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질문이 바뀌는 순간 - 책 <죽음>을 읽고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는 길이지만 언젠가 가게 될 길이기에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것이 죽음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동시에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다. 인간이 죽음을 맞는 단계를 부정, 분노, 타협(협상), 우울, 수용을 거친다는  퀴블러 로스의 생각을 빌리지 않아도 옛날부터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이라고 다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전작 <타나토노트>(죽음항해자)에서 죽는다는 건 ‘더 이상 여기에 없게 된다’는 뜻이며, 모든 것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의 상태로 옮겨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분명한 것은 어떤 사람은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여행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아마 종교가 그 답을 준다고 믿고 자꾸만 유보하고 있는 문제가 죽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바로 여기에서 종교가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사람이란 존재는 이 세상을 떠나 새로운 차원의 여행을 준비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좀 특이한 여행을 떠난 이가 있다. 소설 <죽음>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소설 속 주인공 가브리엘 웰즈는 추리소설 작가다. 

 “누가 날 죽였지?”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독살 당했다고 생각하며 떠돌이 영혼이 되어 자신의 죽음을 수사한다. 갑작스런 자신의 죽음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확신한다. 주변의 몇몇 인물들을 용의 선상에 올려놓고 영매 뤼시 필리피니를 만나 함께 자신의 사건을 수사한다는 내용이 소설의 줄거리다. 떠돌이 영혼이 된 주인공은 뤼시와 함께 이승과 저승을 오가면서 자신을 죽인 범인을 색출하려고 한다. 

‘내가 살해당했다.’ 

그렇다면 누가 범인이란 말인가? 장례식을 앞둔 상황에서 그가 용의자로 수사 선상에 올린 대상은 네 명이다. 

  • 여자 친구 사브리나

  • 합리주의자 쌍둥이 형 토마

  • 출판인 알렉상드르 드 발랑브뢰즈

  • 평론가 장 무아지

이들을 유력한 범인으로 주목하고 한 명씩 수사해 나간다. 그러나 수사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여러 난관을 만난다. 이야기의 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영매 뤼시를 중심으로 그녀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다른 하나는 주인공 웰즈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이다. 씨줄과 날줄로 얽히면서 웰즈는 뤼시와 함께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면서 온갖 인간 군상들을 만난다. 어떤 때에는 호의적인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때는 악의적인 사람들을 만난다. 이승과 저승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이 소설을 읽어내려면 초자연적인 존재의 용어들에 대한 선이해가 요구된다. 이를테면 유령, 악령, 사후세계, 환생, 이승과 저승, 천국과 지옥, 연옥, 심령술(사), 점성술, 퇴마사제, 요정, 림보, 호빗, 소생 등 같은 것들이다.)

첫번째 이야기의 틀은 영매 뤼시와의 만남이다. 이 둘은 만나서 합의를 한다. 뤼시는 웰즈의 죽음을 수사하고 웰즈는 뤼시의 운명의 남자 사미(개명: 세르주 다를랑)를 추적한다. 그러니까 둘은 일명 상호 의존하는 공조수사를 펼친다. 작가는 양면을 화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죽음과 삶, 이승과 저승, 내세와 현세와의 소통을 상상력과 환상을 통해 보여준다. 불가지론자인 작가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영원히 소통할 수 없다는 성경의 견해를 따른다. 

두번째 틀은 출판인과 출판사가 새로운 ‘인공지능’ 시대에 맞추어 프로그램을 통해 요절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출판하려는 의도다. 가령 죽은 사람과 소통하는 기계(네크로폰) 이야기는 21세기 인공지능과 로봇 시대에 대한 암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기계는 사람과 달리 호기심을 갖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세번째는 뤼시의 활동을 통한 배움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면 오만이며, 세상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벌이는 소꿉놀이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신의 실수와 어두운 면과 맞부닥뜨려 봐야 비로소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단시간에 변혁을 이루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2권, 198). 

네번째는 인류의 생명연장 실험은 어떻게 될까?이다. 연구자들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며 의도 자체가 잘못되었다. 저자가 의도한 메시지는 이것이 아닐까? 소설에 자주 나오는 표현인 “살아있음에 감사합니다. 육신을 가진 것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존재의 행운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이에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짧아도 충만한 삶을 영위하는 게 무미건조하게 이어지는 긴 인생을 사는 것보다 낫다”(297). “영혼이 머무르고 싶게 만들려면 육체를 잘 보살펴야 한다”(302). 

소설의 절정은 가브리엘의 마지막 여섯 가지 회상 부분이다. 

  • “첫째, 인간의 삶은 짧기 때문에 매 순간을 자신에게 이롭게 쓸 필요가 있다. 

  • 둘째,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 셋째, 실패해도 괜찮다. 실패할 때마다 뭔가를 배우기에. 

  • 넷째, 우리를 대신 사랑해 달라고 할 수 없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일은 각자의 몫이다. 

  • 다섯째, 만물은 변화하고 움직인다. 

  • 여섯째, 지금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려 하기보다 지금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비교하지 말고 오직 이 삶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 애써야 한다(2권, 311).” 그러므로 인생을 사랑한다면 끝까지 투쟁하라.  

회상에 이어 나오는 마무리는 이것이다. 

그나저나 ‘나는 살해당했다.’ 그렇다면 “누가 날 죽였지?” 

범인은 바로 자신이다. 소설의 반전은 “내가 왜 죽었지?”에서 “나는 왜 태어났지?”(313)로 바뀌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브리엘의 묘비명 “나는 살아있고 당신들은 죽었다”(227)는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 에 대하여 독자들이 대답할 차례라고 묻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의 묘비명에는 어떤 글을 새겨야 할까? 

문학과 예술이 유독 죽음을 많이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면 두렵고 고통스럽고 슬프고 외로운 느낌을 준다. 또한 문학과 예술이 유독 이 문제를 더 많이 다루고 있는 것은 예술가들이야말로 죽음의 문제에 천착하여 더 많이 고민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오히려 죽음의 문제를 더 다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다루는 방식으로 이를테면 공포영화 같은 데서 죽음을 다루기도 하지만 어떤 문학과 예술작품에서는 저승사자가 나타나 죽음을 준비시키고 무거운 죽음을 희화화하기도 한다. 그런 사례로서 이청준의 소설 <축제>는 팔순 노모의 죽음을 축제로 승화시킨 영화다. 그러나 영화 <추적자>처럼 안타까운 죽음에서부터 ‘무연고 사망자’에 이르기까지 쓸데없는 죽음처럼 보이는 죽음도 있다. 일본에서는 죽음을 능동적으로 준비하는 ‘엔딩산업’이라든가 ‘생전 장례식’이 심심찮게 신문에 소개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든 죽음은 간접적인 경험이다.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고 이웃의 죽음이지 나의 죽음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죽음 맛보기, 생전장례식, 죽음교육 등 다양한 임종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많이 생겼다. 누구나 좋은 죽음(웰다잉)을 원하지만 답은 잘 사는데(웰빙) 있다. 우리 교회가 죽음의 문제 앞에서 관심을 갖고 꼭 실천해야 할 것은 호스피스 사역과 생태 죽음이다. 모든 생명은 죽는다. 어떤 존재의 죽음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죽은 이들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고 있는가. 한 사회의 수준은 죽음과 죽은 이들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고 대하는가에 달려있다고 한다. 최근에 ‘죽음’을 소재로 하는 문학과 예술작품이 많이 제작되는 배경에는 과거 70대에 죽음을 맞이했다면 오늘날 100세 시대로서 그만큼 살아있는 시간들이 많아져서 죽음에 대하여 과거와 다르게 생각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어둡고 무거운 죽음의 문제를 아름다운 영상미학으로 다룰 수 있다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더구나 영상매체(CG 같은)의 기술 발달로 과거에 표현하지 못했던 장면들을 표현할 수 있는 것도 한 몫 한 것 같다. 역설적으로 바라보면 그만큼 인간 존재와 삶의 문제를 가볍게 취급될 위험도 있다는 것이다. 깊어가는 이 계절에 진지한 성찰의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의 생각을 한 줄 추가하면, 소생의학과 임사체험,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다. 우선 죽음이란 이제 과학의 영역이 된 것 같다? 의학에서 죽음은 세 가지로 정의한다. 심장박동의 정지, 호흡의 정지, 뇌기능의 정지다. 죽음연구자 최준식은 죽음이란 물질세계를 졸업하고 비물질세계로 ‘도약’하는 것, 곧 ‘몸을 벗는다’고 표현한다. 즉 물질적인 몸을 벗고 새로운 몸을 받는 ‘전환’이다. 의학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지속적으로 밀어내고 있고, 사후생으로 간주되었던 시간까지 침투하기에 이르렀다(<죽음을 다시 쓴다>, 39). 임사체험자들의 공통점은 환한 빛을 지나 터널을 통과한 후 어떤 존재자를 만났다는 점이다. 독일의 수사 안젤름 그륀(<죽음 후에는 무엇이 오는가?>)의 어깨 위에 서서 죽음을 들여다보면, 우리 삶은 시간 속에 왔다가 시간의 끝인 죽음을 통해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내가(다윗)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죽음)로 가게 되었으니”(왕상2:2).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박성관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대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다. 복음과 문화, 신학적 미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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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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