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정치적인 참여와 그리스도인의 책임의 문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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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에 대한 대럴 펄프의 글로, 이 글을 토대로 다양한 입장 간의 토론이 전개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문화선교연구원 편집부

오늘(2018/11/6에 게시된 글로, 이 날은 미국 상하원 의원을 선출하는 중간선거가 있었다. - 편집자)은 선거일이라서 이런 질문을 생각해 볼만하다. ‘정치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몇 주간 격렬한 소용돌이가 끝나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중간 선거가 진행 중에 있다. 감사하게도, 약 14시간 후면 끝날 것이다. 이제 2020년 선거나 되어야 다시 서로를 심하게 대할 수 있다. 

선거일마다, 계속해서 여러 말이 반복되는 걸 보게 된다. 이런 말들은 트위터에 방송되거나, 페이스북에 글이 올라오며 듣게 된다. 이는 ‘아멘’이나 ‘예배 후 식사’와 같은 말처럼, 기독교 문화의 한 부분이 되었다.

“이건 우리 기독교의 책임이다.”

“이번 선거는 중요하다. 투표는 우리 기독교의 책임이다.”

“이 나라의 미래는 위험하다. 정치 참여는 우리 기독교의 책임이다.”

“교회의 운명이 위험하다. 이를 지켜 줄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책임이다.”


그러면 정치에 대하여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하는가?

정말 우리 ‘기독교의 책임’인가? 아니면 단순히 성경적 제자도 대신의 기독교 문화의 산물인가? 이 두 문제가 미국 복음주의 제3 궤도를 건드리게 된다. 이 핵심 질문은 몇몇 교회에서는 파문 문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의문을 제기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이라면 필자(Daryl Fulp, 데럴 펄프)가 이 문제 때문에 크게 분노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잠시 이 질문을 묻기 위해서 항상 듣던 것을 안 들을 수 있는가? 믿고 사는 것이 사실 하나님의 말씀에 확실히 맞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 않은가?

이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의 정치적 개입과 관련하여 다음 주장을 던져본다.


1. 성경적 기준이 없다.

예수님은 정치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1세기 장면에 등장하셨다. 유대 민족은 로마 정부의 압제 아래에서 권리를 빼앗기고 엄청난 세금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더 이상 몇 가지 모세오경의 의식을 시행할 수 없었고, 정치적 변화를 원했다.

사실, 유대 민족은 메시아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메시아를 찾고 있었다.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와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이스라엘을 서열의 맨 꼭대기에 올려놓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행한 기적을 보며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고 믿어서, 예수님이 종려 주일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예수님을 크게 환대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왕국을 세우실 준비가 되셨다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셨다. 그러나 이들이 예상했던 왕국은 아니었다. 그래서 5일 후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예수님을 따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나갔다.

예수님이 정치적 구세주가 되시고 이 땅의 왕국을 세우시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영적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를 가르치시며 계속해서 말씀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정말 필요했던 것을 볼 수 없다는 자신들의 생각에 눈이 멀었다.

종교적 지도자들이 정치적으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질문을 예수님께 묻는 것을 한번 더 보자. 아마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놓쳤을 것이다.

a) 우리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가? 몇몇의 유대인이 일어나서 로마 정권에 세금 납부를 거절하려는 정치적 움직임이 진행 중에 있었다. 결국, 이들은 타락했고, 사악했으며, 세금을 내는 민족을 압제하는 데 자금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움직임으로, 사람들이 하나로 봉기해서 세금 납부를 거절할 만한 비판적 군중이 불어나기를 바랐다. 이런 정치적 가르침을 지지하는 것이 비판적인 군중을 얻는 데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을 보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임시적인 것을 구하는 정부에게는 임시적인 것을 주어야 하고, 정말 중요한 영원한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들은 정치적 답변을 원했지만, 예수님은 정말 중요할 수 있는 영적인 문제를 다루도록 질문을 회유하셨다.

b)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야 하는가? 이 이야기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들었을 것이다. 간음하다 걸려 돌을 들은 성난 군중들 속에 끌려온 여인의 이야기이다. 이 때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하신다.

이 질문은 영적인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인 질문이었다. 로마 정권은 유대 민족에게서 사형제도를 집행할 권리를 빼앗아서, 이들은 분노하였다. 다시 애기하면, 로마 정권을 뒤엎을 봉기를 찾고 있었다. 정치적인 해결책을 원한 것이다. 게다가 이 질문은 예수님의 대답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비판할 기회를 줄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적인 문제를 영적인 것으로 돌리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다. 그러자 갑자기 로마법을 보고 여인의 죄를 보던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을 돌아보게 되었다.


예수님과, 예수님이 세우신 초대 교회는 당시 정치와는 무관하였다. 믿는 사람들은 체포되고, 투옥되었고, 매를 맞았고, 믿음으로 인해 사형에 처해졌지만, 이를 행한 억압 정부에 불평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세상의 통치자나 왕국을 바꾸려는 모습이 없다. 대신에 어떤 통치 아래 있다 하더라도 주님께 영광을 어떻게든 돌리려는 모습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있기 때문에, 현재 정부의 지지와 보호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살고 있는 이 땅의 왕국을 통치하는 사람과는 상관없이, 제자를 삼고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는 왜 오늘날의 우리와 달라야 하는가?


2. 무엇이 최고인지 모른다.

매 선거 때마다 이런 얘기를 듣는다. “하나님의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 그리고 이에 걸맞다고 믿는 사람을 옹호하고, 지지하고, 지킨다. 그리고 이들이 지거나 지고 있으면, 당황하며 울부짖는다. 그리고 이기고 있는 것을 보면, 엄청 기뻐하고 종종 고소해 한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이 원하지는 것이 뭔지 모른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지도자를 세우시고 내리신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숨결 아래 쇠하고 사라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집권한다.

자, 하나님이 누가 집권하기를 원하시는지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사실 수차례, 하나님의 뜻과 반하여 싸워왔고, 열정으로 이를 행해 왔다.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우리 측 사람이’ 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인 우리가 이 땅 지도자에 대해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지침은 첫째, 이들을 예우하고, 둘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들의 흥망성쇠를 기념하라고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을 지지하거나 공격하라고 가르침을 받지도 않았다. 이들을 예우하고, 기도하고, 세계의 통치자가 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다. 


3.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 우리가 변하는 순간, 천국 시민이 된다. 갑자기 우리의 시민권은 영원하고 허점이 없는 땅에 있으면서, 임시적이고 타락한 땅에서 외국인과 이방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천국의 대사관이다. 이 새로운 하나님 나라는 충성과 헌신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의 초점은 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되는 데 맞춰져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고 이에 사로잡혀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제자를 세우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을 너무나도 고대하는 데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나라에 감사히 거주하며 이득을 받고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고, 싸우고 죽는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과 자비, 은혜, 봉사, 희생 위에 지어졌다. 전혀 다른 무기를 사용해서 전혀 다른 방법으로 싸운다. 그래서 바로 이 땅의 정치적 전투 방식과는 대립한다.

우리는 모든 이 땅의 왕국과 나라는 멸망할 운명이라는 것을 안다. 조만간, 이 일은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하고 유일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 분명 정치적이든지 아니든지 이 땅의 전투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관여하게 되면 진짜 본향의 사랑과 자비, 은혜와 봉사와 희생과 타협하게 될 것이다. 


4. 정치는 증상이지, 치료제가 아니다.

종종 신자들이 정치와 정부가 바뀌어야 한다며 토론하는 것을 듣게 된다. 이것은 1970년대 말 ‘도덕적 다수파’의 시작과 함께, 지난 40년간 복음주의 교회의 초점이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완전히 잘못되고 주객이 전도된 것에 진배없다.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정치는 단순히 국민들의 마음을 반영한 것이다. 타락하고 회복되지 않은 국민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부패한 지도자를 선출한다. 따라서 교회가 점점 더 정치적 해결책에 초점을 맞추고 제자 삼기와 멀어지면, 지도자의 자질에 따라 이 나라가 타락하는 것을 보게 된다. 점차 양당 후보자의 자질이 끔찍하게 타락하기 때문에 투표하면서 악취로 코를 잡게 된다. 지도자의 말과 행동을 용인하고, 30년 전에는 절대 용인될 수 없었던 것까지 옹호한다. 그러나 교회는 점점 더 예수님의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어렵게 하면서조차, 계속해서 정치적으로 해결하고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나라의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의회나 백악관이 하는 말을 따라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와 이웃에 살고 있는 예수님이다. 그리고 이를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생활습관과 기호나 정치적 의견과는 상관없이, 각계각층과 여러 배경의 사람들에게 다가가 사랑함으로써 제자 삼는 것에 너와 내가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우리의 정치는 사라지고 예수님이 드러나야 한다.


5. 우리의 사랑을 앗아간다.

최근 믿지 않는 친구 10명에게 개인 문자를 보냈다. 이들을 선택한 이유는 하나님과 성경, 혹은/그리고 예수님에 관하여 순수한 의심을 품는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 적의 없이 진정성 있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질문은 바로 “‘교회’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것이 떠오르나?”이었다. 모든 답변은, 하나도 빠짐없이, 정치와 연관되어 있었다.

사랑과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 신실, 온화, 자제와 같은 응답은 하나도 없었다. 몇몇 친구는 ‘분노’와 ‘가혹’이라는 말을 썼다. 두 명의 친구는 정치적 이중 잣대에 대하여 언급했다. 세 명은 정치 때문에 전형적인 복음주의 교회는 자신들을 환영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두 명은 최근 정치적 의견 때문에 페이스북에서 자칭 기독교인이라고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다고 했다.

자주, 자칭 신자들이 SNS에서 불신자들을 공격하는 것을 보게 된다. 가끔은 직접적이고, 또 가끔은 간접적이다. 정치인, 운동선수, 음악가나 배우가 좋아하지 않는 의견을 내게 된다면, 자유롭게 보이콧을 주장하거나 이들의 경력에 문제가 생기면 기쁠 수 있다. 이들을 적으로 보고 이들을 추격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울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인은 투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기독교인은 투표해서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일까? 아니다. 사랑과 겸손, 영이 이끄는 확신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도록 소명 받은 사람들에게 멀어지지 않고 투표할 수 있는 한, 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분명 말하고 싶다. 전체적으로, 교회가 최근 그러하듯이 정치적으로 계속 개입한다면, 이 나라는 계속 타락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께 답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반응은 좋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자, 내 무덤은 충분히 팠다. 그러나 오늘 투표할지의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고 제자 삼도록 기도할 것이라는 것이다.


대럴 펄프(Daryl Fulp)

대럴과 아내 완다(Wanda)는 ‘Hope for Home Ministries’의 책임자로 섬기고 있다. 과테말라 산 안토니오 아구아스 칼리엔테스(San Antonio Aguas Calientes) 지역에서 살며, 고아들과 함께 일한다. 장애나 목숨이 위태로운 아이들도 있으나, 아이들을 받아들이고 몇 년을 지내면서, 펄프 가족은 마음의 고통 보다는, 기쁨을 보아 왔다. 대럴은 선교사이자, 신자이자 아버지로서 삶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원문은 www.churchleaders.com 에 게시된 "It’s Not Our ‘Christian Responsibility’ to Be Politically Engaged" 이며, 문화선교연구원에서 비영리 목적으로 번역, 편집하여 한국교회에 소개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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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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