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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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과 수직의 미학

<일대종사>(왕가위, 무협/액션, 12, 2013)

 

영화 제목 일대종사는 한 시대에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우러러 보는 스승을 두고 일컫는 말로 영춘권의 고수였던 엽문을 가리킨다. 그는 무술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배우로서도 크게 성공했던 이소룡의 스승으로 유명하다. 그간 엽문의 생애를 다룬 네 편의 영화들은 주로 무술과 항일투쟁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왕가위 감독은 9년 동안의 작업 끝에 자신만의 스타일로 무술인 엽문의 삶을 재구성했는데 전혀 새로운 느낌의 해석이다. 액션의 화려함보다는 무술의 철학을 표현하는 데에 더 큰 심혈을 기울인 것 같다. 실제로 그는 한 인터뷰에서 단순한 무술이 아닌 철학과 인간의 관계, 인간의 이치가 있는 무협의 세계를 다루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다. 엽문 자신을 신비화하기보다는 엽문을 통해 중국정신을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쉬운 점은 몽환적인 분위기의 영상과 잘 이어지지 않는 스토리 그리고 인물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 대중적이지 못한 것과 1930~1950년대에 일제 침략기와 중국 공산당이 지배하던 시절에 대륙과 홍콩에서 일어났던 복잡한 상황 전개, 그리고 엽문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는 영화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왕가위 특유의 스타일이 녹아 있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특히 초고속 카메라를 통해 빗방울의 움직임까지도 포착한 세밀한 표현은 영상미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는데, 영화를 보고 있어도 예술을 감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다. 왕가위 감독의 작품이 늘 그렇지만 관객들이 편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평과 수직의 미학

 

영화의 화두는 영화를 열고 닫는 장면에서 엽문의 독백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무술은 두 단어로 말할 수 있다. 수평과 수직, 최후에 수직으로 서있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영화의 의미를 암시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하기에 질문이 생긴다. 과연 최후에 수직으로 서있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영화이해로 들어가기 전에 수평과 수직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먼저 생각해보자.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직립보행이다. 수평인 땅을 두발로 딛고 설 수 있다. 서있는 것은 수평이 있기 때문이며, 수평 없이 서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직 상태로 살 수 있게 됨으로써 많은 것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 손을 자유롭게 쓰게 된 것인데, 이 때문에 도구 제작이 가능해졌고 또한 뇌가 급속도록 발달했다. 결과적으로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하였다. 용량이 더욱 커지고 또 발달된 뇌 때문에 호모 사피엔스는 비록 다른 동물에 비해 그렇게 강한 존재는 못 되어도 생태계상 최고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에게 서있다는 사실은 진화의 결과이자 인류 역사에 커다란 진보이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간은 평생 수직 상태로만 살아갈 수 없다. 때때로 수평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수평 상태는 심장을 포함한 내장기관과 다리 관절의 회복을 돕는다. 그래서 잠을 잘 때나 병들었을 때는 몸을 수평상태로 놓는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구부정해져 수직 상태가 무너지게 되는데, 죽음은 영원히 수평 상태가 되는 것이다. 좋은 묏자리를 찾는 지관들은 관의 방향과 평형상태를 매우 중시한다. 결코 세워놓지 않으며 기울어지지 않도록 한다. 가장 편안한 자세인 수평 상태로 땅에 묻힘으로써 인간은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전체적으로 보아 인간의 삶은 수직과 수평의 조화로 이뤄져 있다. 건물은 수평과 수직의 비례관계에서 가능해지며, 수직과 수평을 중심으로 구성된 곳이 도시다. 그래서 도시인의 동선은 주로 직선이다. 오르고 내리고 걷는 길이 모두 직선이다. 자동차가 다니기 편하도록 길은 넓어졌고 또 직선이 되었다. 수평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블록으로 구분하였고, 제한된 수평 공간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기 위해 수직으로 올리면서 엘리베이터 사용이 일상화되었다. 오르고 내리는 모든 길이 수직이다. 농촌 역시 농기구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바둑판 모양의 직선으로 바뀌었지만, 예전에 우리의 생활공간은 주로 곡선이었으며 삶의 움직임은 수직보다는 주로 수평적이었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수직은 더욱 높아진다. 그러나 수평이 있어야 세워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수평에 대한 집착 또한 적지 않다. 인간의 삶은 대부분 수직 상태를 유지하나 수평의 필요성을 간과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수평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수평 상태에 결코 머물러 있지 않아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친다면 균형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몸에서 수평과 수직의 가장 조화로운 상태는 양반 혹은 요가자세로 앉는 것이다. 단전부위를 중심으로 하반부는 수평의 상태를 유지하고 상반부는 수직상태를 유지하는 상태이다. 몸의 건강을 위해서는 수평과 수직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마찬가지로 사람 관계에 있어서 수직과 수평의 비례가 적절할수록 세상은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 수평과 수직은 비례관계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배려가 잘 될 때 조화로운 세계 건설에 기여하게 된다.

 

영화 이야기와 영화 이해

 

왕가위 감독은 서있는 것의 의미를 다양한 인물과 그들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특히 빗줄기 가운데 열차 플랫폼에서 펼쳐지는 무술은 영화의 백미로 꼽힌다. 수직 상태로 내리는 빗줄기는 무술의 몸동작과 부딪히고 때로는 어울리면서 아름다움으로 거듭난다. 수직으로 내리는 비는 땅에 이르러 수평 상태가 되어 흐르고 그것은 다시 하늘로 증발되어 비가 되어 내릴 것이다. 수평과 수직의 반복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수평으로 달리는 열차를 배경으로 궁이와 마삼 두 사람이 최종적으로 서있는 자가 되기 위해 펼치는 무술 역시 말문이 막힐 정도로 묘한 기분을 일으킨다.

서있는 것의 의미를 성찰하면서 대조적인 캐릭터로 전면에 등장시킨 인물은 마삼이다. 그는 궁보삼의 후계자로 책봉된 인물인데 서있는 것을 단지 힘의 우위로만 생각했다. 자신의 실력을 과시할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해 안하무인이었다. 스승인 궁보삼은 마삼의 경박함을 엄히 책망하며 물리치고 대신 후계자의 자리를 엽문에게 물려준다. 고향으로 돌아간 궁보삼은 후에 마삼에게 마지막 고수를 가르치면서 그것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임을 말한다. 마삼이 중국을 침략한 일본으로 전향한 것은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서있는 것이라는 평소의 소신에 따른 결정이었다. 궁보삼의 가르침은 이런 마삼을 돌이키기 위해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삼은 스승의 경고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끝내는 스승을 살해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기세등등했던 그도 결국 궁보삼의 딸 궁이와의 싸움에서 수평으로 달리는 기차에 부딪혀 무너져 내린다.

궁이는 아버지로부터 64궁수를 전수받아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지만 정혼한 여성의 몸이기에 후계자로 택함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가 살해된 후에 그녀는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결혼과 여성으로서 살기를 포기하면서까지 복수를 맹세한다. 궁이에게 서있다 것의 의미는 아버지에게 전수받은 철학이다. 먼저 자신을 보고 천지를 보며 그리고 중생을 보는 것이었다. 무술의 깊은 뜻을 다 이루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무술의 의미는 단지 싸움의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세우되 천지의 뜻에 어그러지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중생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이라는 말이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세울 수 있을 때 비로소 중생을 세울 수 있다는 말이다. 궁이는 앞의 두 가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가능했으나 여성이기에 제자를 둘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혀 마지막 하나만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아쉬움 속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무술인으로서 엽문의 삶을 조명하는 왕가위의 의도는 비록 엽문이 비극적인 시대의 운명 때문에 인생의 사계절을 오롯이 살아내지는 못했어도 중생을 볼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있다. 끝까지 서있는 자로서 살았지만 실은 수평을 포용하는 무술의 최고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수직은 수평을 통해 존재 기반을 얻기 때문이다. 다분히 무술에 반영되어 있는 중국정신이 엽문에게 구현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의도를 읽어볼 수 있다. 다소 과장한 듯한 느낌을 받긴 해도, 무술을 통해 인생을 성찰하는 왕가위의 연출 능력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염문에게 서있다는 것은 인생에 어떤 역경과 시련이 온다 해도-잠시 동안의 수평상태는 있을지라도-결코 그것에 좌절하여 넘어지거나 머무르지 않고 수평과 수직의 조화로 이뤄지는 무술의 철학을 실현하는 것을 일컫는다.

 

엽문의 무술철학과 중국정신 곧 중화사상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수평과 수직의 미학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자. 몬드리안은 수직과 수평 그리고 삼원색을 사용해서 그림을 그렸다. 수직과 수평은 서로 대립되는 속성을 표현한다. 수직은 수평을 통해 존재 기반을 얻고, 없는 듯이 보이는 수평은 수직이 세워질 때 비로소 가치를 얻는다. 상반된 것들이 만남으로써 안락함과 평온함을 만들어내는데, 사람이 양반자세를 하고 앉아있을 때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안정된 느낌이다. 여기에 직선과 삼원색이 첨가됨으로써 수직과 수평은 더욱 다양한 정서를 이끌어낸다.

수직은 하늘을 향하고 수평은 땅을 향한다. 수직과 수평의 만남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수평과 수직의 조화가 일어나는 곳에 천지의 울림이 일어난다. 인간은 그 사이에서 살면서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며 또한 중생을 서로 돌아보는 것이다. 왕가위가 수평과 수직의 미학을 통해 엽문의 무술철학에서 중국정신, 곧 중화의 구현을 보고자 했던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독교적 영화보기

 

수평과 수직에 대한 영화적인 성찰에 관심이 가는 이유는, 비록 수평과 수직에 대한 직접적인 성찰은 아니라도,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말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3)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이스라엘의 잘못된 예를 따르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이다. 왕가위가 서있다는 것을 어떤 역경에도 무술이 함의 하고 있는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게, 성경은 어떤 시험이나 역경이 와도 은혜 안에 견고히 머물러 있는 것을 기의한다. 은혜 안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넘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나 혹시라도 넘어질 때가 있어도 다시 일어나 마침내 은혜 안에 안식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최후에 서있는 자가 되는 상태이다.(참고:4:1-13)

수직과 수평이 만들어내는 것 가운데 하나는 십자가다. 수평과 수직이 교차함으로써 십자가는 또 다른 의미를 생산하는데, 먼저 수직 관계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화해하고, 수평관계에서 인간은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에 덧붙여 말할 수 있다면, 십자가의 수직과 수평은 서로 교차할 뿐 결코 닫힌 공간을 만들어내지 않으며 사방으로 열린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수평과 수직의 만남이 닫힌 사각형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과 현격하게 대조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다 해도 결코 교회 안에 갇혀있지 않으며, 성도의 교제 가운데 있다 해도 결코 이웃을 배척하지 않음을 기의한다고 볼 수 있겠다.

현대 사회는 갖가지 종류의 선을 그어 서로를 구분하고, 수평과의 관계를 무시하고 오직 수직을 지향해 재력과 권력을 과시하는 경향이 일반화되어 있다. 차별과 편견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고, 존재보다는 지나칠 정도로 소유에 집착한다. 존재를 지향하는 사랑이 아가페라면 소유를 지향하는 삶은 에로스다. 다시 말해서 현대사회는 지나치게 에로스에 경도되어 있다. 이런 형국에서 기독교는 무엇보다 수평과 수직의 화해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존재를 지향하는 사랑이 편만해질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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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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