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노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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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하는 인간과 삶의 진정성

<미스터 노바디>(자코 반 도마엘, 로맨스, SF, 15, 2009)

 

인간은 늘 무엇인가를 선택한다. 선택한다 함은 욕망이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보이진 않아도, 또한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명명할 수 없다 해도 욕망의 작용은 인간으로 하여금 선택의 상황으로 이끈다. 선택의 상황에 자신을 던져 넣음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욕망하는 존재임을 노출시킨다.

특히 인간이 선택해야 하는 상황은 미래에 대한 무지 때문에 발생한다. 미래를 알면 선택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다. 선택의 대상인 이것 혹은 저것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이것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저것을 선택하는 것보다 더 나은 상황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르기 때문에 선택의 상황에 직면한다. 더 나빠질 것을 알면서도 선택하는 것은 적어도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혹은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예컨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돌아가도록 스스로 나쁜 것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희생이라고 한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자신의 선택은 적어도 양보하는 것이 자기에게 더 나은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한 결과다.

갈등은 선택의 상황을 초래한다. 부모의 이혼이라는 상황은 미성년 자녀에게 선택의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아이는 둘 중에서 누구와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둘로 나뉠 수 없기 때문에 선택해야 한다. 엄마와 아빠는 동등한 가치를 갖기 때문에 욕망 때문도 아니다. 그렇다고 미래를 위해 포기하기 때문도 아니다. 반드시 선택해야 해서 선택을 실행하는 것일 뿐이다. 욕망을 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꿈을 위한 것도 아니며 또한 더 나은 가치를 위한 선택도 아닐 때,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이며 선택에 대한 결과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선택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가지 않은 길 혹은 선택과 함께 버려진 것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다. 선택을 본질적인 행위의 하나로 갖는 인간은 늘 이렇다.

한편, 선택과 더불어 나타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진행하는 시간 때문이다. 역행이 가능하다면, 혹은 다소 우회가 가능하다면, 아니다 생각될 때 돌아서거나 우회하면 된다. 그러나 인간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조건인 시간 때문에 선택과 더불어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끊이질 않는다. 시간의 철학자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떠올려보라. 어느 길을 선택하든, 그것은 내 삶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 법이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삶의 모든 가능성을 다 살아본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행복해질까? 아쉬움도 안타까움도 없어질까?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은 <미스터 노바디>를 기획할 때 혹시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시간, 곧 한 번 선택한 것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에 비해 우리가 선택해야만 하는 가능성은 무수히 많은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인간의 선택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나비효과가 암시하고 있듯이, 무엇을 선택하든 그 삶은 연쇄적으로 수많은 영향을 일으킨다. 그러나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는 한계로 인해서 자신의 선택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도저히 감을 잡지 못한다. 그러니 매사에 신중하며 진정성 있는 태도로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이다. 그리고 그 삶에 책임을 지고 살면서 만족하며 살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도마엘 감독은 자그마치 9개의 삶의 가능성을 모두 살아낸 118세의 사람을 화두로 삼는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묻게 한다. 그는 과연 행복했을까? 그런 삶을 살았던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불가역의 원리를 깨면서까지 9개의 삶의 가능성을 모두 사용한 한 사람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2009년에 개봉했지만, 한국에서는 뒤늦게 개봉된 <미스터 노바디>는 먼저 두 개의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부모의 이혼을 계기로 선택의 기로에 선 9살의 니모가 상상하는 미래이고, 다른 하나는 118살로서 이제 막 임종을 앞두고 과거를 회상하는 미스터 노바디의 회상이다. 소년은 엄마와 아빠의 이혼을 계기로 자신에게 닥쳐오는 선택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삶의 모든 가능성을 상상하며 실험한다. 엄마와 아빠처럼 인생에서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다.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자유이고 또 가능하지만, 그것은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는 그야말로 상상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9개의 삶에 등장하는 니모는 아무도 아닌 사람이다.

이에 비해 임종의 마지막 순간에 과거를 회상하는 니모는 어떨까? 그는 이미 모든 삶의 가능성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단면들을 모두 기억해내기에는 너무 노쇠해 있다. 기억이란 것이 그렇지만 늘 단편적이기 때문에 체계적이지 않다. 추억은 아름답게 채색된 것만을 솎아낼 뿐이다. 인간이 치열한 삶의 경쟁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습득한 처세술이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너무 단편적이고 또 가공된 모습이기에 결국 니모는 아무도 아닌 존재이다.

결과적으로 9개의 삶의 가능성을 모두 살아낸 한 사람의 두 가지 방식의 이야기는 영화연출 방식을 결정하게 되어 매우 혼잡스럽게 느껴진다. 이런 혼란을 보게 함으로써 감독은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어떤 삶의 가능성이든 최선을 다하는 삶임을 역설한다. 선택한 삶 안에서 최선을 다할 때, 그 삶이 내가 살아내야 할 삶인 것이며, 그 삶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모든 삶의 가능성을 다 살아보는 것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제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행복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나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상상 속의 존재일 뿐이고, 또한 파편화된 형태로 존재할 뿐이어서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함을 역설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것을 9살 니모의 상상으로 돌림으로써 도마엘 감독은 9개의 삶을 다 사는 일은 오직 상상에서만 가능할 뿐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시간의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삶의 모든 가능성을 다 누릴 수는 없다. 어떤 삶의 형태든 최선의 삶이 곧 그의 삶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인 모든 것을 오직 감사함으로 받으며 기뻐하고 또 소망 가운데 사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우리 삶 속에서 신비하게 작용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며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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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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