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아뉴스 데이> 읽기 - 생명의 구원을 위한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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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 ‘아뉴스 데이(Agnus Dei)’는 ‘신의 어린양’을 뜻하는 라틴어다. 이 말은 크게 두 개의 의미를 갖는데, 하나는 희생 제물이고, 다른 하나는 희생을 통해 구원을 일으키는 자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코코 샤넬>(2009)과 <마빈>(2016)으로 한국관객에게 잘 알려진 안느 퐁텐 감독은 <아뉴스 데이>에서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면서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표현해내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위한 진정한 희생이 어떠한 것인지를 볼 수 있게 연출했다. 수많은 수상 이력이 말해주고 있지만 뛰어난 연출력을 바탕으로 한 수작이다. 한국에서는 2018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어 호평을 받았다. 

 

영화는 실화에 근거한다. 1945년 프랑스 적십자 소속 의사로서 폴란드 지역에 근무하면서 부상당한 채 잔류해 있던 프랑스 군인들을 치료하고 또 송환하는 일을 도운 ‘마들렌 폴리악’의 실화 이야기다. 그녀는 전쟁 후인 1946년에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70년이 지난 후 그녀가 쓴 노트가 발견되었다. 이 노트에는 그녀가 폴란드에 머물러 있는 동안 겪었던 일들에 대한 기록이 담겨있었다. 영화는 특히 폴란드의 한 수녀원에 숨겨진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생명의 구원을 위한 한 사람의 희생에 관한 이야기의 전모는 이렇다. 


폴란드를 차례로 점령한 독일군과 소련군은 그들이 체류하고 있는 동안 수녀원에 있는 수녀들을 강간했다. 대략 25명의 수녀들이 40번 이상 강간을 당했다고 하는데, 이 사건으로 수녀원 원장은 깊은 고뇌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이 알려지면 폴란드 당국으로부터 불신을 받을 것을 염려한 원장은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서든 수녀원을 계속 유지할 방도를 찾아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수녀들의 순결 서약과 관련해서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돕고 또 이를 통해 수녀원과 수녀들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원장은 우선적으로 수녀원에서 과거에 일어났고 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철저히 비밀로 지켜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임신한 수녀들의 출산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졌다. 더는 모든 것을 숨기기가 어려워졌다. 무엇보다 정상 분만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인 수녀들의 생명 자체가 위협 당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의사를 부르는 것조차 주저한다. 이 때 비정상 분만 상태에 있는 수녀의 위험 상황을 참지 못한 한 수녀가 원장의 허락도 없이 수녀원을 빠져 나와 폴란드가 아닌 프랑스 적십자 소속의 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마틸드는 수녀원에서 벌어진 끔찍한 소식을 접하고 자신의 신상에 문제가 생길 것을 알면서도 수녀들이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녀에게 최우선의 관심은 임신한 수녀들의 건강상태를 체크하고 또한 건강한 출산이 이뤄지도록 돕는 것이다. 그런데 마다 못해 진료를 허락한 원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비밀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기 때문에 임신한 수녀들을 검진하려는 마틸드와 마찰이 잦았다. 급기야 여러 수녀들이 한꺼번에 출산 진통을 하는 시기에 이르자 마틸드는 혼자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상급자인 동료 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해 그를 수녀원으로 데리고 옴으로써 원장에게 더욱 큰 불안감을 안겨준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원장이 수녀원에서 일어난 일들이 밖에 알려지기 전에 신생아들을 서둘러 수녀원 밖으로 입양 보내는 과정에서 자기 아이를 빼앗긴 수녀가 자살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원장은 아이를 수녀들의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보낸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인즉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길 기대하며(곧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며) 추운 겨울날임에도 아이들을 유기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리아 수녀는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원장에게 반항하고 아이들이 태어나면 원장에게 알리지 않고 신생아들을 마틸드가 머무는 곳으로 데리고 간다. 마틸드는 일련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심한 끝에 한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병원 주변으로 떠도는 전쟁고아들을 수녀원으로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아이들이 함께 양육을 받도록 하는 방안이다. 이렇게 되면 수녀원에 있는 아이들에 대해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수녀원은 비밀을 지켜 명예를 잃지 않을 수 있었고, 신생아들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으며, 또한 전쟁고아를 돌보는 선행을 한다는 소문을 얻을 수도 있게 되었다. 


생명의 가치보다 이념과 국가적인 야망이 더욱 우선시되는 전쟁 상황에서 어린 생명을 구하기 위한 마틸드의 몸부림은 충분히 감동적이다. 이런 점에서 수녀원의 명예를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신생아와 수녀들의 생명을 지킬 수 있게 한 마틸드는 비록 그 수는 다른 어떤 영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다하더라도 난세의 영웅으로 추앙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들렌의 실화를 영화화하면서 감독은 미국식 영웅주의 형태로 그녀를 영웅으로 만들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 않은 것 같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그녀의 삶을 부각시키긴 해도 다만 수녀들이 당한 피해를 통해 전쟁의 끔찍함을 폭로할 뿐 아니라 믿음의 시련을 겪는 사람들의 고민을 통해 진정한 희생이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하도록 했을 뿐이다. 이를 위해 영화가 주목하는 인물은 세 명이다. 원장 수녀와 마리아 수녀 그리고 의사인 마틸드다. 


원장의 믿음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수녀들이 수녀원에 들어서면서 했던 순결서약을 계속 지키는 일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어져온 수녀원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원장은 수녀들이 수녀원 내에서 강간을 당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수녀원에서 일어난 일들이 외부에 일체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강간에 의해 임신하여 출산한 아이들을 유기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비해 마리아 수녀는 수녀원에서 일어난 일들을 인간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일어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녀 역시 원장과 함께 비밀을 유지하려 노력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장과는 달리 수녀들의 건강을 체크하고 또 신생아의 생명을 지키는 일에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마틸드는 의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희생을 각오하며 최선을 다해 수행함으로써 많은 생명을 구해낼 수 있었다. 마리아 수녀의 고백에 따르면,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헌신적인 수고를 통해 수녀원의 명예를 지킬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수녀들과 아이들의 생명을 구했던 마틸드는 하나님의 도구로써 쓰임을 받은 것이다. 


시련 속에서 참다운 믿음의 모습을 보여준 사람은 누구일까? 원장 수녀일까 아니면 마리아 수녀와 마틸드일까? 원장 수녀는 전쟁을 통해 드러나는 야망에 사로잡힌 인간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비록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노력했지만(수녀원을 지키고 수녀들의 순결서약을 지킬 수 있도록 돕겠다는 마음에서 아이를 유기하는 죄까지 서슴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희생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제도를 유지하려 애쓰고 또 제도를 유지하기에 적합한 인간으로 자신을 제한하는 모습은 민족주의 야망에 사로잡혀 전쟁 이념에 스스로를 가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희생이기보다는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한 희생이었을 뿐이다. 

이에 비해 마리아 수녀는 원장 수녀에게 절대 복종한다는 서원을 깨면서까지 신생아의 생명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뿐 아니라 마틸드 역시 수녀원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상관에게 알리지 않고 수녀원엘 출입함으로써 병원 상관에게서 받는 혹독한 질책과 징계에도 불구하고 또한 수녀원에 오가는 길에서 러시아 군인에 의해 붙잡혀 강간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자신의 해야 할 일을 마쳤다. 감독은 마리아 수녀와 특히 마틸드의 이런 삶을 통해 생명을 구하기 위한 희생의 참된 의미를 부각시키려 했다고 여겨진다.


희생은 결코 맹목적이지 않으며 또한 결코 비합리적이지 않다. 희생은 분명한 목적을 지향할 뿐 아니라 목적에 부합하는 논리에 근거한다. 생명을 구하기 위한 희생은 제도를 공고히 하고 또 이념을 지키는 것을 겨냥하지 않는다. 이런 희생은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한 희생일 뿐이며 이런 희생은 갈등과 전쟁의 망령을 더욱 자극할 뿐이다. 오히려 진정한 희생은 비록 제도와 이념에는 치명적인 결과가 온다 해도 구체적으로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먼저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희생을 각오할 때 제도와 이념을 지키고 보존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설령 그렇지 못한다 할지라도 부활을 소망할 수 있다. 기독교 부활 신앙은 바로 생명을 구하기 위한 희생에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 곧 부활과 영생에 대한 약속을 믿는 신앙이다.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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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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