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학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디너 처치(Dinner Church): 신화 같은 실화의 낭만적 재현



안덕원 (횃불 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식구(食口)가 된다는 것

식구는 함께 살며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자리에서 동일한 음식을 나눈다는 사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정치적 함의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겠다. 하여 가족이 아닌 이들을 식구라고 표현할 때는 반드시 깊고 넓은 포용과 환대가 전제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식탁의 교제가 그러했다. 에드워드 폴리(Edward Foley)는 차별이 사라진 예수님과 손님들의 식사 자리를 회개와 용서가 뒤바뀌는 레위기 법의 전복이 일어나는 자리이며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거래되는 곳이자 이전의 언약에 대한 이해가 전복(turn inside out)되는 자리라고 말한다.¹ 죄인이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는 그 자리는 계층의 구분이 무너지는, 식구의 개념에 반전이 이루어진 신화적인 현장이었다.

초대교회 교우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식구에 대한 이해를 계승했음이 분명하다. 물론 보편적인 사례는 아닐지언정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유무상통의 삶은 서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는, 상식의 잣대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이상적인 가족공동체의 구체적 구현이었다. 오늘의 시선에서 보면 믿기 어려운 신화에 가까운 일이지만 분명히 실화였던 유토피아적 공동체, 식탁 공동체는 그렇게 역사 속에 분명히 실재했다.

디너처치의 존재가치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이 이렇게 쉽지 않은 일인데, 역사적으로 수많은 공동체들이 소위 경건과 식사의 신비롭고 복잡한 병치(倂置)를 시도해왔다. 디너 처치는 그 사례 가운데 가장 급진적이며 구체적이다. 함께 먹는 행위가 갖는 평등과 나눔의 가치는 값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이다. 음식은 곧 먹는 사람의 계급을 나타내는 상징이자 실체이기 때문이다.

중세시대의 빵을 예로 들어보자. 귀족들은 여러 차례의 도정을 통해 만들어진 흰색(에 가까운) 빵을 먹었고, 가난한 이들은 호밀이나 귀리로 만든 짙은 색깔의 빵을 먹었다. 당시 농민들은 부자들을 흰 빵을 먹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² 여담이지만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 자신이다”(You are what you eat)라는 표현이 중세에서 사용되었다면, 요즘처럼 건강을 위해 좋은 것을 섭취하라는 조언이 아니라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문장이었으리라는 조금은 서글픈 상상을 해본다.

이렇듯 결코 평등할 수 없는 먹는 일과 식구가 되는 것을 가장 고지식하게 목회와 예배에 적용한 공동체가 바로 디너 처치일 것이다. 필자는 디너 처치를 대하며 어떻게 교회에서 먹으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어?”라고 의아해하거나 그 발상의 신선함이나 발칙함으로 인해 놀라지 않았다. 외려 초대교회의 정신은 바로 식사에서 웅변적으로 드러나며, 그렇게 모였고, 먹었고, 나누었다는 사실을 대단히 직선적이고 낭만적으로 해석해 낸 그들의 접근 방식과 순수함에 놀랐다.³ 즉 디너 처치의 가치는 먹는 일의 공동체적 가치를 실제로 현대의 경직된예배 환경에서 용감하게 구현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예배가 건조한 형식과 절차가 아닌 일상의 나눔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몇몇 수도원이나 이머징 공동체에서 공동생활을 통해 식사를 함께 준비하고 먹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예배와 식사를 결합한 사례는 역사적으로도 찾기 쉽지 않다. 다만 앞서 서술했듯이 예루살렘과 고린도에서 신화적인 역사적 실체의 증거를 볼 수 있다. 디너처치는 현대교회가 놓친 환대와 평등의 가치를 실화로 빚어낸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디너 처치는 교회론에 신선한 안목을 제공한다. 교회는 정결한 희생제물을 바치는 신전(Temple)과는 달라야 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 와서 환영받고 회복되는 곳이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Domus Dei)이면서 사람들의 집(Domus Ecclesiae)이라는 이중적인 역할에 모두 충실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디너 처치는 예배에 집중된 교회의 기능에만 몰두하지 않고 그 본질적인 역할, 환대의 공간이라는 정체성을 상기시켜준다. 필자는 디너 처치들이 표방하는 교회론이 매우 건강하며 탄탄한 신학적 반성 위에 세워졌다고 평가한다.

디너 처치는 교회의 구태의연한 소통방식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다. 일방적 전달이 아닌 식탁의 교제를 통해 부드럽고 풍성한 쌍방소통이 이루어지고 공동의 관심사에 대한 신앙적 해석이 자연스럽고 폭넓게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질서한 모임이 될 것이라는 선입관을 내려놓고 전향적으로 시도해 봄 직하며 여러 가지 면에서 타산지석의 훌륭한 교보재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망과 제안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의 실천은 잉여 생산의 불가로 인한 공급의 한계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예상 가능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사유재산을 아무 조건 없이 나눈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함께 밥을 먹기는 하지만 누군가는 좋은 자리(트라이클리니움, triclinium 식탁이 있는 공간), 다른 이들은 그저 그런 자리(아트리움, artrium, 현관 홀이나 안뜰의 공간)에 앉아야 했을 것이고 음식이 모자라는 일도 생겼을 것이다. 계급의 구분이 없는 공간에서 공평하게 나누어 먹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참 쉽지 않은 일이다. 문제가 심각했는지 교회는 애찬 대신 성찬식을 예배 안으로 가져와 의례화했다. 불평등의 싹을 자르고 거룩한 식사의 나눔을 예배 속에서 나름 정돈하여 예전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왜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의 전통은 지속성을 갖지 못했을까? 성령의 임재로 인한 감격으로 가득했으나 그 이후를 책임져야 할 인간의 근본적인 욕심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했던 것이 아닐까? 인간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필자는 디너 처치가 고린도의 한계를 다시 반복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마음 한구석에 안고 있다. 인간의 근본적인 이기심과 죄성 때문이다. 친한 사람들끼리 먹고 마시는, 자기 식구들만의 이기적인 친교 모임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낭만적 기대가 서로의 한계를 피부로 느끼는 순간 실망으로 바뀌는 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우리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늘 신실하게 점검하며 더 넓은 포용과 더 깊은 사귐을 향한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면, 디너 처치가 대안적 공동체로써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필자가 살펴본 디너 처치들은 이 부분에 대한 신학적 토대가 굳건하며 겸손하다.

물론 디너 처치의 식사가 성례전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교회가 진지하고 치열한 논쟁 끝에 먹는다는 일을 성례전이라는 전통으로 정착시킨 이유는 분명하다. 언어와 상징을 통해 주님의 자기 주심이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 속에서 (로마 가톨릭의 경우 실제로 화학적으로 변한다고 하니 논외로 하자) 실화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주님의 살과 피가 일상에서 우리를 움직이는 신비, 빵과 포도주가 불러일으키는 감동과 반전의 살아있는 증거들이야말로 교회가 남긴 결코 약화되지 않는 전통의 힘이다. 함께 먹는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을 머금을 때 식탁은 비로소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줌으로써 가능한 궁극적인 나눔의 자리가 된다. 덧붙여 디너 처치는 교단적 배경도 다양하고 표방하는 가치도 대단히 포용적이지만 여전히 인종적, 계층적 다양성을 이루는 일이 쉽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꽤 많이 남았다는 의미다.

신화에서 실화로 남기

몇 군데 디너 처치에 대하여 소개하는 영상과 안내문을 보며 한국교회가 만들어놓은 교회에 들어오기 위한 전제조건들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단순히 세대 간, 혹은 남녀 간 갈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독자들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로 가는 길에 놓인 거침돌들이 왜 이리 많은지, 그동안 쌓아 올린 벽들은 왜 이리 높고 흉측한지, 식탁으로 가는 길목마다 자격을 묻는 종교경찰들이 물 샐 틈 없는 경계를 서고 있지 않은지, 배타적인 심사로 남은 좌석이 없는 것은 아닌지, 반갑지 않은 손님들을 보며 눈을 흘기고 불편해하는 이들의 독점적인 모임은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모든 허울을 넝마로 버리고 편안하게 와서 맛있게 먹고, 마음속 이야기를 펼쳐 놓으며, 떼제공동체의 찬양처럼 사랑의 나눔이 있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아니면 적어도 가수 이적이 노래하듯 그대여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라고 말하며 진심으로 위로하고 우리 함께 노래하자고 손을 내밀 수만 있어도 소원이 없겠다.

여러 가지 장애물들이 여전히 우리 앞에 있지만, 우리는 역사적 증거를 통해 벅찬 기대로 종말론적 소망을 품을 수 있다. 교회의 역사는 낭만적 기대들이 신화가 되고 실체로 변해 우리에게 실화로 남아있으니 참으로 감격스럽고 감동적이다. 환대와 나눔이 거룩하고 복된 일임을 알았던 이들이 남긴 아름다운 유산이다. 따라서 디너 처치에 대한 필자의 걱정은 단순한 기우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함께 먹으면서 이 식탁의 자리에서 이기적인 욕심으로 독점되는 현실에 대해 피 끓는 의분을 공유할 수 있다면, 경작과 수확과 조리와 나눔의 과정에 담긴 피와 땀을 이 음식에 오롯이 담을 수 있다면, 그 모든 과정에 신실한 기도와 절절한 감사를 새길 수 있다면. 이렇듯 선물로 주신 주님의 자기희생의 은혜와 환대와 나눔의 가치를 잊지 않는다면, 그것이 만들어내는 반전이 예수의 식탁에서처럼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기쁨 가운데 실천한다면, 우리 식구들의 발자국도 역사에 선명하게 실화로 남겨질 것이다.

*각주
1) Edward Foley, "Eucharist, Postcolonial Theory and Developmental Disabilities: A Practical Theologian Revisits the Jesus Table", 65. 이 주제에 대한 필자의 논문을 참고하라. 안덕원, “탈식민주의 이론으로 바라보는 기독교 성찬 : 혼종성(Hybridity)과 제 3의 공간(The Third Space)으로 구현하는 프롤렙시스(Prolepsis),” 「복음과 실천신학38 (2016): 146-178.
2) 정기문, 역사학자 정기문의 식사-생존에서 쾌락으로 이어진 음식의 연대기』(책과함께, 2017), 특별히 2서양의 주식, 빵의 역사를 참고하라.
3) https://www.dinnerchurchmovement.org/ 자세한 접속기록과 인용 내용은 지면 관계상 생략하며 다양한 유형의 디너처치가 있음을 감안하라. 더불어 문화선교연구원의 자료를 참고하라. https://www.cricum.org/1573 , 202031, 5, 10일 접속.
4) A. Andrew Das. "1 Corinthians 11"17-34 Revisited", Concordia Theological Quarterly Vol. 62 No 3 (1998),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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