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주인공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 <써니>(강형철, 2011, 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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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주인공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
<써니>(강형철, 2011, 15세)





최성수

  과거라는 공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이 맞겠지만, 적어도 과거를 기억 혹은 추억하는 시점이 현재라는 점에서 과거는 공간 개념에 가깝다. 결코 현재가 아니면서도 현재에 경험된다는 점에서 현재라는 시간의 한 모퉁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다. 과거에 어떤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과거는 현재의 중심을 차지한다.

  이곳이 실재가 되기 위해서는 매우 복잡한 검증의 경로를 거쳐야 한다. 법적인 엄격성이 요구되지 않는다면, 현재 속 과거는 그야말로 판타지로 가득하다. 오늘이 어떠냐에 따라, 무엇에 중점을 두고 또 어떻게 가치를 정하느냐 따라 과거는 다양한 옷을 입고 나타났다가는 이내 사라지며, 또 어느 순간에 다시 나타난다. 물론 다른 색채감과 톤을 갖고서. 그래서 과거를 불러들이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며, 또 나이와 성과 문화와 종교에 따라 달라진다. 물론 공통점이 없지 않기에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는 현재의 공간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현재로 미래로 다시 과거로 자유자재로 옮겨 다닌다.

  이쯤해서 기억과 추억을 구분하는 것이 좋겠다. 기억은 과거의 사실을 단순히 보존하는 것이라면, 추억은 분명한 주제의식을 갖고 과거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수많은 단편들을 조직적으로 구성해내고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온갖 색을 입히고 또 리듬을 넣는다. 추억은 분명한 의도가 현존하기 때문에 열정이 있고 낭만과 그리움이 있다. 추억은 항상 아름답다. 물론 때로는 아쉬움과 분노도 있다. 그러나 기억의 경우에는 혹시 있을 수 있다 해도 추억하는 사람에게 분노는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다.

  <써니>는 과거를 추억하는 영화다. 특히 7명의 여학생들이 만들었던 학창시절을 추억한다. 나미의 추억이라는 점에서 나미가 경험하고 느꼈던 과거이다. 이 시절에 대한 기억이 그녀에게 없지는 않았지만 그곳으로 들어갈 문을 찾지 못해, 다시 말해서 추억할 만한 계기가 없었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또 딸과 동생으로서 요구되는 삶을 살다보니 지금은 어느새 중년의 시간을 살아가는 주부다.

  삶이 건조하게 느껴지고 또 삶의 공간이 답답하게 여겨지려는 때에 그녀에게 학창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준 사람은 춘화다. 그녀는 폐암 말기 환자로 두 달 정도 남은 생을 병원에서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죽기 전에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는 그녀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나미는 7공주들의 멤버들을 하나 둘 씩 찾아 나선다. 그 문에 들어서자 나미의 단편적인 기억들은 이름과 더불어, 그리고 당시의 기록물과 함께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는다. 추억하는 동안 그녀의 학창시절은 이제 더 이상 과거가 아니라 현재 속의 한 곳이다. 과거와 현재를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편집 방식이나 딸을 괴롭힌 아이들을, 마치 학창시절에서 있었던 것처럼, 집단적으로 보복한 행동, 그리고 좋아하는 오빠가 자신이 아닌 다른 친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울고 있는 자신을 보듬는 장면 등으로 감독은 그녀의 과거가 현재와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였다.

  놀라운 사실은 과거를 추억하는 동안 현재의 많은 것들이 더불어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이다. 오랜 세월을 거친 후에 재회하는 순간에 “하나도 안 변했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말하곤 하지만 이미 자신이 생각했던 미래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만족해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기를 원했던 그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삶의 귀퉁이에 매달려 끌려 다닐 뿐이다. 그런 그들이 “짱”이었던 춘화의 죽음을 계기로, 그녀의 유언에 의해 원하는 자리를 찾게 된다. 이런 연출을 가능하게 만든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감독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일까? 제작 노트에도 나와 있지 않지만, 영화적인 구조만을 분석해서는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질문이다. 사실 이런 일이 현실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장면에는 감독이 영화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집약되어 있고, 그 메시지에 대한 기독교적인 성찰은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능하게 한다.

  먼저 <써니>가 던진 화두 역사의 주인으로서 살아간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자. 여성으로서 역사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때였다. 그러나 이것을 여성 해방과 연결시키는 것은 감독의 의도가 아니다. 감독은 이 말을 통해서 현재와 미래에까지 이어질 수 있는 가치를 위해 사는 사람을 강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회복하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을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이것에 현혹되어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의 주인공으로 산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 필자는 감독이 강조하는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영화는 이념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것이 서로가 약속한 ‘써니’라는 공동체의 형성이라는 것이다. 대학생 오빠의 노동자를 위한 투쟁의 역사는 단지 기억에 불과할 뿐이고, 그것이 현재에 차지하는 공간은 전혀 없다. 오히려 외국인 노동자의 임금을 지불하지 않아 법정에 서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그리고 80년대에 벌어진 치열한 투쟁의 역사도 결국 학생들의 패싸움에 불과할 뿐이라는 인상을 주는 장면은 아무리 강한 신념이라도 현실에 따라 변하게 마련일 뿐임을 역설한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 있음을 영화는 강조한다. 코믹한 현실에서 진정성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써니’ 멤머들의 약속이다. 그 약속은 단순히 다시 모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해 살아간다는 의미의 약속이었다. 짱이었던 춘화는 그 약속을 다시금 환기시키고 또 그 약속이 계속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둘째, 짱의 죽음을 계기로 모두가 하나로 모임과 동시에 과거는 현재를 넘어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과거가 이렇게 힘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갖는 의미 때문인데, 바로 ‘써니’의 약속이었다. 약속을 지킨 짱으로 인해 가능해진 것이다.

  셋째, 그래서 짱의 죽음은 결코 슬퍼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미래를 위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출발점이 된 것이다. 그녀가 죽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을 죽음으로써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마지막 장면을 학창시절에 미처 추지 못했던 춤으로 마무리 한 것은 써니의 새로운 출발을 말하는 데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장면이다.

  역사의 주인공으로 산다고 해서 영웅이나 위대한 업적을 생각한다면 영화를 오해하는 것이다. 간혹 여성들의 자유와 해방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다고 해도,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주인공이자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 그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그의 말씀을 따르며 그의 약속을 바라며 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역사의 주인공을 계승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사는 사람은 누구나 역사의 주인공이다. 성만찬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을 날마다 확인시키기 위함이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변방에서 중심으로 옮겨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약속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기독교적인 성찰은 <써니>의 메시지를 더욱 분명하게 부각시켜준다. 강형철 감독이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업영화를 통해서 이렇게 복음적인 의미를 표현해내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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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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