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포럼X문화선교연구원] 시네마 브런치 스케치: 영화 <나는 예수님이 싫다>





지난 7월 29일 월요일, 필름포럼에서 대표 성현 목사가 진행하는 시네마 브런치가 있었다. 시네마 브런치는 영화를 감상하고, 간단한 샌드위치를 먹고 기독교적인 시각이 담긴 시네마 강좌와 관객과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매달 진행되는데 7월의 영화는 오쿠야마 히로시 감독의 <나는 예수님이 싫다>였다. 

‘아니 어떻게 이런 제목을...’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귀여우면서도 발칙한 제목이다. 실제로 영화는 초등학생 5학년 아이가 주인공인 만큼 귀엽기도 하고 그 안에 사뭇 진지한 고독과 실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초등학생 5학년 유라는 갑작스러운 이사로 시골 마을로 전학을 오게 된다. 그곳에서 다니게 된 기독교 학교, 예수님과의 만남은 조금 낯설었지만 유라는 자신의 작은 소원들을 들어주는 예수님과 금방 친해진다. 하지만 학교에서 처음으로 사귀게 된 소중한 친구 카즈마의 죽음을 경험하고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예수님이 미워진다. 이하 내용은 강좌를 요약한 것으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 편집자


22살 감독 오쿠야마 히로시 

성현 목사는 강좌에 앞서 감독의 나이에 주목했다. 22살이라는 감독의 애매한 나이는 아이의 기억을 가진 동시에, 어른의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과 닮아있다고 말했다. 즉 영화는 5학년 아이의 감정을 공감하는 동시에 어른의 눈으로 아이의 생각을 바라보는 느낌을 이어가고 있다. 

좌측이 감독 오쿠야마 히로시. 우측은 주인공 유라 역을 맡은 사토 유라.


1.33:1 과거를 그려내는 영화 

다음으로는 영화의 스크린 비율에 주목했다. 독특하게 이 영화는 스크린 비율을 1.33:1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관에서 화면을 바라보는 관객에 입장에서 답답했을 수도 있다. 왜 그럴까? 그래서 어떤 감독은 1.33:1이라는 비율을 일부러 과거시점을 비출 때 사용하고, 미래로 나아갈수록 화면을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화면 기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감독이 계속해서 1.33:1의 비율로 영화를 비추고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의 이야기로 초대하고, 과거 속으로 함께 들어가길 바라는 마음일수도 있다. 또한 마치 감독이 과거에 겪었던 일을 회상하고, 이야기하듯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동화적인 세계에서 현실적인 세계로 

특히 성현 목사는 이 영화의 주인공 유라가 자신만의 동화적인 세계에서 현실세계로 이동하는 성장과 변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말했다. 

 


- 음악

먼저 영화 속에서 추억이 흐를 때마다 나오는 찬송가가 있는데, 찬송가 BGM이 매우 비현실적인, 그리고 동화적인 방식으로 연주된다. 딩동 댕동 하는 아주 장난스럽고 천진난만한 느낌의 음악이 사용된다면 카즈마의 죽음 이후 장례식에서 나오는 음악은 다르다. 장례식에서 나오는 찬송가는 아주 현실적이다. 오르간을 사용한 아주 무거운 연주방법이 사용된다.    


- 빛의 사용, 창문 

성현 목사는 이 영화에서 창문, 그리고 창문으로 투여되는 빛의 의미에 주목했다. 마치 이 영화는 창문에서 시작되어 창문으로 끝나는 이야기 같다. 창문 안에서 보호를 받던 아이가 영화를 끝나고 나면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이야기라고나 할까.  

가장 먼저 창문이 나오는 장면은 할아버지가 창호지를 뚫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창호지 너머로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어떤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을지 생각해볼만한 주제다. 이어서 유라가 이사오는 장면이 나타나며 자동차 창을 닦으면서 밖을 쳐다보는 아이의 모습이 나온다. 여기에서 유라의 모습은 안전한 거리 안에서 바라보는, 창문 안의 세계에서 즉 예측이 가능한 세계 속에서 부모의 보호를 받는 아이의 모습이다. 하지만 카즈마의 죽음을 경험한 이후 유라는 할아버지처럼 자신이 직접 창문을 뚫는다. 그 다음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현실세계로 내딛는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라고 보여진다. 


- 흔들림 

영화 전반에 흐르는 구도는 매우 안정적이다. 그러나 딱 한번 카메라가 요동치며 흔들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이 바로 유라가 병원에 갔다가 처음으로 카즈마의 죽음을 직감하게 되었을 때였다. 유라가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에 걷다가 갑자기 울면서 뛰어가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때 처음으로 카메라가 격하게 흔들린다. 성현 목사는 그 장면이 실제로 흔들리는 카메라만큼 유라의 안정적인 세상에서 찾아오게 되는 변화라고 보았다. 

또 다른 흔들림은 카메라의 중심의 변화다. 영화 속에서 항상 카메라는 유라를 구도의 중심에 맞춰놓는다. 모든 장면이나 건물들도 마찬가지다. 유라가 중심인 매우 안정적인 세상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카즈마의 죽음 이후 카메라는 비뚤어진 구도, 측면을 매우 자주 비춘다. 성현 목사를 사실은 측면의 세상이 더욱 진솔한 세상임을 강조했다. 사실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볼때는 정면을 보지만 타인과 엮인 세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정면 보다 더 많은 측면을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 목욕장면과 변화  

성현 목사는 카즈마의 죽음 이후 유라의 삶에 찾아온 변화는 유라가 욕조에 들어가는 장면으로 묘사된다고 말했다. 유라가 목욕하는 장면에서 유라는 욕조 물속에 깊이 들어갔다가 숨을 못 참고 물을 토해내듯이 물 밖으로 나온다. 성현 목사는 마치 이 장면을 세례의 장면에 비유하기도 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을 의미하는 거듭남의 의미. 그렇다면 유라의 죽음은 이전과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새로운 삶은 어떤 삶일지 또한 생각해보아야 하는 지점이다.  


유라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대사 3   


1. ‘항상’ 그러면 무섭다니까!

유라는 가장 친한 친구 카즈마와 별장에 놀러갔을 때, 카즈마에게 말한다. “너희 엄마는 항상 웃어.” 좋은 의미로 한 말에, 카즈마는 ‘항상’ 그러면 오히려 무섭다고 말한다. 성현 목사는 항상이 주는 환상에 대하여 주목했다. 여기서 보이는 유라의 세계는 항상에 갇힌 세계다. 그것은 무한 긍정의 세계이기도 하다. 예외를 거부하는 모습은 안정을 추구하는 어린아이에게 드러나는 회피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마치 유라의 환상적인 세계를 보여주듯이 빛을 과하게 사용한다. 그러나 그러한 빛의 사용도 카즈마 사건 이후 변화된다. 그 이후 어두움, 그림자 등이 사용되며 어두움을 알게 된 유라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2. 얼른 나와, 왜 안 나오는거야?

이 장면은 자신의 작은 소원을 들어주던 환상속의 예수님이 카즈마를 위해서 기도할 때는 나타나지 않아서 유라가 예수님을 향해 따지듯이 묻는 대사다. 특히 성현목사는 교회를 다니는 많은 분들은 유라가 “나는 예수님이 싫다!”라고 외치며 그 예수님을 손으로 내리치는 장면에서 깜짝 놀라셨을 것이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어서 “과연 유라가 내리친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일까요? 우리가 믿는 그 예수님일까요?”라고 되물으며 우리에게 고민해 봐야할 지점을 제안했다. 유라가 ‘나는 예수님이 싫다’라고 했지만, 성현 목사는 유라는 ‘내 기도를 내 맘대로 들어주지 않는,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예수님이 싫다! 라고 말한 것이라며 자신만의 소원을 들어주는 유라가 만들어 낸 예수임을 강조했다.  


3. 기도했는데, 소용 없었어요.

유라가 선생님을 향해서 한 대사였다. 성현 목사는 관객들을 향해 되물었다. “정말로 기도했는데 소용이 없었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기도란 무엇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성현 목사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도의 과정은 일방적으로 이러 이러한 소원을 들어주세요! 하는 간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기도도 분명히 소중한 기도의 한 부분이지만, 또한 그것을 넘어서 기도의 과정이란 하나님과의 진정한 소통을 통해 나라는 사람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며, 내 생각과 뜻이 변화되는 경험을 이루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중에 나의 뜻보다 더 크신 그분의 뜻이 나를 통해 이 땅에 이뤄질 수 있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과정인 것이죠.” 

지금 유라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진짜 소망, 진짜 희망이 필요하다. 우리의 기도의 첫출발이 그저 우리의 뜻대로 하나님을 좌지우지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우리의 진정한 바람과 기도의 내용은 변하게 되어있다. 



고통보다 깊은 

성현 목사는 토마스 할리크(Thomas Halik)의 말을 인용했다. 

“예수는 모든 작은이와 고통받는 이를 자신과 동일시했다. 그러므로 상처 입은 모든 이, 세상과 인간의 온갖 고통은 그리스도의 상처다.” 

“우리는 돌로 빵을 만드는 마술로 사람을 홀리는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원을 언제든지 들어주는 지니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를 통해 그 고통을 공감함으로써 치유와 새롭게 하시는 역설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정돈되고 아름답기만 한 세상이 아니라 아픔과 고통의 흔적이 가득한 세상 가운데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지점입니다.”

성현 목사는 사실 감독이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가 가장 비참하고 슬픈 장면마다 나오는 찬송가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에 주목했다. 성현 목사는 그 찬송가의 가사 ‘어둠밤 지나서 동튼다’라는 부분을 깊게 묵상하게 되었다고 말하며 어둔 밤이 지나야만 동이 트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내면의 상처를 대면할 때,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화려함, 아름다움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고통과 그 고난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신비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Michelangelo Caravaggio(카라바지오), 의심하는 도마(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1602~1603, oil on canvas, 107*146cm, Sanssouci Museum, Potsdam.>

우리는 여기에서 그림 <의심하는 도마>를 새롭게 읽을 수 있다. “우선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시오.” 성현 목사는 카라바조의 작품 <의심하는 도마>라는 작품 속에서 상처에 손을 넣어 보는 도마의 모습과 창호지에 구멍을 뚫는 유라의 모습이 겹쳐보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상처에 기꺼이 동참하며, 그것을 온전히 경험하는 우리의 충격은 도리어 우리를 새로운 신앙의 자리로 인도한다고 말했다. 우리의 신앙을 돌아봐야 할 것 같다. 실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얻게 되는 것은 무한한 신비의 세계 사이에 있는 아픔을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다. 

폴 트루니에는 자신의 저서 <고통보다 깊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을 자라게 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지만, 고통 없이는 사람이 성장할 수 없다.” 성현 목사는 투르니에의 글을 인용하며 마지막으로 세상에 있는 많은 유라들이 이 과정을 넘어서 더 깊은 신앙의 성숙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편집자의 말 "7월 시네마 브런치를 편집하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갑작스러운 불행한 사건을 경험한다. 겪지 않을 수 없는 그 고통을 매 순간 마주하면서 살아간다는 게 너무 두렵다. 이러한 두려움 속에서 신앙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오늘 하나님께서 고통 중에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복된 소식이 우리 모두를 새로운 창문으로 인도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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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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