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대중문화 읽기 영화 <가버나움> : 기적과 혼돈 사이 부르심의 자리는



제목만 듣고서 예수영화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영화 <가버나움>은 기독교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제목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베드로의 장모와 중풍병자, 그리고 백부장의 하인을 치료하시는 등 많은 기적을 베푸신 곳으로 신약에서 빈번히 등장하기 때문이다. 가버나움은 동시에 혼돈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예수께서 교만하여 회개하지 않는 성읍 가버나움을 향해 하신 말씀 때문이다. 수 세기 후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으로 그 예언은 실현되었다. 

숱한 기적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혼돈 가운데 침잠하고 말았던 장소가 가버나움이라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빈민가는 내전으로 인한 후유증과 난민 유입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아동학대, 불법체류, 미혼모, 불법입양, 아동매매, 조혼, 난민, 난민사업 등 나열만 해도 마음을 무겁게 하는 사회적 이슈들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이다. 절망과 혼돈의 땅으로만 보인다. 네오리얼리즘을 떠올리게 하는 이 영화가 현실과 가상,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를 허물며 진정성을 획득했다면 그것은 실제 자신의 삶을 그대로 영화 속으로 녹여낸 아마추어 배우들 덕이다. 자인으로 분했던 자인 알 라피아는 시장에서 배달을 하던 시리아 난민 소년이었으며, 자인의 여동생 사하르 역으로 출연한 하이타 아이잠은 베이루트 거리에서 껌을 팔던 소녀다. 요나스 역의 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은 촬영 중 친부모가 체포되었고, 라힐 역의 요르다노스 시프로우는 영화에서 불법체류자로 감옥에 갇히는 장면을 찍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당국에 체포되기도 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합법적인 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생존의 위협에 노출된 채 공적인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하고 비-인간으로 취급 받아온 이들의 연기는, 그동안 사회에서 목소리를 잃은 서발턴들(subalterns)의 존재를 스스로 “말하는” 하나의 저항이자 삶 그 자체였다. 

영화는 다소 파격적인 장면으로 시작된다. 체구가 작은 소년 자인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이나 생년월일을 알 길이 없어 치아 상태를 통해 열두 살이라 짐작해야 할 정도다. 그는 겨우 열한 살짜리 누이와 조혼(실은 매매혼에 가까운)을 맺어 임신중독과 하혈에 죽게 한 남성을 칼로 찌른 죄로 감옥에 갇혀있다. 양손에 수갑을 찬 채 내뱉는 자인의 대사가 다소 자극적이다.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나를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자인의 고소는 그저 자녀를 낳기만 하는 부모들의 무책임함에 대한 것이지만, 이를 방관하는 사회적 시스템이나 우리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아이들을 방치하고 학대하며 생존을 위해 자녀들을 거리로 내몰았을 뿐 아니라 돈 몇 푼에 어린 딸을 맞바꾸기까지 한 부모는 항변한다. “나처럼 살아보지 않았잖아요.” 그러나 이 변명은 어떻게든 사하르와 요나스를 포기하지 않으려던 자인의 사랑과 존중,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며 삶을 삶답게 살아가려는 생의 의지 앞에서 힘을 잃는다. 인간성(humanity)이다. 자인의 부모와 사하르를 데려간 남성은 자신들의 욕망에만 충실할 뿐 아이들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하다. 인간성의 상실이다. 물론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종교 간의 분쟁으로 비롯된 내전은 오랜 시간 동안 레바논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나딘 라바키 감독은 이 지점에서 사랑 대신 욕망과 껍데기만 남은 종교에 일침을 가한다. 사하르를 잃은 후 슬픔과 고통을 느끼는 대신 다시 얻은 아기의 이름을 사하르로 지을 것이라며 “신은 하나를 데려가면 하나를 주신다”는 자인의 어머니의 말은 값싼 위로가 되어버린 종교의 전형이다. 수용소에 찾아간 신부와 신도들의 찬양이 수감된 이들에게 와닿지 않는 듯한 장면은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었어요. 하지만 신은 그걸 원하지 않아요. 우리를 짓밟을 뿐이죠.”라는 자인의 이야기와 맞물려 그리스도인의 자리에 대해 고민을 하게 한다. 하나님이 오늘날 자행되는 참혹한 현실들을 그저 방관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조차 그리스도에게 배운 대로, 그분을 따라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비우시고(자기-비움), 자신을 제한하시며(자기-제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자기-수여) 스스로 낮아지셔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처럼 말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친히 고통 당하셨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절망과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아신다. 진정한 위로를 건네실 줄 아는 분이다. 그 위로는 철장 밖을 맴도는 찬양을 넘어서 마음 깊숙한 곳까지 어루만진다. 가버나움의 어원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바로 위로의 마을이다. 고단한 여정 끝에 해피엔딩을 맞이한 영화처럼, 기적과 혼돈 사이에서 가버나움이 위로의 마을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제자로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에게 달려있을 것이다. 두 시간 남짓 스크린을 보는 관객의 감상에서 나아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는 실천을 시작하는 것으로 말이다. 

김지혜 목사(문화선교연구원 책임연구원) 

* 이 글은 기독공보에 실린 글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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