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대중문화 읽기] ‘듣는 마음’이 필요하다 - 영화 <82년생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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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들

해질녘 아파트 베란다에 나와 노을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하는 김지영(정유미)은 가끔 마음이 쿵 내려앉는다고 했다. 평범했던 한 여성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그 자리를 남편과 아이를 위한 살림과 육아로 가득 채우면서 평범하지 못한 목소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시어머니와 남편 앞에서 친정어머니의 말이 지영이의 마음을 대신 전해주고, 선배와 외할머니의 말은 남편과 친정어머니에게 적(敵)이 없고 끝도 나지 않는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 지영이를 믿어달라고 설득한다. 흥미롭게도 지영의 편이 되어 말하는 이들은 모두 상대보다 연장자(선배, 외할머니)이거나 동등한 입장(친정어머니)이되 비슷한 경험을 앞서한 여성들이다. 

침묵을 깬 말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미투 운동을 계기로 여성의 목소리들이 공적 영역에서 발화되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지영과 지영 주변의 여성들이 겪는 사건들 - 아들 편애, 성희롱과 유리천장, 대중교통과 공공화장실 등 공공장소에서 겪는 스토킹과 불법촬영, 피해자 탓하기 등이 비춰졌던 것처럼,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았다. 수치로 여기며 쉬쉬하던 크고 작은 일상적 피해경험과 차별적 현실을 공론화했다. 그러자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와 영역을 불문하고 여성 다수가 겪는 사회문제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여성을 향한 폭력과 살인의 피해자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심과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위기감은 많은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도록 했다. 원작인 책 『82년생 김지영』은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조신함과 순종, 돌봄이 여성의 미덕이라며 침묵을 요구받던 여성이 자신과 자신의 경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중요하다. 후에 지영이 카페에서, 그리고 글을 쓰면서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냈던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제야 비로소 타인은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82년도에 태어난 한 여성의 세계를 다룬다.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당신과 나의 이야기,”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카피다. 여성들에 대한 다양한 통계자료와 기사들(fact)을 지영을 비롯해 몇몇 여성의 인생으로 한데 모아 재구성(fiction)하면서, 숫자와 활자로만 존재했던 많은 여성들의 삶을 영상으로 재현해 우리가 놓치고 있던 것들을 직면하게 한다. 세대와 성별을 두루 포용하면서 원작보다 온건하고 따뜻한 자세로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평점 테러를 하거나 악성 댓글이 달리는 등 개봉 전부터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한쪽에서 변화를 향한 공감과 연대의 물결이 일어나는 동안 한쪽에서는 그간 들리지 않던 여성 목소리의 출현을 남성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했다. 성별 간 갈등은 한국사회에서 심각한 논쟁 중 하나가 되었다.

왜 어떤 사람들은 <82년생 김지영>에게 가혹할까? 정신과 의사 정혜신 박사는 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할 때 대부분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한다고 했다. (정혜신, <당신이 옳다> 중)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세계관을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 말이 아니라 그의 말이며, 나와 다른 그만의 고유한 경험과 마음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감수성이다. 

누구도 마음 아프지 않은 사회를 위해

책이 화제가 되던 재작년, 어떤 모임에서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님은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미처 알지 못했던 여성들의 어려움들을 비로소 보게 되었다며, 그 후로 중직자들과 함께 읽고 교회의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너무나 익숙하고 일상적이라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인 주변의 어려움과 차별의 이야기들을 <82년생 김지영>은 기꺼이 들려준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교회를 떠나는 여성들을 붙잡고 싶다면, 솔로몬처럼 ‘듣는 마음’(왕상 3:9)으로 그 목소리들을 대하는 것을 시작할 수 있다. 그래야 깊이 이해할 수 있고, 거기서부터 정확하게 공감하며 함께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시작이 반이다.

김지혜 

디자인과 신학을 공부했다. '문화'와 '타자'는 언제나 인생의 중요한 화두다. 문화분석에 관심이 있으며, 현재 장로회신학대학교 기독교와문화 전공 박사과정 중에 있다. 목사이고, 문화선교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섬기고 있다.

* 본 글은 기독공보에도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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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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