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즈 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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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청소년 현실

<메이즈 러너>(웨스 볼, 액션/스릴러, 12, 2014)

 

제임스 대시너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메이즈 러너>를 보면서 떠올렸던 이야기는 플라톤의 국가론 7권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다. 이 비유에서 플라톤은 그림자를 실재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의 세계를 소개한다. 빛을 등지고 사는 그들이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오직 동굴 밖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플라톤은 이것을 철학자의 과제로 규정한다. 철학자는 그림자가 실재가 아님을 알뿐만 아니라 또한 실재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동굴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식에 변화가 일어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플라톤은 새로운 것을 가르치기보다는 사람들의 기억을 회상케 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말했다. 비록 동일하지는 않아도 영화는 유비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구조로 전개되고 있다. (스포일러 있음)

매일같이 패턴이 바뀔 뿐만 아니라 괴물이 살고 있어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고 여겨지는 미로가 사방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10대 후반의 아이들이 살고 있다. 한명에서 시작하여 점차로 늘어나 형성된 사회는 성인사회의 축소판이다. 리더의 지도로 어느 정도 질서 유지를 위해 행정과 사법 체계를 갖추고 있다. 사회적인 역할역시 각자에게 할당되어 있다. 그들은 매달 어디선가 한 명씩 보내지는 아이와 함께 공급되는 보급품으로 살아간다. 미로에 있는 괴물은 밤에만 활동하고 또 밤에는 미로가 닫히기 때문에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하거나 미로에 갇히지만 않는다면 안전하다. 이런 환경에서 그들은 서로 협력하며 생존하기를 터득한다.

그들 중 누구도 왜 이런 곳에 오게 되었는지, 누가 이런 곳으로 보냈는지를 묻지 않는다. 이름이외의 모든 기억이 제거되어 고민을 해봤자 뾰족한 수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괴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미로를 빠져나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괴물이 활동하지 않는 시간에만 미로 탐색을 위해 들어가기 때문에 아이들은 괴물을 자극하지 않고 평화를 유지하며 사는 방법을 터득했다. 적어도 토마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들은 평화로운 일상을 사는 법을 터득하며 살았다. 그러나 토마스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누가 이곳으로 보냈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이런 환경이 조성된 것인지, 누구도 묻지 않았던 근본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게다가 미로에서 처치한 괴물에게서 얻은 장치로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는 단서를 획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로를 빠져나오려는 시도는 규칙위반으로 여겨져 좌절된다.

마지막으로 온 여자 트리사의 등장으로 환경은 급격하게 변하는데, 결정적인 이유가 된 것은 그녀와 토마스가 서로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토마스로 하여금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도록 했다. 게다가 미로가 밤에도 닫히지 않아 더 이상 괴물로부터 안전하지 않자 토마스는 미로에서 벗어나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설득한다. 방법을 찾는 중에 토마스는 괴물에게 찔린 사람들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제거된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것이었다. 토마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 괴물에 감염되어 모든 기억을 회복한다.

토마스는 미로에 둘러싸인 공간에서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 살아야 할 삶이 아님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동굴의 비유에서 철학자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이에 비해 트리사는 토마스에게 영감을 주는 다이몬 같은 존재다. 트리사를 통해 영감을 얻어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게 되고 비록 위험한 방법이긴 해도 기억을 되살린 토마스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현실을 넘어 미로 밖의 세계를 확신하고, 결국 그들을 미로 밖으로 인도해낸다.

이야기 자체가 워낙 철학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서 다양한 현실에 유비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현실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유비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지만, 특별히 대한민국의 청소년 현실에 조명해 보자. 자신도 원치 않게 입시환경으로 떠밀리는 현실이나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미로와 다르지 않다. 안전하게 보장된 환경을 벗어날 생각을 못하는데, 그들을 위협하는 것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그들만의 생활과 규칙이 있다. 그 안에서 그들은 안주한다. 먹고 마시는 것을 공급받고, 그들에게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행동을 하며 산다. 보기에는 자유로운 것 같아도, 멀리서 바라보면 그들만의 공간에 갇혀 살고 있을 뿐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 나는 누구인지, 나의 부모는 누구인지, 일련의 질문들은 사치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의미 있는 것은 그들만의 공간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그래야 혹독한 성인 사회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이름으로만 기억될 뿐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런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물어보아야 뾰족한 수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한민국 청소년 현실에서 토마스는 도대체 누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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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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