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의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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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전되지 않은 총

(<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의 전성시대>, 윤종빈 감독, 범죄, 드라마, 18세, 2012)


 

우리 사회는 어둔 터널을 지나가는 중이다. 행정력이나 정치력만으로는 더 이상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는 힘이 균형이 상실했을 때 혹은 부당하게 행사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단적인 예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이나 <도가니>, <특수본>, <부당거래> 그리고 <부러진 화살> 등과 같이 사회의 도덕적인 타락과 각종 부패, 그리고 정의롭지 못한 공권력을 고발하는 영화들이 단순히 허구적인 이야기의 수준을 넘어 현실 인식과 비판의 계기로 여겨지면서 거침없이 흥행의 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도가니>에 이어 <부러진 화살>과 같이 사회비판적인 영화들이 흥행하는 이유를 묻는 사람들이 많지만, 공적인 영역에 대한 국민들의 참여와 관심이 높아지면서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힘의 전횡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으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범죄와의 전쟁>은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데, 먼저 제목부터 아이러니하다. 보통사람을 자칭하던 노태우가 선포했던 범죄와의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나쁜 놈들’이 활기를 치고 다녔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쁜 놈’이 누구인지를 정의하진 않았지만, 영화는 공권력이든 조직적인 폭력이든, 아니면 양자 사이를 저울질해가며 이득을 취하는 소시민이든 상관없이 갖가지 이유로 부당한 힘으로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모두를 지칭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것은 아니다. 힘으로 힘을 제압하려고 했던 시기를 지배하는 힘의 역학관계를 성찰하는 의도를 읽어볼 수 있다. 현대사회의 한 비유로도 읽혀질 수 있는 내용이다.

제목 “범죄와의 전쟁”은 공권력이 전면에 나선 시기를 염두에 둔 것이고, 부제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는 조직폭력배(깡패)의 주먹이 지배적이었던 시대를 가리킨다. 양자의 병행이 아이러니하지만 영화는 표면적으로 두 개(공권력과 조직폭력배)의 힘이 어떤 역학관계를 가졌고, 또 그것은 어떻게 공생하는지를 보여준다. 권력은 현실을 정의하는 힘이 있고, 길거리 폭력은 문제 해결의 힘이 있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때로는 상호 부조하고, 때로는 상호 충돌하며 대한민국의 권력을 어떻게 요리해 나갔는지를 실감있게 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는 공권력과 깡패의 폭력,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줄다리기하며 생계를 위한 힘을 공급받아 힘겹게 살아가는 소시민의 모습을 시대적인 배경과 함께 재현하면서, 힘이 지배하는 세계의 본질과 그 파국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폭로한다.

영화의 캐릭터로서 주목을 끄는 존재는 단연코 최익현(최민식 분)이다. 그를 매개로 권력과 조직폭력의 진면목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전직 세관공무원인 그는 스스로 막강한 힘의 주체로서 살던 때가 있었다. 그는 가족을 소중히 여길 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혈연관계에서 찾는다. 비리사건으로 퇴출된 후 조직폭력배 우두머리인 최형배(하정우 분)와 협업하게 된 것도 결국 혈연관계에서 찾아낸 고리 때문이었다. 그의 표면적인 목적은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그는 혈연관계를 하나의 힘으로 삼고, 또 그 힘을 키우려 갖은 노력을 다 한다. 필요하다면 문중 어른을 찾아가고, 동네 어른들을 봉사하며 또 종교행사 참석도 마다하지 않는다. 혈연관계로 다진 힘에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고 또 뇌물을 통해 얻은 인맥(공권력과 정치력)의 힘이 더해지면서, 그가 계획하고 추진하는 일들은 일사천리로 풀린다. 그러나 영화는 표면적인 목적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최익현’이란 캐릭터는 겉보기와는 달리 힘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는 인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것이 ‘최익현’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제시된 심층적인 면이다. 표면적으로는 가족을 내세우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임을 폭로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편, 승승가도를 달리던 최익현이 놓쳤고 또 간과했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그를 버티게 해 준 힘의 한계다. 공권력은 자신의 정치적 혹은 입신양명이라는 이익 앞에서 가차 없이 등을 돌렸고, 또한 비록 형배가 혈연관계의 한 고리일지라도, 의리로 뭉쳐진 조직이 형배의 또 다른 가족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형배의 힘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에 혈연관계보다 더욱 중시된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형배에 의해 정의되고 또 배분된 힘의 범위에서 세를 자랑할 수 있었지만, 적어도 최익현 스스로가 맘대로 부릴 수 있는 힘은 아니었다. 그가 이것을 깨닫게 된 때는 이미 형배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히고 난 후다.

형배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한 최익현은 자신의 계획을 실현시킬 또 다른 힘에 의지하려고 하지만, 형배에게 더욱 큰 봉변을 당할 뿐이다. 게다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공권력은 조직폭력배 검거에서 우선적으로 최익현을 구속하게 되고, 그는 과거 공무원이었다는 사실을 인맥으로 삼아 문제해결을 시도하지만 좌절을 겪는다. 이에 최익현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수배중인 형배를 넘겨줄 계획을 제안한다.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 친족관계 마저도 포기한 것이다. 이것은 힘을 위해 힘을 포기한 것일 뿐 별다른 의미가 없다. 힘은 가고. 남는 것은 오직 가족이며, 힘의 근원은 가족에게서 분출될 뿐임을 말하는 것 같다.

비록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제목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전개되지는 않았지만, 영화에서 오히려 더욱 깊이 조명된 부분은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시기에 얽히고설킨 힘들의 역학관계, 그리고 그 틈바구니에서 힘에 빌붙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소시민의 애처로운 모습이다.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화는 두 개가 아니라 세 개 힘의 틈바구니에서 핑퐁게임을 하는 최익현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는 혈연관계의 힘고, 다른 하나는 공권력이며, 마지막 하나는 의리로 맺어진 조직폭력배 힘이다. 그리고 모든 힘들은 제각기 가족을 바탕으로 형성되고 또 가족을 위해 실행됨을 재현한다. 그러니까 모양은 달라도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유사하다. 공권력 역시 공직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생각하며 협력하기 때문이다.

최익현은 이런 힘의 줄다리기가 팽배한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캐릭터다. 그 역시 힘이 없으면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에 힘을 추구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세가 아니면서 힘의 논리에 빌붙어서 살아가는, 그래서 그가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힘은 마치 장전하지 않은 총과 같다. 위협적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결코 실효성이 없는 힘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붙들고 허세를 부리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소시민들이다.

강력한 힘을 꿈꾸는 사회는 일단 사회 내의 구성원들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다는 지표다. 정상적인 관계에 있는 사회는 결코 힘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로마의 평화’나 ‘몽고의 평화’, 혹은 ‘미국의 평화’라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힘을 꿈꾸는 자들은 힘을 통해서 평화가 유지될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그것은 크나 큰 착각이다. 힘을 통해서는 오히려 더 큰 힘을 낳을 뿐이다. 힘을 꿈꾸는 사회에서 준비되는 것은 사실 평화가 아니라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하려고 계획하는 더 큰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공동체의 근간이 되는 관계의 원칙은 힘이 아니라 사랑이다. 이 사실은 이 시대, 곧 강력한 힘을 꿈꾸는 세대와 세대, 계층과 계층, 집단과 집단의 갈등으로 점철되어 있는 갈등과 위기의 시대에 깊이 있게 묵상해야 할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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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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