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탄 소년>



반응형

빛과 소금으로 사는 길

<자전거를 탄 소년>(다르덴 형제, 드라마, 12세, 2011)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은 대체로 무지하거나 혹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의 일상이나 생각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고 또 그렇기 때문에 발생하는 결과이다. 서로 상관할 만한 접촉점이 없기도 하지만, 그럴 만한 기회도 없고 또 소수를 제외하고는 가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문학과 예술을 통해 재현되는 현실은 그동안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세계의 존재를 알려줄 줄뿐만 아니라, 또한 읽고 보는 자들로 하여금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게 한다. 필자의 책 [영화 속 장애인 이야기]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쓴 것이었다. 개인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카메라를 포함한 각종 영상 기술을 통해 공적인 경험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영화 예술의 사회적인 기능이며, 공공신학의 한 방식이다.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스타가 아니라 보육원에서 살아가는 소년의 삶, 특히 그의 성장통이 우리의 관심 영역으로 들어오는 일은 그렇게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전거를 탄 소년>을 통해 우리 사회의 단면과 한 소년의 성장 과정의 편린들을 접할 수 있게 된다. 벨기에 출신의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영화가 우리에게 그렇게 멀게 느끼지 않는 이유는 보편적인 정서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영화 <완득이>와 비교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비록 이야기가 다르고 환경이나 등장하는 인물들의 관계가 다르긴 하나, 불우한 환경 탓에 자기 세계 안으로만 파고들어갈 수밖에 없는 완득이를 호명행위를 통해 세상 밖으로 불러낸 동주 선생님과 보육원 소년을 끝까지 돌보는 가운데 새로운 가족을 느끼게 한 미용실 주인 사만다의 모습이 영화를 보는 내 마음에서 오버랩된다. 어린이들을 지도하는 교사나 교역자들이 보면 좋겠지만, 가족 모두가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잘 만들어졌으면서도 참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보육원에서 지내는 시릴은 11살 소년이다. 엄마의 존재는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시릴은 할머니에 의해 양육되었다. 할머니의 사망 이후에 생계를 이유로 아버지는 시릴을 보육원으로 보냈다. 한 달 후에 온다는 말은 애초부터 지켜질 약속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릴은 그 말을 믿었고, 한 달이 지난 후에도 오지 않자 아버지를 찾아 나서려고 노력한다. 종종 보육원을 무단으로 이탈하여 보육원 관계자들을 난처하게도 또 힘들게도 하지만, 시릴은 조금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다시 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고집스런 희망을 품고 아버지 찾기에 필사적으로 매달릴 뿐이다. 시릴은 특히 자신이 타던 자전거, 집에 놓고 온 자전거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 아버지를 찾는 일이 곧 자신이 타던 자전거를 찾는 것과 동일했다. <자전거 도둑>(비토리오 데 시카, 1947)에서 자전거가 가족의 생계를 이어주는 상징이었듯이, 시릴에게 달리는 자전거, 넘어지지 않고 서 있는 자전거는 온전한 가족의 모습을 의미했다.

보육원을 무단 이탈하여 아버지의 옛 주소지를 찾아간 시릴은 자신을 좇아 온 보육원 관계자들과 씨름하다가 돌아가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우연히 만난 사만다를 붙잡는다. 그야말로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미용실을 운영하는 사만다는 보육원 관계자에 의해 이끌려 가는 시릴을 안타깝게 바라본 후에 시릴의 팔린 자전거를 수소문해서 찾아내고, 그것을 다시 구입해서 시릴에게 안겨준다. 보육원으로 직접 찾아갔던 사만다는 시릴의 요청에 의해 주말 위탁모가 되고, 시릴은 주말이면 사만다의 집에서 머물게 된다.

시릴은 사만다와 함께 힘겹게 아버지를 찾았지만, 식당에서 일하는 아버지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로 시릴과 함께 사는 것은 물론이고 만남조차 원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시릴은 크게 실망하여 자해를 한다. 비록 신체에 대한 자해는 사만다에 의해 저지되었으나, 그 영혼과 정신에 대한 자해는 사만다의 힘으로 막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동네 불량배와 어울리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사만다는 좋은 가정의 아이를 친구로 사귀게 해주면서까지 시릴을 배려해주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동네 불량배와 사귀지 말라는 사만다의 경고와 간곡한 요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릴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돈을 빼앗아 오라는 미션을 어떤 대가도 기대하지 않고 또 사만다의 온갖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수행한 것은 일종의 영혼에 대한 자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사만다는 자신의 남자 친구와 헤어지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밤에 나가기를 저지하는 자신을 가위로 찌르고 도망갔음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처한 시릴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돌본다. 사만다의 행위에서 진심을 본 시릴은 마침내 그녀와의 삶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둘이 함께 자전거를 타는 장면은 시릴과 사만다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해갔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혼자 자전거를 타고 사만다에게로 달려가는 비교적 길게 찍은 장면은 그가 더 이상 예전의 시릴이 아님을 암시한다.

비록 시릴에게 주목하는 영화이지만, 필자는 사만다에게 관심이 기울여졌다. 그녀가 시릴을 돌보게 되고 또 그토록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완득이>의 동주 선생님은 선생이면서 전도사라는 직업이 주는 사명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사만다의 과거와 생각에 대해서 영화가 철저히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분명한 것은 사만다의 진정성 있는 태도는 시릴의 변화를 가능케 한 결정적인 이유라는 점이다. 어쩌면 영화가 그녀에 대해 침묵한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꼭 이유가 있어야만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호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보호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사만다는 남자 친구와 헤어질 선택의 기로에서 시릴을 선택했다. 그녀의 선택은 옳았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작은 자이고, 옥에 갇힌 자, 굶주리고 헐벗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소년의 뒷모습에서 우리는 사만다와 같은 사람을 그리워하게 되고 또 이런 사람에게서 사회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빛과 소금은 꼭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야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일상의 삶에서 작은 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고 또 배려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반응형
카카오스토리 구독하기

게 시 글 공 유 하 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밴드

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미지 맵

    웹진/문화 다른 글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