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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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삶

<창수>(이덕희, 드라마, 청소년관람불가, 2013)

 

제목 창수는 한자어로 슬픈 목숨을 뜻한다. ‘비참한 인생정도일 것이나, 영화 내용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말 그대로 슬픈 목숨혹은 처절하게 슬픈 인생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창수>는 하류인생에 초점을 맞춰 제작되었다. 동인천 차이나타운을 생활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운명을 통해 현대 사회의 이면을 드러내면서 생각하지 않고 사는 현대인을 패러디한다. 무엇보다 배우 임창정의 연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창수로 분한 그의 비겁한 사람의 연기는 두드러져 보였기 때문이다. 스스로 비겁하다고 보는 것은 남의 인생을 살기 때문이다. 자존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며, 있다면 화려한 전과 기록일 뿐인데, 그는 오직 교도소에서만 존재감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는 남의 죄를 뒤집어쓰고 대신 형벌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2년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창수가 삶을 사는 방식이었다. 살면서 뚜렷이 무엇인가를 하고 싶거나 이루고 싶은 일이 없으니 그에게 돈은 그저 죽지 않고 살기에 충분하면 되고 또한 시간을 때우면서 기분 전환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에게 교도소 안과 밖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태어나지 않았고 또 궁여지책으로 하는 일이라는 게 자신의 의지로 사는 일이 아니니, 굳이 자신의 의지대로 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도소를 들락거리면서도 그가 당당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에게 소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죽을 때만은 자신의 의지대로 죽는 것이었다. 영화는 창수의 인생에서 그 소원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보여준다.

비록 매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창수로 하여금 사는 맛을 느끼게 하고, 지금과 다른 삶을 살고 싶으며, 또 평소의 바람대로 폼 나게 죽을 결심을 하도록 한 계기는 여자와 더불어 왔다. 그녀는 조직 폭력배 보스의 여자였다. 보스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제2인자와 연인 관계로 지내다가 불화하여 실랑이를 벌이는 현장에 있던 창수를 만나 그의 집에서 잠시 머물게 된다. 그녀가 차려준 음식을 먹고, 또 앞으로 그녀와 함께 살아갈 날을 꿈꾸는 것만으로 창수는 인생에서 최고 절정의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짧아도 너무나 짧았던 창수의 행복은 그녀가 창수의 집에서 살해됨으로써 순식간에 깨지고 창수는 졸지에 살인범으로 몰리게 된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된 여인도 아니었고, 그녀와의 이별 역시 그렇게 일어났기에, 평소와 같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징역을 살면 그만이었다. 이전의 삶과 전혀 다르지 않은 삶일 수 있었지만, 이번 경우만은 달랐다. 그녀를 만나면서 그렇게 살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반지를 장만하는 데에 6개월 징역을 대신 살아야 벌 수 있는 금액을 아무런 주저하지 않고 지불한 것을 보면 그녀에 대한 창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창수는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녀를 통해 그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행복을 맛보았다. 다른 사람

들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창수에게만은 특별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와 보냈던 특별한 의미를 갖는 시간이 너무 짧아 사랑을 말하거나 혹은 그 후에 이어지는 창수의 비장한 결심을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것은 감독이 사랑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만일 이 영화를 사랑의 순수함을 말하려는 것으로 본다면 연출은 형편없는 것이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랑을 느낄만한 장면이 지나치게 적고 또 스토리가 식상하기 때문이다. 결국 감독의 의도는 순수한 사랑을 말하려는 데에 있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감독은 무엇보다 하류 인생을 사는 창수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다양한 인생 가운데 한 단면을 경험하게 하고자 한다. 영화라는 것이 그렇지만, 이런 영화를 통해 평소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영화적으로 경험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또한 영화에서 매우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로맨스가 지나치게 짧게 편집된 이유를 고려해본다면, 감독은 창수라는 캐릭터를 통해 아무런 생각이 없이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패러디하고 싶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게 기껏해야 일어난 일이나 사건에 대해 적절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그 안에서 그에게 할당된 자신의 몫을 수행하는 것이고, 혹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조직을 유직하기 위해 혹은 호구지책으로 선택한 일을 자신의 일로 삼으면서 분주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이것으로 성과가 나타난다면 그는 명예와 힘을 얻고 또 재물을 누리면서 그것을 자존감으로 삼는다. 훈장처럼 따라다니는 학력을 자랑하고, 직장을 자랑하고, 연봉을 자랑하며 아파트 평수를 자랑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호구지책으로 남의 인생을 산 결과일 뿐이다. 살아서도 그렇지만 혹시라도 치명적인 병에라도 걸려 죽게 되면 그야말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기까지 전혀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이다. 철학자 한병철의 말대로, 그야말로 피로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이런 인생을 영화는 비겁한 인생혹은 처절하게 슬픈 인생이라고 말한다. 현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창수>는 곧 우리의 이야기로 독해할 수 있다.

특히 요즘 정치인들이 그렇고 성과를 추구하며 사는 회사원도 마찬가지며 심지어 조직의 힘에 빌붙어 사는 일부 교수들까지도 그렇다.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사는 것을 자신의 일로 여기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또 그것으로 나름대로는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이와 관련해서 그리스도인은 어떨까?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오직 교회가 유지되기 위해 헌신하고, 그 안에서 주어진 자신의 위치에 안주하며, 이를 위해 주어진 일을 소명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그리스도인에게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염두에 두면서 그것이 이 땅에서 성취되길 기대하며 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신다. 중요한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남의 인생에 편승해서 살아가는 형태에서 벗어나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조직을 유지하거나 생계유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삼을 때만 가능하다.

  한편, 창수에게서 도석에게 시선을 옮겨보자. 도석은 창수와 대조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창수와 달리 도석은 남의 인생을 자기 인생으로 빼앗으며 살아간다. 우두머리의 애첩을 빼앗는 일이나, 우두머리의 권한과 후에는 그의 생명까지도 빼앗는 것 등이다. 심지어는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실상은 기독교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취하며 살아간다. 이리가 양의 탈을 쓴 격이다. 창수가 자기의 인생이 아니라 남의 인생을 자신의 것으로 살아가면서 스스로를 비겁하게 산다고 보았다면, 도석 역시 방법은 달라도 자신의 본질에 따른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을 빼앗아 제 것으로 삼으며 살았다는 점에서 결국 비겁한 인생을 산 셈이다. 창수가 정의하는 비겁하다함은 자신의 삶, 곧 본질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창수는 삶의 진실을 접하면서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았지만, 도석은 끝까지 변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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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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