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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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인 가족 이해: 식구(食口)

<고령화 가족>(송해성, 드라마, 15, 2013)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 가운데 하나는 질문한다는 사실이다. 특히 자의식, 곧 인간이 인간 자신을 생각하고 또 묻는 일은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일정 시기(대개 사춘기)가 지나야 나타나는 현상이다. 추상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것이라 대개 교육을 통해 나타나며, 인류 역사의 발전을 위해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매우 발전적이고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대체로 부정적인 경험을 매개로 제기된다는 점에서 다소 부정적인 결과를 감수해야만 한다. 예컨대, 누군가가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항상 그렇지는 않아도 대체로 인간에 대한 회의나 부정적인 경험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질문 자체로 끝날 수 있다 해도,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에 대한 한계를 확인하거나 비판적인 대답을 얻는다. 심하면 인간 사회에서 제거하려고(복수의 살인) 한다.

인간이 인간을 물음으로써 인간을 정의하려는 시도가 나타났지만 지금까지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지는 못했다. 오히려 정의함으로써 인간 상호간의 갈등의 골만 더욱 깊어진 것 같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인간을 일정한 원리에 따라 규정함으로써 인간이 나아갈 방향을 잡고 또 그것을 모범과 이상으로 삼았지만, 그렇지 않은 인간을 비판하거나 배제하려는 의도도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인간의 본질을 묻게 된다면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앞서 말했는데, 인간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다양하고 복잡한 양태 때문에 인간은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그의 행동과 말을 관찰하고 기술할 수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을 정의하기보다 단지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기를 힘써야 할 것 같다는 확신이 강해진다. 어떤 인간이 인간 이해에서 배제되거나 또 어떤 특정한 유형만을 가리켜 인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권 사상에서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인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설령 인간답지 않은 행동을 했어도 그렇다. 왜냐하면 인간은 행위나 말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인간을 이해함에 있어서 정의하기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성경이 인간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닌 존재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는 존재이고, 하나님이 당신의 권한을 위임하신 존재이다. 하나님의 보호와 양육 아래 살도록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길 기대하며 하나님을 소망하며 사는 존재다. 이것이 성경이 정의하고 있는 인간이다. 성경이 존재하는 한, 이 정의는 결코 포기되지 않는다. 성경의 정의가 인간 모두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비록 이 정의에 부합하지 않은 인간이라도 성경은 결코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더 이상 인간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게 되었어도 그런 존재를 용서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인간의 정의에 합당치 않은 그들을 여전히 인간으로 받아주신 것이다. 인간 이해의 모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이런 인간 이해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가족에 대한 이해 역시 비슷하다. 가족은 성경적인 개념이며 또한 사회제도로서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성경이 기술하는 가족은 그렇게 이상적이지만은 않다. 서로 죽이고 서로 욕을 보이는 등, 가족의 이상적인 이미지에 결코 부합되지 않는 모습이다. 다문화 가족, 근친상간 가족,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원수 관계에서 사는 가족 등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특이한 점은, 성경은 가족을 말하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구약은 가족의 본질을 묻기 보다는 가족의 삶을 기술하고 그들을 구원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내비친다. 물론 신약은 구약과 달리 가족 구성원 상호간의 관계를 말하면서 가족이 서로에 대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지시한다. 이 때문에 나타나는 질문은 이렇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족이 아닐까? 서로가 서로를 미워한다면 가족이 아닐까? 어떤 이유에서든 가족다운 모습으로 살지 못한다면 가족이 아닐까? 이 질문은 가족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고민이 되는 점이다. 실제로 많은 교인들은 이런 갈등을 겪으며 고민하고 있다. 성경이 지시하는 대로 그렇게 살지 못하는 가족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질문과 관련해서 볼 때, 영화 <고령화 가족>은 여러모로 전혀 가족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으로 가득하다. 다소 극단적이긴 해도 앞에서 했던 고민의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서로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가 없다. 그저 같은 호적에 이름을 올린 자식으로서 엄마의 집에서 기거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 성경에서 말하는 가족이라고 볼 수 없다. 가족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며 단지 가족의 울타리 안에 살아가는 우여곡절의 삶을 단지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영화는 실제로 그렇게 한다.

현대 사회에서 가족에 대한 이해는 인간 이해만큼 다양하고 또 복잡해졌다. 복잡한 인간 이해와 가족이라는 변수가 서로 만나 상호작용함으로 더욱 다층화 되고 복잡해졌다. 혈연 사회의 대표적인 형태로서 가족은 현상적으로 관찰될 뿐 정의내리기가 쉽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에 대한 이해를 포기할 수는 없다. 가족은 성경적인 개념이면서 다른 사회제도와 확연히 구분되는 무엇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좋지 아니한가>, <가족의 탄생>, <가족>, <지금 이대로가 좋아>, <완득이>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형태로든 가족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고령화 가족>은 이런 현상적인 맥락 가운데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도 서로 부대끼며 가족으로서 살아가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보여주는 <가족의 탄생>과 콩가루 가족을 다루면서도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의미를 그린 <좋지 아니한가>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 꽤 많다.

<고령화 가족>은 천명관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것인데, 제한된 상영시간을 포함해서 영화적인 재현이 갖는 특수성 때문에 소설 속 캐릭터들이 갖고 있는 디테일한 느낌을 오롯이 표현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소설의 상상력과 느낌을 기대하고 본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과 무관하게 영화로만 감상한다면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덕분에 살아나는 독특한 캐릭터들이 좌충우돌하는 가족의 생동감 있는 모습을 실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장면 장면이 에피소드로만 제시되어 있고 서로 연결되지 못한 부분은 아쉬운 부분이다.

영화는 전통적인 이해를 통해서는 결코 정의할 수 없는 현대 한국사회에서의 가족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을 묻는다. 그러나 가족을 정의하려하기보다 전통적인 이해인 식구(함께 밥 먹는 사람)”를 영상으로 재현하면서 관객을 설득하려고 한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는 한국 사회에서 가족의 현실을 기술하면서 가족이 무엇이어야 함을 말하기보다 가족이 어떠할 수도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관건은 그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하는 것이겠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이미 부모로부터 독립할 나이에서 한참이나 지난 자식들이 낡은 아파트에서 홀로 살아가는 엄마 집으로 모여든다. 큰아들은 교도소를 드나드는 한량으로 엄마의 집을 가장 편하게 생각하고, 영화감독인 둘째는 부인이 바람을 피워 이혼 직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입봉작에서 참패한 후에 집세마저 낼 돈이 없어 쫓겨나 엄마의 집에 안착한다. 이혼 경력이 있고 중학생 딸을 둔 셋째는 바람을 피우다 남편에게 얻어맞고는 도저히 못살겠다며 엄마의 집으로 온다.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은 가족이라는 끈이 오히려 부담스럽게 느끼게 할 정도다. 위아래 구분도 없이 서로 반말과 욕설을 섞어 쓰는 모습은 그야말로 콩가루 가족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엄밀히 말해서 그들은 서로 피를 나눈 형제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각각 다른 아버지와 엄마를 두고 있다. 첫째는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고, 셋째는 다른 남자와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며, 둘째만이 아버지와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묶어주는 힘은 오직 엄마에게 있다. 그밖에 이들이 가족이라고 볼 수 있는 유일한 점은 위기의 상황에서 서로 힘을 합쳐 극복하는 모습이다. 이런 가운데 영화는 가족이란 굳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한 밥상에서 함께 밥을 먹는 사람으로 이해한다. 적어도 그렇게 되길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 그것이 가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식사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복잡한 관계 속에서 서로 얽혀있는 현대사회의 가족을 이해하는 단서로 식구, 곧 함께 밥을 먹는 관계는 과연 정당할까? 사실 현재 한국의 가족은 함께 밥을 먹는 시간조차도 얻기 어렵다. 특히 맞벌이 부부와 자녀들의 입시위주로 이뤄지는 삶의 궤도에서 가족이 함께 밥 먹는 일은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식구라는 것도 가족을 이해하는 데에 결코 적합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단지 식구의 모습으로서 가족의 단면만을 보여줄 뿐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에 대한 정의가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가족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상황이, 만일 사회학적인 탐구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대개 부정적인 경험 때문이거나 가족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 혹은 의미를 찾기 위해서 몸부림칠 때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 둘째가 그랬다. 가족 중에 유일한 대학출신인 둘째의 시점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가족을 끊임없이 회의하게 만드는 모습으로 가득하다.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가족의 정체성을 찾는 경우도 많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가족을 정의함으로써 가족이라고 볼 수 없는 부분을 제거해보려고 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이뤄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의하는 태도로 가족을 보려 한다면 제대로 남아 있는 가족이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가족해체 현상의 배후를 들추어보면 가족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부부간에도 다르고 자녀들이 생각하는 가족의 이해도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하려는 태도로 가족을 접근해간다면, 그 끝에는 가족의 해체만이 있을 뿐이다. 마침내 가족 간의 좌충우돌 끝에 이것을 깨달은 둘째는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자의식에 대한 변화로 가족 이해가 바뀌고 그의 현실 이해도 바뀐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가족의 정체성을 묻는 태도에서 가족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현실의 의미를 묻는 태도에서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바뀌었다.

 

<고령화 가족>이 현대 한국사회의 가족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가족을 애써 정의하려 하지 말고, 어떠한 모습으로 있든 먼저 가족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가능한 삶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특히 위기의 순간에 서로 힘을 합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그리고 때로는 콩가루 가족이라 여겨질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한 밥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할 일로 여길 일임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서로 다른 피를 가진 구성원이라도 엄마의 집에서 같은 밥상에 둘러 앉아 맘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는 가족이니까.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오늘날 공동체로서 교회와 믿음으로 형제자매가 된 교인의 이해에 매우 유익한 도움을 준다.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 다른 문화적인 배경을 가진 성도들은 한 형제자매로 부름을 받아 모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우리의 이해에 따라 성급하게 교회와 교인을 정의하려는 태도를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정의 후에 보이는 태도는 백이면 백 교회비판이다. 우리 역시 그 안에 속한 존재로서 교회 비판은 결과적으로 누워 침 뱉는 일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령의 사역이 이뤄지는 곳이다. 교회를 새롭게 정의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편재한 부정적인 현실을 접한다 하더라도 교회를 비판하며 배제하기보다 어떤 모습이라도 먼저 교회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린도 교회를 대하는 바울이 그랬다. 그는 아무리 문제가 많다고 해서 교회를 배제하지 않았다. 교회를 유기체로 새롭게 정의하면서 교회를 다시금 세우는 데에 전념하였다. 교인들이 아무리 다른 구성원이라 하더라도 성령은 우리를 유기적인 기능을 갖는 하나로 만드셨다. 비록 교회다운 모습이 못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생명을 영위하며 우리 자신을 발견할 뿐이며, 새롭게 정의한다고 해도 배제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아무리 이질적이라도 성령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아 서로를 용납하며 협력하며 살고 또 그렇게 살기를 배우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 안에 복음 곧 진리가 살아있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알곡과 가라지는 함께 자라도록 되어 있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하나됨은 이미 성령께서 이루신 일이기 때문에 고백하며 나아가고 또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선물로 경험하는 것이지, 우리가 먼저 하나된 상태를 확인한 후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교회가 어떠한 모습이든 부정하지 말고, 새롭게 정의를 내린 후에 해체하려하지 말고, 먼저 교회를 교회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교회를 재정의하는 상황이 온다 해도 배제하는 일은 결단코 없어야 할 것이다. 흔히 종교개혁 운운하면서 비판적으로 정의하려고 하는데, 루터 역시 처음부터 교회를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교회 개혁은 교회를 교회로서 인정한 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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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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