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남겨진 책임과 애도의 연대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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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Rita 송 



남겨진 책임과 애도의 연대


강영롱 (문선연 객원연구원)

 

우리는 어린 학생들의 무고한 죽음에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유가족들의 슬픔과 절망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세월호 선원들이 아이들 버리고 배를 떠났다는 소식에 화가 났고, 초기 대응에 실패한 해경의 지지부진한 구조작업을 보며 분노했다. 정부의 허술한 재난 관리 체계가 연일 도마에 오르고 사고 수습 본부를 일괄하는 컨트롤 타워가 없다는 소식을 들으며,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슬픔도 컸지만 분노도 컸다. 국민 한 사람으로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데에 자괴감과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고, 구조작업이 생환자 없는 수색작업이 되고 말아 더 절망했다.

사고가 난 지 벌써 열흘이 넘었다. 침묵으로 애도하다가 이제 남겨진 일들을 생각한다. 우리 앞에 어떤 슬픈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다가 우리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가를 생각한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책임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남겨진 몫을 생각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독일이 아우슈비츠에서 있었던 전무후무한 범죄에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를 논변한 적이 있다. 그는 법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 도의적 책임과 형이상학적 책임으로 나눠, 범죄에 가담한 정도에 따라 죄와 책임의 정도를 구별했다. 이러한 분류가 우리 사회의 죄책감의 실체를 밝히고 책임의 범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물어야 할지,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르겠다.

 

법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

사법적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이 있다. 법치 국가에서 사고의 당사자들이 법적인 책임을 지는 것은 마땅한 일. 세월호 선원들과 해운회사의 소유주 및 경영자들은 재판에 소환되어 죄값에 따른 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실정법이 명시한 기준에 따라 정의로운 판결이 내려지길 기대한다. 범법자들의 형량을 늘려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안이 워낙 중대한 까닭에 사법부는 여론을 경청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향후 본보기가 될 엄중한 판결을 내릴 공산이 크다. 다만 이 판결이 개인을 엄벌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보다, 우리 사회 내부에서 독버섯처럼 자란 관행을 도려 낼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길 바랄 뿐이다.

정치적인 책임은 어떤가? 먼저는 국가 안에서 발생된 일이기 때문에 행정 관료와 정치인들의 책임을 물을 일이다. 사태에 느슨하게 대처한 책임, 안전 방재 시스템의 총체적인 부실에 정부 당국과 관료들, 정치인은 정치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행정과 정치를 위임한 시민들도 이런 일련의 사태에 대한 책임에서 빗겨가기 어렵다. 기실 야스퍼스에게 정치적인 책임이란, 특정 공동체에 속했다는 것에 대한 운명적인 책임이며, 시민이 투표한 정치인들과 국가에 대해서 갖는 책임이다. 그러므로 재난에 부실하게 대처한 국가 기관이나 정치인들에게 감정적으로 분노하는 선을 넘어서, 정부를 질타하며 관료화된 행정체제와 대처 능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일은 시민이 지닌 정치적인 책임을 구현하는 정당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묵과하지 않고 용기있게 발언하는 사람이 더 책임있는 사람이다. 혹 언론이나 학계와 같이 공식적이고 합리적인 제안을 할 수 있는 집단에 자신의 책임을 위탁한 이들이 있다면, 이들의 행보를 주의 깊게 살피며 그들의 합리적인 비판을 응원할 일이다.

 

도덕적인 책임과 형이상학적 책임

이제 도덕적인 책임을 생각한다. 도의적인 책임이야 먼저는 사건 당사자들의 몫이다. 침몰하는 배에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부지런히 탈출했던 이들이 도의적인 책임이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이들의 비윤리적인 태도에 분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던가?

그러나 이런 도의적인 책임을 생각하는 순간, 우리도 이 참사 안으로 끌려들어간다. 이 사태를 지켜보는 평범한 시민들의 애도가 통절해질수록, 인생을 한 번도 펴지 못했던 아이들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도의적인 책임감 또한 더욱 증폭된다. 안전에 불감한 사회를 만드는 데 나도 일조한 것은 아닌가? 나는 구조적인 부조리와 불법이 성행하는 데도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던가? 내 생계를 위협하거나 내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 한 굳이 나서야 할 까닭이 없다며 방관해마지 않았던가? 아니 내 삶의 습속도 이런 흐름에 익숙해지지는 않았던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그 어떤 사람도 이 위험한 사회를 만드는 데 공모한 도의적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더욱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인간의 허물과 죄악을 오랫동안 골몰해온 그리스도인이기에 마음이 더욱 아리다. 벌써 우리 자신부터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범벅된 세상에 오랫동안 편승해 왔던 터라, 하나님 앞에서 이 사건을 막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겠다. 우리도 이 사건의 원인 제공자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형이상학적 책임을 생각한다. 야스퍼스에게 형이상학적 책임이란, 다른 범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엄연히 인간의 마음을 괴롭히는 죄책감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대형 참사에서 구조된 이들에게도 여전히 남아있는 처참한 슬픔이며 죄의식이다. 친구들과 동료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 살아남은 자를 더욱 힘들게 한다. 그러나 이들만큼 아파해야 할 사람이 바로 우리다.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위험을 요행히 피했다. 위험이 내게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이 재난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그 배에 탑승했다가 구조된 이들 만이라 할 수 없다. 바로 이 재난을 가까이서 목도한 우리들도 살아남은 자들이다. 우리도 동료와 친구들의 부재로 괴로워할 사람들과 함께 괴로워해야 할 사람이다.

그렇기에 슬퍼하고 애통하라. 그들과 함께 슬퍼하고 애통하라. 세상의 파국적 실상에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사무치게 우울해지더라도, 이 슬픔과 절망을 거절하지도 말고 피하지도 말라. 그들의 울음이 그칠 때까지 함께 울라. 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애통이 그칠 때까지 우리도 애통을 그치지 말라.

 

애도의 연대로 시작하자.

섣부르게 희망을 이야기하지 말자.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안에서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너무 잘 알지만 섣불리 이야기하지는 말자. 부활과 생명의 주님조차 먼저 통분해하셨기 때문이다. 죽음에 넘겨진 이들과 그들을 떠나보낸 사람들의 눈물에 기꺼이 동참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을 집어 삼키우는 사망의 세력에 분노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이 먼저 분노하셨고 애통해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이 가신 부활과 생명의 길에도, 사람들의 처연한 슬픔과 절망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악에 대한 에누리 없는 분노가 갈보리 십자가에 다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애도의 기간을 더 연장한다. 그들의 슬픔이 가실 때까지 애도를 더 연장하기로 한다. 참사와 파국에 대한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애도하기로 한다. 남의 책임이 아니라 나의 책임이며 우리의 죄책이라는 자각이 있을 때까지, 흉내만 내는 회개가 아니라 진정을 담아 삶을 돌리는 회개가 있을 때까지, 우리는 이 애도를 더 연장하기로 한다.

이 애도의 기간, 어떤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여전한 불의를 보며 가슴을 치며 회개할 것이다. 참사가 예견된 관행을 따랐던 것을, 불의와 불법에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능사라 생각했던 것을, 이런 사회적 흐름에 소극적 지지를 보냈던 것을,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지 못했던 것을, 침묵하며 통회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은 이웃의 절절한 고통을 방관한 자신에 대해 참회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신앙이 지나치게 사사로웠다고, 세상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연장되지 못했다고 돌이킬 것이다.

그러나 이 기간, 어떤 사람은 끓어오르는 정의감을 참아낼 수 없을 것이다. 비열한 선원들과 무능한 정부와 미덥지 못한 언론에 분개할 것이다. 거센 비판을 담은 글을 생산하기도 할 것이며, 이런 글들을 무수하게 실어 나르기도 할 것이다. 사회적 갈등을 조장한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사회의 부조리를 혹독하게 질타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 애도의 기간, 그렇게 애도하자. 어떤 이들은 눈물로, 어떤 이들은 울분으로, 슬퍼하는 이들과 애도의 연대를 이루어 갈 때다. 각 사람에게 맡겨진 애도의 몫이 있는 법. 자신의 죄책을 들여다보며 침묵하고 회개하는 이들도, 울분에 떤 이들을 지지할 때다. 그들이 분노하되 증오하거나 절망하지 않기를, 그들이 감정을 추슬러서 보다 이성적으로 사회의 부조리와 불법을 들추어 낼 수 있기를 기도할 일이다. 반대로 공공의 영역에서 문제를 더욱 정치화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도, 통절하게 자신을 돌이키는 이들을 인정할 때다. 자기 몫의 회개가 삶의 돌이킴으로 이어지길, 사회적 돌이킴으로 이어지길 기도할 일이다.

애통해하시는 주님과 함께 울며,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과 함께 울며, 또한 함께 우는 사람과 또 함께 울며 우리는 애도의 연대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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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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