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우 유 씨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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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의 진실과 허구

<나우 유 씨 미>(루이스 리터리어, 범죄/스릴러, 12, 2013)

 

인간의 정보 중에 시각을 통해 얻는 것이 가장  많다. 물론 시각장애인들의 경우는 예외다. 그들은 청각과 촉각으로 때로는 느낌이 시각을 대신한다. 정보의 양에만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시각은 특별히 정보의 질, 진실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은폐된 것은 봄으로써 진실이 드러난다. 정보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기 위해서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비교하여 보면 된다. 실제 작용이야 뇌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시각은 단편적이고 흩어져 있는 정보를 종합하여 판단할 수 있게 정리한다. 백문이 불여일견(백 번 들어도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이라는 말이 있듯이, 시각은 그 어떤 감각이 주는 경험보다 강력하다. 자고이래로 보는 것은 지혜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선견자란 표현도 있거니와 남들이 쉽게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자를 지혜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다 진실은 아니다. 나타나 있어 볼 수는 있지만 그럴듯하게 포장해 눈속임하는 것도 있어서 제대로 보는 것이 관건이다. 철학자 니체는 제대로 보기 위해선 스승을 통해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보는 것과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말이다. 볼 수 있다고 모두 긍정하지 말고 때로는 보인다고 해도 부정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시각은 가장 많은 정보를 소통하는 통로이지만 또한 다른 기관에 비해 가장 잘 속기도하기 때문이다. 착각하기도 한다.

이처럼 비교적 쉽게 정보를 유통하며 또 잘 속고 착각하는 시지각의 속성을 이용하여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그것으로 돈을 벌기도 하는 직업이 마술이다. 마술은 사람들의 믿음을 이용하는데, 다시 말해서 마술사는 모두가 보고 있다고 믿는 것을 마술의 기술을 통해 속임으로써 기술의 경지를 보여주고, 관객들은 속았다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놀라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속이는 기술에 감탄하며 즐거움을 누린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마술은 주술적인 것으로 이해되어 기독교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눈속임을 통해 신비의 세계를 현상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마술사 혹은 그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사람의 권위를 높이는 수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술 초기의 역사를 살펴보면, 마술은 주로 제사장의 주술적 도구로 사용되었고, 19세기 중반 이후에 가서야 하나의 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마술의 핵심은 마술사를 주목하여 보도록 하면서 동시에 다른 것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마술이 하나의 쇼로 자리매김 된 데에는 종교에서 주술적인 의미가 점점 사라지는 것과 맞물려 있다. 주술적인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에 아이들의 즐거움을 위해 그리고 그것으로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 교회에서도 종종 마술 공연을 하는 것이다. 속이는 행위 자체가 갖는 부정적 의미 때문에 거부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지만, 마술은 속고 속인다는 것을 전제하고 전개되는 오락이며 일종의 게임이다. 잘 속이고 또 제대로 속는 관계에서 재미가 증폭된다. 굳이 예전의 주술적인 의미에서 사용하였기에 거부했던 태도를 재현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서두가 길어졌다. <나우 유 씨 미>는 마술을 소재로 삼아 만들어졌다. <도둑들>이 도둑의 기술을 보여주는 것을 관건으로 하듯이, <나우 유 씨 미>는 마술 사기단의 활약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두 영화가 복수를 주제로 삼고 있는 것도 동일하다. 순수하게 마술이 아닌 것은 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하면서도 실제로 돈을 훔쳤기 때문이다. 믿음을 전제로 하는 일이기에 사기다. 마술과 사기의 기술이 융합된 형태를 보여준다. 보기에 따라서 기존에 보여주었던 마술의 형식과 전혀 다른 스케일로 여겨지지만, 사실 규모만 커졌을 뿐이지 사실은 마술의 기본원리와 사기를 위한 기술이 합쳐진 것이다. 단지 마술과 사기의 조합만이 아니라 사회 정의에 대한 메시지도 담고 있다.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으로 서민들의 돈을 빼앗아 자신의 재산을 증식했던 부자에 대한 사기행각이나, 특히 은행을 터는 행위는 최근 글로벌 차원에서 일어나는 금융자본의 폭력과 횡포에 대한 보복으로도 느껴져 정말 통쾌하다.

나우 유 씨 미란 마술사가 마술을 보이기 직전에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집중하게 할 때 쓰는 말이다. 마술의 순간은 바로 이 말과 함께 일어난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일종의 주문과 같은데, 관객의 시선을 자신 혹은 특정한 부위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관객의 시선 밖에서 행해지는 속임수에 주목하지 못하게 한다.

세상은 수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며 보라고 한다. 놀라운 것, 신기한 것, 즐거움을 주는 것, 자극적인 것 등을 제시한다. 그러나 과연 보고 즐거움을 누리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보여주면서 각종 형태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보여주면서 유혹하고, 보여주면서 넘어뜨린다. 보여주는 것은 단지 시선을 끌기 위한 전략일 뿐, 보이는 것 때문에 우리가 정신을 놓고 있을 때 그들의 계획이 우리 앞에 실행된다. 보인다고 다 보려고 하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분별해야 한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때때로 현실 앞에서 과감하게 눈을 감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보이는 세계의 이면이 어떠하고,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세상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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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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