의 미션은 포겔을 산채로 납치해 동독 지역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포겔을 납치해서 베를린 내 동서독 경계 지역을 넘어가야 하는 미션의 위험성도 그렇지만, 미션 실행의 기회를 노리며 한 지붕 밑에서 살아가는 두 남자와 한 여자가 만들어내는 로맨틱한 긴장감, 그리고 진실과 거짓의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적인 불안감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게다가 이런 분위기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액자식으로 구성된 이야기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 관객으로 하여금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도록 한다. 뛰어난 내러티브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동서독 경계지역을 넘는 일에 실패하고 설상가상으로 포겔을 놓치게 된다. 그 후에 포겔은 또 다시 숨어버림으로써 미션은 실패로 끝난다. 세 사람은 자신들의 장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격렬한 논쟁 끝에 나찌 전범자 포겔은 결코 자신의 신분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진실은 결코 밝혀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에서 그들은 누구에게도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맹세를 서로에게 한 후에 당국에 거짓 보고를 한다. 과연 그들의 거짓은 영원히 묻힐 수 있을까?

실패한 미션을 성공으로 탈바꿈시킨 그들은 국가적인 영웅으로 추대 받으며 30년을 살아갈 수 있었다. 레이첼은 미션이 끝난 후에 당시의 팀장이었던 스티븐과 결혼하였으나 사랑이 없는 것이었고, 결국 이혼한 상태다. 오직 둘 사이에서 생긴 소설가인 딸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모든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 그리고 미션으로부터 얻은 영혼의 상처에서 회복된 듯이 보이는 때에 오래 전에 사라진 데이빗이 다시 모습을 드러냄으로 인해 그녀는 다시 한 번 거짓과 진실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바로 이 순간에 레이첼을 포함해서 다른 두 명이 무엇 때문에 진실을 감추고 살아온 것인지가 명백히 드러난다.

영화는 세 사람 모두에게 각각 다른 이유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팀장 스티븐은 정치적인 야망을 버리지 못했고, 동료로서 레이첼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데이빗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모사드와 고국 이스라엘을 떠나 여생을 포겔을 수색하며 보낸다. 마침내 그를 찾아낸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가 맹세했고(맹세는 이스라엘인에게 종교적인 의미를 갖는다)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유로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오히려 죽음을 택한다. 영화의 전개과정에서 심리적으로 다소 유약한 면을 보여 왔던 레이첼이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이유는 진실이 밝혀짐으로 인해 초래되는 결과였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딸과 가족의 장래가 망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결국 세 사람의 거짓은 각각 정치적, 종교적인 이유, 그리고 개인의 행복을 위해 선택되고 또 정당화되었다. 사실 도망간 포겔만 침묵한다면 그들의 거짓으로 피해를 입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화의 내용 가운데 흥미로운 점은 그들의 선택과 30년의 삶을 나치의 전범인 포겔의 삶과 은연중에 오버랩시킨 것이다.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영화의 내용을 구조적으로 분석했을 때에만 확인해 볼 수 있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포겔이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세탁하고 과거로부터 벗어나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의사로서의 직업과 가족의 삶에서 찾은 것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현재가 과거를 정당화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만행을 저지른 과거를 철저히 외면하고 전혀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포겔의 현재 모습에 비춰볼 때 거짓에 기초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영웅으로서 살아가는 그들의 삶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이첼은 나찌 전범자인 포겔의 이중적인 삶을 통해 자신의 거짓된 삶의 실상을 보았음에 분명하다.

레이첼은 거짓을 선택한 삶의 아이러니를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진실을 밝힐 용기를 가질 수 있었는데, 그녀의 깨달음은 도대체 무엇을 변화시켰던 것일까? 영화 속에는 분명한 대답이 제시되지 않았지만, 진실과 거짓의 기로에서 언제나 딸과 가족의 행복을 생각했던 그녀의 평상시의 모습을 생각해볼 때 단순히 깨달음 자체가 용기로 이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그녀에게 남아있는 전부인 딸과 그녀의 가족은 진실을 깨닫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레이첼은 포겔을 찾아내 제거했고 그래서 거짓은 영원히 진실로 남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첼은 살해 전에 먼저 진실을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진실은 결국 밝혀진다는 교훈을 주기 위함인가?

감독은 레이첼의 심경변화를 보다 더 큰 틀에 놓고 생각한 것 같다. 그것은 나찌의 만행이 결코 잊히지 않기를 시종일관 바랐던 데이빗의 의도에 담겨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말해서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단지 자신이나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후대를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기억되어야 할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레이첼이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고 진실을 선택한 용기는 단순한 깨달음을 넘어 바로 이런 집단적인 기억, 곧 후대를 위한 기억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싶은 감독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와 역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듯 감독은 거짓이 선택된 이유들과 그 삶의 진상을 밝히면서 동시에 진실을 향한 용기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성찰했다. 이런 점에서 레이첼의 진실을 향한 용기있는 행위는 앞서 언급한 <그을린 사랑>이 보여주었던 선택과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거짓과 진실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진실은 거짓을 전제하고, 거짓 역시 진리를 지시하는 기호다. 그 경계선은 모호하지만 고백 혹은 폭로 혹은 보도라는 과정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화에서 양자의 경계선에는 홀로코스트의 인류사적 의미에 대한 확신에 따른 고백이 있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에게 거짓과 진실의 경계선에는 무엇이 있을까? 곧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결단의 행동을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달리 말해서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리켜 진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짓을 전제한 말이다. 진리의 편에 서지 않는 자,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이 땅에 온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는 것은 거짓을 택하는 일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에게 진실과 거짓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경계선으로 해서 판단되고 또 결단된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이 가해자가 되는 사건이며, 바로 이 사건을 기억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거짓된 삶을, 그러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살아왔는지를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 있는 자는 비록 현재를 살아도 십자가 사건을 기억함으로써 미래를 살아간다.

회개는 개인적인 회심 차원일 뿐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사람이 거짓을 고백하고 진실을 선택함으로써 회심을 표현할 수 있지만, 또한 변화된 삶을 통해 그 가능한 이유를 공개적으로 나타냄으로써 십자가 사건은 공동체적인 의미를 갖는다.

사실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인간은 정치적인 혹은 가족적인 혹은 사회적인 이유로 진실하지 못하고,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일삼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가는가! 그럼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공동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있는가! 이런 거짓의 삶은 오늘날 또 다른 십자가 사건을 유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환기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실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만일 이것을 부정하면 영원히 거짓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경은 십자가로 나아가는 태도를 가리켜 회개라고 하고 회개에 대해 하나님의 용서를 약속해주셨다. 복음을 전하되 십자가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의 한계는 바로 이런 복음적 메시지를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거짓된 삶을 대표하는 레이첼의 죽음만을 표현할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 그럼으로써 용서 받은 자의 삶이 아니라 거짓된 삶에 대한 심판으로 경험되도록 한 것이다. 감동을 주고 깊은 의미를 성찰하게 하지만, 복음에 근거하지 않고 율법적인 사고에 따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현재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는 여러 가지 진실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군사, 교육, 종교를 막론한다. 아직도 진실을 외면하고, 또 진실이 밝혀질 경우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염려에서 거짓을 선택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조용히 십자가 사건을 반추해볼 일이다. 비록 고백하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백함으로써 진실의 편에 서는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 그것은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와 인류사적인 의미를 갖는 것일 수 있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앞에 자신의 거짓을 드러낸다면 법과 여론의 심판에 앞서 오히려 십자가 사건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용서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을 것이며 이로 인해 진실을 향한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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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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