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테러 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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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비평 교육이 필요하다

<더 테러 라이브>(김병우, 스릴러, 15, 2013)

 

1976년에 제작된 <네트워크>(시드니 루멧)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자살에 대한 예고와 범죄 집단의 강도와 테러행위를 생방송으로 중계하는 미디어 업체의 계략을 다룬 영화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미디어 업체의 간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큰 충격을 준 작품이었다. 현재 이런 전략은 인기 개그 프로그램에서 코믹하게 풍자되고 있는데, “시청률의 제왕은 욕하면서 보는 막장 드라마가 시청률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를 인간 기관의 확장이라고 본다. 기능적인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는 세상을 보는 창이다. 특히 복잡한 사회구조에서 각자 자신의 역할과 생활공간에 제한되어 살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에게 미디어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SNS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심과 의존도에서 알 수 있듯이, 미디어 없는 삶은 고립된 섬과 같다. 물론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없지는 않다. 이웃과 마을이라는 개념으로 직접적인 소통에 의지하며 살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한 공동체를 형성한다고 해도 문명을 포기하기로 작정하지 않는다면, 미디어에 의존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미디어를 생각할 때는 항상 두 개의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미디어의 존재는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소통되고 공유되어야 할 무엇인가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정보들이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고 소통된다. 정보 자체가 소통의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점이다. 미디어는 단지 수단으로서 전달의 효율성을 높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미디어는 인간을 목적으로 삼는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고, 정보가 사람에게 전달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둘째, 미디어 기술 혁신과 미디어가 갖고 있는 힘의 배경에는 산업자본주의가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서 이윤추구와 미디어산업이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말이다. 미디어 기술의 혁신과 콘텐츠 개발은 정보전달이 아니라 눈에 들어올 만한 정보를 생산하면서 더 많은 시청자를 끌기 위한 목적을 가진다. 정보를 소통하는 것은 이윤을 높이는 수단이 된다.

이런 두 가지 사실로 인해 미디어는 하나의 문화이면서 또한 문화를 생산하는 주체가 된다. 대중문화란 원래 대중의 생명활동에서 비롯하고 또 대중의 생명을 풍성케 하는 목적을 갖고 생산되지만, 산업자본주의에 의해 추동되는 미디어는 주로 대중의 감각적이고 외면적인 욕구만을 충족시켜주는 문화로 전락한다. 그래서 미디어는 더 이상 인간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일이 잘 되고 있는가?”만을 묻는다. 수익을 올리는 데에만 관심을 가진다는 말이다.

최근에는 이런 두 가지 사실 외에 권력이 고려된다. ‘미디어 권력이란 말도 회자하고 있거니와 미디어를 장악한 권력이 현실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비록 논란이 많은 주제이긴 해도 미디어 권력은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다. 미디어 권력을 획득한 사람은 자신의 세력 유지와 행사에 필요한 정보만을 소통케 한다. 심지어 정보를 왜곡, 축소, 확대, 과장한다. 미디어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오직 권력에 의해 여과된 정보만을 접하기 때문에 미디어가 보여주고 또 그들이 보는 것이 현실이 된다. 다소 다른 맥락이긴 해도 테러 역시 하나의 미디어로 사용된다. 힘이 없는 사람이 불특정 다수를 향해 무차별 공격함으로써 자신에게 주목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미디어와 관련된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시청자다. 미디어를 통한 왜곡과 조작 때문에 진실을 보지 못하고 허구를 사실인 것처럼 간주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피해자요, 미디어 업체의 피해자요, 산업자본주의의 피해자가 된다. 이것이 현대인에게 특히 진실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미디어비평 교육이 절실한 가장 큰 이유이다.

<더 테러 라이브><네트워크><폰 부스>(조엘 슈마허, 2003) 등 기존 영화의 모티브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인데, 논지는 분명하나 내용 전개에 있어서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몇 개 있다. 비록 아쉽긴 해도 장르적인 느낌을 제대로 살려, 관객들에게 보는 기쁨을 제대로 안겨주었고 또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은 제대로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영화는 미디어를 매개로 사회 각층의 부조리한 면을 드러내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자주 회자되고 있지만 전혀 개선되지 않는 양극화 문제와 권력의 비도덕성 문제이다.

 

<더 테러 라이브>는 테러 현장을 생중계할 뿐만 아니라 테러범과의 인터뷰를 생중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테러 이유는 대통령의 사과를 받으려는 데에 있었다. , 정부가 수주한 공사에서 사망한 인부들에 대해 정부가 아무런 사과도 보상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한 사람이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며 테러를 행한 것이다. 다소 생뚱맞긴 해도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서로 다른 욕망들이 충돌하면서 사태는 전혀 예상치 못한 국면으로 전개되는데, 영화의 묘미는 바로 여기에서 느낄 수 있다.

<더 테러 라이브>는 앞서 다룬 내용을 모두 다루고 있다.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테러 현장을 생중계하기로 결정하는 것이나, 승진과 출세를 위한 기회로 삼는다거나, 시청률을 두고 경쟁하는 미디어 업체의 상대 방송국에 대해 보이는 전투적인 방송태도, 권력 기관은 자신의 입지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테러를 자행하는 것 등이다.

 

한편, 시각을 조금 달리해서 대통령의 사과 요구와 이에 대한 정치적인 반응을 살펴보자. 시민들이 죽고 건물이 폭파되는 상황에서도 대통령은 끝까지 사과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방적인 테러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려는 강경한 의지를 천명하였다. 그런데 테러사건이 종결되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방송을 통해 전해지는 대통령의 연설을 들어보면, 테러사건과 관련해서 자기 자신의 치적에 대한 홍보로 일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나라 안에서 어떤 일이 생기든지 모든 것을 자신의 공로와 연결 지으려는 행위는 시청률을 올릴 목적으로 테러를 생중계하려는 방송관련자들의 간지와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국민을 위한다는 말은 감언이설에 불과할 뿐, 사실 그들의 안중에 국민은 없고 단지 자신의 공로를 세우기 위한 방편으로 국민을 이용할 뿐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풍긴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 미디어의 상업자본주의적인 속성을 말하면서 정치권력을 함께 말한 까닭은 바로 사건을 보는 관점에서 동일하거나 유사한 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나 미디어나 사건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국민들이 어떤 희생을 당하는지도 관심이 없다. 그들은 단지 사건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길 생각만을 할 뿐이다.

감독으로서 짧은 경륜을 생각해볼 때 대단히 뛰어난 능력이 발휘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다양한 정치적인 메시지를 읽어볼 수 있으며, 무엇보다 미디어의 의미와 역할 그리고 미디어를 접하는 바른 태도를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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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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