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의 대세 영화 <설국 열차>와 <더 테러 라이브>에 대한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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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대세 영화 <설국 열차>와 <더 테러 라이브>에 대한 유감!

정재후 목사(문화선교연구원 객원연구원, 성광교회 담임)

cw7, 지구 온난화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인류가 생각해 낸 처방. 그러나 인간의 이성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면서 그 처방이 재난이 되고 만다. 전 지구가 얼음덩이가 되어 생물이 살 수 없게 되었을 때, 마치 노아의 방주같이 기차가 무한히 달리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생존을 한다. 그런데 그 칸은 엄격하게 구분이 되어 있다. ‘엔진’ 칸에는 최고 지도자가 살고 있고 ‘꼬리칸’에는 많은 사람들이 노예처럼 살고 있다.

워낙 유명해진 영화이기에 스토리를 여기 또 적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또한 봉준호 감독의 역량의 우수성과 그가 만든 영화의 재미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고 나 또한 그렇다.

문제는 그 기차가 마지막 남은 유일한 인류를 싣고 달리는 것이기에 수많은 기차 가운데 어떤 한 기차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인류 역사의 투쟁 가운데 어떤 한 국면에 대한 해석일 수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설국열차는 엔진 칸의 지도자와 민중과 서민을 대변하는 꼬리 칸의 지도자가 내통하면서 맬더스의 인구론처럼 인류의 수와 삶의 질을 조절하고 있는데, 이 영화는 그것 자체가 다름 아닌 인류 역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봉준호의 설국열차가 인류 역사의 계급 투쟁을 축소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평론들이 이미 대대적인 광고로 기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봉준호의 역사관은 무엇인가? 정의와 개혁, 피와 눈물, 땀방울의 인류의 역사는 모두 상류층의 지도자와 하류층의 지도자의 타협에 의한 합작품이란 말인가?

봉준호는 386세대다. 그가 ‘살인의 추억’으로 대중적인 지지를 얻게 된 것도 단순한 영화적인 재미를 넘어서 공권력의 상징이 되는 경찰의 무능함과 서민의 그늘진 삶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괴물’에서는 미국을 적으로 간주하며 한강에 오염물질을 마구 방류하여 괴물을 탄생시킨 장본인으로 묘사한다. 그의 역사관이 대중화되면서 나는 이미 대중적 상품화의 위험을 감지했었다. 소위 ‘뜬 감독, 성공한 감독’이 된 그는 이제 단순한 오락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아니라 심오한 역사적 의미와 대중적 재미를 겸비했다는 프로파간다를 등에 업고 우리 나라는 물론 미국 혹은 세계를 겨냥한 ‘설국 열차’를 만들었다.

“꼬리칸과 엔진칸의 지도자는 원래부터 인류 역사 이래 항시 협력자이다”, 이런 메시지가 미국을 포함한 주류의 나라의 주류의 대중들에게 역사를 흥미있는 가십거리로 만들 수 있는 봉준호식의 대중화 작업인가? 물론 어떤 역사의 한 단면에서, 그리고 노동 운동에서도 노조 지도자가 회사측과 야합하고 뇌물을 챙길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노동 운동은 다 노조 위원장을 먹여 살리기 위한 쇼였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괴물의 탄생의 책임자인 미국의 자본을 얻으려 무진 애를 썼지만 실패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아직 봉준호가 통한다. 단순한 언론의 메카니즘을 단숨에 장악해 버리는 자본의 힘에 의하여 스크린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매스컴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

설국 열차의 액션은 올드 보이의 액션 씬을 모방한 듯 보인다. 결말도 원작 만화를 읽어 보지 못해서 봉 감독의 창의성은 어느 정도였는지 알지 못한다. 결말의 북극곰이 코카콜라 PPL 이 아니냐는 글이 올라왔다고 한다. 그렇든 아니든 나는 그런 글이 올라온 것 자체가 코믹하다고 느껴진다.

지구온난화의 대표적인 희생양인 북극곰이 생존하고 있다는 메시지와 마지막 남은 인류 - 새 아담과 하와 - 는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이라는 것이 유일한 봉준호의 저항의식이었는지? 북극곰에게 잡혀 먹고 인류가 멸종한다는 염세적 결론인지? 아니면 하다 보니 결말을 급하게 설정하다가 그렇게 된 것인지도 의심이 간다.

헐리웃의 대자본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봉준호, 그의 괴물 이후 영화의 마케팅, 배급 전략은 매스컴과 스크린의 독점으로 나타난다.

“열흘 만에 ‘설국 열차와’ ‘더 테러 라이브’ 합쳐서 천만 돌파!”

이 기사를 보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비록 열흘 동안이라고 하지만, 그 동안 우리 나라에, 아니 전 세계에 영화는 이 두 개 밖에 없는 것인가? 5천만 인구 가운데 한 영화의 관객이 천만을 넘어서는 것이 정상적인 나라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왜 우리는 천만 관객 돌파에 열광할까?

386세대의 비판 의식은 어디로 간 것인가? 재벌의 독식과 문어발식 기업 확장, 그런 기득권에 저항하는 비판 의식과 오늘 영화판의 1등, 2등 영화들이 자행하고 있는 스크린의 독점 행위는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는 것인지? 과거에 스크린 퀴터제로 한국 영화를 보호했듯이, 저예산 영화, 예술 영화, 독립 영화들도 제도적으로 보호하고 상영 기회를 주는 배려가 필요하다고 본다. 김기덕 감독이 한국에서 내 영화를 상영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을 우리가 아프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

<더 테러 라이브> 는 설국 열차에 비해 소자본으로 제작되었고 김병우 감독도 무명 신인이라서 매스컴의 후원도 그리 강하게 받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개성이 있고 ‘설국 열차’와 같이 개봉되어 선전한 영화라고 칭찬받을 만하다. 서울 한 복판의 마포대교가 폭파되고 그것이 생중계된다는 것은 새로운 재미와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문제는 마포대교 공사 중에 죽은 사람을 제대로 보상해 주지 않아서 이렇게 서울 전체를 대상으로, 나아가 대한민국 전체를 대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저 오락 영화다, 그리 보면 되겠지만, 마포 대교와 여의도, 국회의사당, 그리고 대통령이 생방송에 직접 출연하여 사과를 해야 한다는 설정은 억지스러웠다. 경찰청장이 방송국에 등장하고 감독은 그를 “쌍 무식한 놈으로 묘사하여 테러범의 분노를 자극하여 그에게 죽어도 싸다”는 관객들의 공감을 얻어 낸다. 이런 것이 감독의 이미지 메이커로서 힘이다. 그래서 좀 유감이다.

경찰청장 - 공권력의 상징으로 묘사하는 건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를 테러범이 방송국 안에 이미 설치 해 놓은 이어폰폭탄을 통해서 쉽게 죽일 수 있다는 설정은 대통령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도 관객은 테러범 편이 되어 대통령이 나와서 사과하면 되지 왜 안하냐는 불만을 갖도록 만든다. 경찰에 대한 거부감을 표현할 수 있으나 경찰청장은 우리 나라에 단 한명 밖에 없는 특정인이기도 하다. (내 아들에게도 이 문제를 물어보니 잘 이해를 못했다. 그래서 어떤 신부가 영화 속에서 강간범으로 나올 수 있지만 교황이 강간범으로 나오면 이것은 가톨릭에 대한 모독이 되지 않겠냐? 어떤 목사가 성추행과 유괴범으로 나올 수 있겠지만 어느 지역에 있는 어느 교회의 담임 목사로 한정되어 묘사가 되면 실제 그 교회 목사에게 모독이 되지 않겠느냐, 설명을 했더니 알아듣겠다고 했다. 그만큼 우리는 이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기에 비판적인 상상력이 많이 약화될 수 있음을 새삼 느꼈다.)

영화 속의 경찰청장은 그저 무식하고 편협한 사람으로만 묘사된다. 국민영화라 칭송을 받은 <7번방의 비밀>에서도 유승룡이 사형을 받게 되는 이유는 그가 경찰청장의 딸을 죽였다는 오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영화 속의 경찰청장의 딸이 유치원생? 청장은 군인으로 치면 참모총장에 해당하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단 한 사람인데, 그의 딸이 유치원생이라면 상식선에서 그의 아빠는 30대 중반, 혹은 후반의 나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경찰청장은 늘 무식한 권력의 남용자이다, 유승룡을 마구 때린다. 너무나 획일적인 시각이다. 그 안에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마음껏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감독의 자리가 폭군의 자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경찰청장과 대통령을 적으로 삼고 빌딩을 폭파하고 그 빌딩이 국회 의사당으로 쓰러지는 그림을 보여준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의 테러가 어떤 의미를 획득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그 보다 방송국의 위선적인 권력에 대해 반기를 드는 것으로 영화가 진행되었다면 나는 더 박수를 쳤을 것이다. 이경영의 기회주의적인 태도와 시청률을 얼마 찍으면 바로 승진이 되는 그런 방송의 메카니즘에 반기를 든 테러로 각색을 했다면 정말 새로운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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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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