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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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인간은 얼마나 비참한가

<피에타>(김기덕, 드라마, 18세, 2012)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악한 것들에게서 자극을 받아서 하나님의 선한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네스 칼빈의 “기독교강요” 중에서)

 


 

 

아, 인간은 얼마나 비참한가

<피에타>(김기덕, 드라마, 18세, 2012)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악한 것들에게서 자극을 받아서 하나님의 선한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네스 칼빈의 “기독교강요” 중에서)

(스포일러 있음)

김기덕 감독과 기독교적 영화보기

사회성이 강한 영화를 볼 때마다 가슴에 와 닿는 질문이 있다. 비록 폭력과 섹스 그리고 각종 형태의 범죄로 범벅이 되어 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인간 본성의 사악함을 보게 되는데, 이런 영화가 신앙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영화를 안 보면 그만이지만, 사실 영화가 사회문화적인 갖는 의미를 생각하면 무조건 거부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게다가 세계 영화제에서 좋은 영화로 평가된다면 고민은 더욱 가중되고, 특히 종교적인 성격이나 메시지가 강하다면 고민을 넘어 혼란스러워진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Antichrist> 등 서구의 많은 유명 감독의 작품이 있고, 우리나라의 경우엔 김기덕 감독이 대표적일 것이다. 사실 이런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기독교와 영화의 관계에 대해 신학적인 성찰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절실하게 느낀다. 필자는 이미 몇 권의 저서에서 ‘기독교적 영화보기’라는 컨셉으로 다양한 영화보기를 위한 생각들을 정리해왔다. 최근에는 “기독교와 영화”(고양: 도서출판 자우터, 2012)라는 제목의 글로 출판되었다. 참고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영화는 믿음을 전제하고 보면 일반계시적인 의미를 갖고, 신앙인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사회의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교회가 어디에다 공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할지를 환기한다. 일반계시라 함은 성경이 아닌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당신을 나타내신다는 뜻인데, 영화를 통해서 신앙인은 하나님의 행위와 그의 뜻과 속성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믿음을 전제한 기독교적인 영화이해의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편, 기독교적으로 영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실질적으로 하나님 인식으로 결실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 인식이-비록 하나님이 스스로 나타나신다 해도-모두에게 열려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어도 모두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참 하나님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은 “숨어계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으로 이런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식의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환기할 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영화보기를 통해서 이뤄지는 하나님 인식은 인간 인식을 통해 혹은 보이는 것들(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보증될 때 가능하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첫 부분에서 인간의 참된 지혜는 두 개의 인식, 곧 하나님 인식과 인간 인식으로 이뤄졌으며, 양자는 끈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연결되어 있다 함은 인간 인식이 하나님 인식으로 이어지고, 하나님 인식이 인간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필자의 논지에 따르면, 양자 사이에는 유비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대립적인, 그래서 비판을 통해서만 조명되는 관계가 있다. 즉, 인간 인식은 유비와 비판적인 사고를 거쳐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 지를 밝혀주고, 하나님 인식은 유비와 비판적인 사고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조명해준다. 그러므로 인간의 선한 혹은 악한 본성을 다룬 영화를 본다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을 이해하는 한 방식이기도 하다.

화제의 작품 <피에타>를 소개하면서 비교적 긴 서두를 앞세운 까닭은, 무엇보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이 기독교인이 접하기 쉽지 않은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어서 기독교인들이 김기덕 감독과 그의 작품에 대한 편견을 벗어버릴 때 비로소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한국영화계에서 비주류로 인지되고 있는 그의 영화는 이해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오해와 편견에 시달렸다. 그 이유는 그의 영화가 한국영화적인 흐름에 잘 부합되지 않고, 비록 소재가 성경이나 기독교 전통에서 유래하고 또 주제의식이 매우 기독교적이라 해도, 그것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독창적이면서 때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성경 혹은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섹스를 다루는 방식과 여성을 왜곡하는 듯한 표현에 있어서 특히 그렇다. <사마리아>, <빈집>, <나쁜 남자>, <섬>이 대표적이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사악하고 선한-본성을 드러내면서 구원을 말하는 데에 전념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앞서 언급한 바, 만일 인간 인식을 매개로 하나님 인식에 이를 수 있다면, 김기덕 감독의 작품에 대한 기독교적인 해석 또한 가능하다고 본다. 실재의 세계든 이미지의 세계든 보이는 모든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관계에서 일종의 거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과거 필자는 모 기독교 대학에서 영화에 대한 강의를 할 때, 학생들로 하여금 김기덕 감독의 작품을 소개하고 보게 했다는 이유로 주의를 받아야 했는데, 폐강을 위협받을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당시 필자는 시간강사로서 이의를 제기할 만한 상황이 아니어서 다음 강의부터는 더 이상 김기덕 감독의 작품을 감상 과제로 제시하지 않고 또 소개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함으로써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아마도 강의를 들은 일부 학생의 투서로 이뤄진 해프닝으로 생각하지만, 학교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방식에서 영화예술에 대한 기독교 대학의 편협한 시각을 엿볼 수 있었다.

여하튼 김기덕 감독의 작품은 일부 혹은 다수의 기독교인들에게 불쾌한 영화로 인식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를 기독교적으로 읽어내는 일은 가능할까? 다른 작품들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이곳에서는 <피에타>를 이해하는 일에 집중하고자 한다.

2012년도 제69회 베니스 영화제에 경쟁부분에 출품되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작품 <피에타>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서 어떤 반응을 얻게 될까? 무엇보다 제목에서부터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으로 여겨질 정도인데,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영화로 제작된 것은 아니다. 이미지를 차용해 왔을 뿐이다.

필자가 이해하는 한, 이 영화가 무엇보다 미학적으로 훌륭한 점은 인간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은 물론이고 다양한 성찰을 할 수 있는 내러티브라는 데에 있다. 한국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을 비판적으로 그리고 다각도로 조명하면서도 인간의 비참함, 엄마의 존재 의미, 복수, 그리고 용서와 속죄의 문제 등을 거론하고 있다. 또한 양육하고 보호하는 ‘엄마’를 상실한 채 자기 스스로 능력을 입증하고 또 스스로를 보호하며 살아야만 하는 현대인의 숙명적인 환경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런 주제의식만으로도 충분하지만, <피에타>가 기독교인의 특별한 관심을 끄는 까닭은, 영화 제목 자체가 14세기부터 유럽 기독교 예술에 사용된 모티브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의 소재로 많이 사용된 “피에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슬픔과 비탄,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와 인고의 숭고함을 표현하고 있다. 베드로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대표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이 마리아의 무릎 위에 가로로 길게 누워 있는 모습이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이외에도 “피에타”는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어 전승되었다.

물론 이전의 작품에서도 그렇지만 김기덕 감독은 기독교 이미지를 차용하면서도 기독교적인 맥락을 파괴하고 또 자유롭고도 독창적으로 표현했다. “피에타”라는 소재를 사용하고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혹은-보기에 따라서-상반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또 다시 기독교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킬 원인으로 작용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먼저 이 문제부터 다뤄보도록 하자.

 

김기덕의 <피에타>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 포스터는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비슷한 구도이지만 엄마의 모습과 자세에서 다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서는 비탄한 심정을 갖고 시신을 내려다보면서도 왼손은 하늘을 향해 펼쳐지도록 해 기도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인간의 비통함과 경건을 함께 표현하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그야 말로 숭고의 미를 보여주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이다. 이와는 달리 김기덕 감독의 해석이 들어 있는 영화 포스터에서는 슬픔과 고통을 참는 듯,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애써 시신을 외면하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형태의 포스터를 통해서 관객은 아마도 “피에타”에서 나타난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관계와는 다른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그를 죽게 한 인류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듯한 “피에타”의 마리아와 달리 <피에타>의 엄마는 복수의 칼을 품은 여인의 모습이었다. 복수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을 형상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강도를 외면하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서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연민의 정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포스터에서는 물론이고 영화의 몇몇 장면에서도 나타나 있지만, 그녀의 무릎 위에 축 늘어진 강도를 안고 있는 모습은 강도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을 보여준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인류의 죄를 구속하는 인간의 죽음과 그의 죽음에 대한 어머니의 슬픔과 동시에 그녀의 인고의 숭고함을 보여주는 데에 반해, <피에타>를 통해 김기덕 감독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은 오직 심판주 신에게 귀속되어 있다) 신이 되고자 했지만 결코 신이 될 수 없었던 인간의 비참함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피에타>는 부조리한 상황에서 선한 삶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헝클어진 인생을 위한 애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학적으로 깊은 성찰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재개발의 그늘

단적으로 말해서 영화 <피에타>는 현대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과 인간의 비참한 숙명을 여과 없이 보여 준다. 채권 추심원의 일상과 그의 거친 삶의 이야기가 중심에 있다. 이명박 전 서울 시장이 청계천을 복원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과거에 그가 현대건설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이룬 개발의 신화를 반추하곤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환호했다. 도시개발 위주의 정치가들과 그 덕분에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안중에는 전혀 들어 있었을 것 같지 않은, 청계천 주변에서 삶의 터전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이었다. 청계천 지역은 유신 정권 시절인 70년대 한국의 기업 성장의 중추 역할을 담당하며 생동감이 넘쳤지만, 재개발 당시에는 대부분 주인이 아니라 세입자들로 가득한 지역이었고 죽음의 전조가 가득한 곳으로 전락하였다. 재개발 계획으로 일감이 줄고 생존을 위해 사채를 끌어다 쓰면서 빚을 제때에 갚지 못한 영세업자들은 악덕 사채업자들에게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 살아야 했다. 신체포기 각서는 물론이고 모욕을 견디다 못해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었다. 감독 스스로가 밝힌 바 있지만, 영화는 재개발 계획에서 비롯한 악순환, 곧 돈 때문에 꼬인, 혹은 돈을 매개로 엮인 인간관계의 악순환에서 인간이 얼마나 비참해지고 또 인간의 사악한 본성이 어떻게 촉발되고 또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인간관계가 어떻게 파멸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고 자본주의적인 극단적인 탐욕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인간의 비참함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대부분 그렇지만, 그런 인간들을 악순환의 고리에서 건져내는 구원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엄마=구원자, 구원자와의 만남=삶의 변화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강도(이정진 분)는 태어나자마자 병원에서 버려진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부모가 누구인지는 물론이고 자신의 생일조차도 모른다. 혹시 그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있었을까? 식탁 옆에 붙여진 반라 여성의 그림을 과녁으로 삼아 칼을 던졌던 것으로 보아 그가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의 삶은 일종의 자신을 버린 엄마에 대한 복수 그 자체였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엄마(조민수 분)라는 여자가 나타난다. 강도가 그렇게 잔혹한 사람이 된 것이 자식을 버리고 떠난 자기 탓이라고 말하며 용서를 구한다. 난데없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뜬금없이 엄마로 자처하는 여자를 강도는 배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끈질긴 그녀의 출현과 강도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엄마임을 주장하는 태도 때문에 강도는 그녀를 엄마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 후로 강도는 이전과 전혀 다른 일상은 물론이고 엄마와 함께 하는 삶을 통해 새로운 삶의 경험들을 하게 된다. 엄마와 함께 살면서 강도는 생의 밝은 면을 보게 되고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찾아가는 듯 했다. 엄마와의 관계가 갑작스러워 어색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지만, 연기자들의 뛰어난 연기와 심리적인 갈등 관계를 압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연스런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런 장면을 통해 감독은 엄마의 현존이 그에게 구원이었음을 말하고 싶었던 같다. 그래서 이제는 엄마 없이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갑자기 사라질 것 같아 불안하다는 고민을 털어놓을 정도가 된다.

게다가 그동안 자신에게 당했던 사람들이 보복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이 때문에 엄마가 피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해 채권 추심원 생활도 그만둔다. 의존의 정도가 깊어진 것은 물론이고 구원자의 등장으로 변화된 삶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실제로 엄마에게 보복의 손길이 미치고, 마침내 엄마가 누군가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갔음을 알게 된다. 정신적인 지주를 잃게 된 강도는 극도로 예민한 상태에서 엄마를 찾아 그동안 자신이 해를 끼쳤던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 나선다. 혹시 그들이 보복의 차원에서 엄마를 납치해 갔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는 찾을 수 없었고, 오히려 강도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도 있었음을 확인한다.

이 장면 역시 감독의 계획적인 연출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구원자와의 관계에서 변화된 삶 가운데 본질적인 부분은 자신의 참 모습을 직면하는 것이다. 마치 구도자의 모습과도 같이 엄마를 찾는 과정에서 강도는 자기 행위의 결과를 볼 수 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자신이 그동안 어떤 일들을 해왔으며 또 어떤 존재임을 알게 된다. 끝으로 찾아간 곳, 즉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한, 자살을 했던 채무자의 힐체어에 앉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죽은 자들의 고통에 대해 강도가 깊이 공감하게 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복수와 속죄

강도는 어려서 버려진 후에 자신을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거친 삶을 살아오는 동안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삶 자체가 복수여서 채무자들에게 악마라고 불릴 정도가 되었지만, 30년 후에 나타난 엄마를 만난 후로는 선한 본성을 회복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강도의 잔혹한 채권추심을 못 견디고 자살했던 한 채무자의 엄마였다. 복수의 한 방편으로 엄마를 가장한 것이고, 자신의 잔혹한 행위의 결과들을 스스로 보게 함으로써,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가족이 죽는다는 사실이 어떤 것인지를 스스로 겪도록 해서 그로 하여금 그녀와 동일한 고통을 겪게 할 의도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강도는 스스로를 차에 매달아 놓고 달리는 트럭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 강도의 속죄하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했다고 생각하는데, <미션>(롤랑 조페, 1986)에서 속죄를 위해 짐을 잔뜩 지고 고행길에 나섰던 멘도자(로버트 드 니로 분)를 생각나게 한다. 익스트림 롱샷으로 피를 흘리며 달리는 트럭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김기덕 감독은 아마도 두 사람을 향해 외쳤을 것 같다. “하나님이여, 자비를 베푸소서!” 아들을 잃은 슬픔과 비탄에 잠긴 엄마가 아니라 스스로를 복수의 한 방편으로 이용한 엄마에 대해, 그리고 엄마로 인해 선한 본성을 회복해 갔던 강도의 참회에 대해.

감독을 포함한 관객들이 그들에 대해 긍휼을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사실 그들의 행위로 인해 결과야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지으신 모든 것에 대해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시편145편 9절)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인간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

 

비참한 인간을 위한 애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수많은 평론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회자하는 마지막 장면이다. 비록 과거에는 어떤 모습으로 살았다 해도 강도는 누가 보더라도 많은 부분에서 회복된 상태였다. 엄마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기꺼이 죽을 수도 있었다. 그에게 엄마 없는 세월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또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망가진 인생을 살아가야 했다는 사실을 심정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엄마만은 살려달라고,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강도의 모습은 신을 향한 참회의 기도와 다르지 않다. 바로 이런 모습을 내려다 바라보는 엄마는 신의 위치에 있다. 아니, 강도에겐 자신의 진면목을 보게 하고 또 회심을 가능하게 만들어 변화된 삶을 살게 했기에 그녀는 구원자였다. 강도자에게 구원자로 등장한 그녀는 신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강도의 기도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내칠 수도 있다. 비록 진짜 엄마는 아니었어도 엄마로 인정되어 살면서, 그녀는 강도의 변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한 모습의 강도를 보고 불쌍하다고 여기고 또 슬퍼할 정도로 연민이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왜 복수의 카드를 다 써버린 것이었을까? 왜 자비와 긍휼의 신으로서 남지 못했을까? 물론 그녀가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아도 강도에 대해 보복하기 위해 달려든 피해자의 엄마가 그녀를 밀어버릴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상황을 직접 볼 수 없었던 강도에게는 어떤 상황이 전개되든 동일한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질문은 그녀에게가 아니라 감독에게 향해진다. 왜 그랬을까? 왜 강도를 향한 긍휼의 마음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도록 연출하지 않았을까? 왜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을 선택했을까? 단적으로 말해 감독은 그녀를 신으로 만들 수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을 거부했다. 대신에 그녀를 끝까지 억울하게 죽은 자의 엄마로서, 한 인간으로서 남겨놓았다. 인간 곧 복수의 열정에 사로잡힌 인간으로 남겨놓은 것이다. 그녀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의 기도를 들어줄 수가 없었고 자신을 던짐으로써 복수를 마무리 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말이 나올 수 있었을까? 아마도 감독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피에타’, 곧 “하나님이여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기도가 아니었을까? 이런 점에서 <피에타>는 인간의 비참한 숙명을 위한 애가이다.

 

비판적인 성찰과 교회에 주는 교훈

첫째, 인간의 신격화에 대해 경고한다.

가상적인 존재가 구원자로 등장하는 점에서 그렇지만, 또한 그러한 가상이 신이 아니라 인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연출하면서, 김기덕 감독은 인간의 본질적인 숙명을 보여준다. 인간이 인간에게 신으로서 역할과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은 믿음을 떠난 인간의 비참한 운명의 한 측면이다. 현대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이런 현상은 많이 나타나고 있다. 목회자 혹은 특정한 인간을 신격화시키고, 그 안에서 평안과 안전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에 불과하다. 우상숭배의 위험은 인간이 섬기는 우상에 의해, 정확히 말해서 우상을 통해 권력과 명예와 돈을 얻으려는 또 다른 인간에 의해, 인간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둘째, 교회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환기한다.

칼빈은 교회를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라고 이해하였다. 천국으로 가는 여정에서 어머니로서 교회는 하나님의 주신 복에 따라서 성도들을 보호하고 양육하고 지킬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런데 만일 교회가 정작 돌보아야 할 성도들을 돌보지 않고 비복음적인 일에 전념함으로써 유기하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성도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인가? 영화에서 강도는 비록 똑 같은 모습은 아닐지라도 교회에 의해 돌봄을 받지 못하는 성도의 모습, 목자 없는 양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교회가 성도들을 본의 아니게 혹은 의도적으로 유기할 수 있듯이, 성도 역시 때때로 어머니인 교회를 비판하고 멀리할 수 있다. 엄마를 잃은 <피에타>에서 표현된 강도의 삶이 자연스런 혹은 당연한 현상은 아니지만, 교회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혹은 성도들의 타락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사실을 환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고 있듯이, 아무리 악한 자라도 엄마에게서 근원으로 회귀하는 가능성과 힘을 얻을 수 있었다면, 교회 역시 타락한 세상을 위한 희망으로서 자리매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가능성을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찾는다면 무모한 일일까? 교회가 우상으로 전락해서는 안 되고 또한 세상이 돌아가야만 할 곳은 하나님의 품이지만,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교회에게 어머니로서 자격과 권한을 위임하셨다. <피에타>는 “피에타”를 다분히 의도적으로 왜곡되게 해석함으로써 죄악으로 인해 극도로 비참해진 인간과 관련해서 오늘 우리가 서로에 대해 어떤 책임감을 갖고 살아야 할지를 반추하게 한다. 인간은 결코 신의 위치에서 용서를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용서는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세상에 나타내는 고백행위일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형제자매의 죄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타내는 일이기에 언제라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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