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기억의 밤> 읽기-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대의 단면, 그러나 반드시 기억돼야 할 이유에 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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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기억

오래 전 개인적인 기억으로 시작하겠다. 10년간의 독일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99년대에 처음 강의를 위해 광주를 오가면서 가장 궁금했던 건 5.18에 관한 광주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사건을 보는 시각과 느낌에서 외지인과 내지인이 분명 다를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가르치던 학생 중 상당수는 어린 시절에 일어났던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이가 들면서, 특히 5.18이 ‘광주 사태’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사건의 진실을 좀 더 알게 되었다고 했다. 나이가 꽤 든 학생들의 생각은 조금 갈라졌는데, 한편에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당시 상황에 대해 자신이 경험하고 또 들은 것들에 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였다. 이 중에 특히 관심이 갔던 부분은 기억하길 꺼려하는 사람들이었다. 

나이로 보면 충분히 그 때를 기억할 만한 시기이고 또 광주에 거주하였음도 불구하고 모두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민주화운동에 대해 어찌해서 말하길 꺼려하는 걸까? 그들은 말하기를 주저했을 뿐 아니라 당시를 회상하는 것조차 힘들어 했다. 몇 학기를 더 함께 보내면서 학생들과 친해졌을 때, 비로소 그 자세한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사연은 이랬다.

당시 사건이 발발했을 때 기독교인은 크게 세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하는 교인들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믿고 시위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던 교인들이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당시의 시국 사건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그저 교인들이 다치지 않기만을 바랐던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 가운데 당시 사건들에 관해서 말하길 주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두 번째에 속했다. 

물론 당시에는 단순한 평신도로서 목사님이 설교나 교육하는 자리에서 말하는 것을 듣고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시 모든 언론이 통제되어 있는 상황에서 일부 교인들은 사건의 내막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목사의 설교와 교육을 통해서 얻은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가족이나 친족 중에 아무런 희생자가 나타나지 않은 사람들일수록 더욱 그랬다. 

세월이 지나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고, 과거 자신이 들어서 알고 있던 것들이 거짓이었음을 알고 난 후, 그들은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삶이 갑자기 가짜로만 여겨졌다고 했다. 그들에게 당시에 대한 기억은 다만 사건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자신의 거짓과 가짜 인생을 들추어내는 일이고 또 부끄러운 삶을 폭로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기억 자체를 거부하고 또 그 사건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한 것이다. 이런 부류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는 특히 비교적 보수적인 성향의 개신교 목회자들과 그 목회자들이 담임하고 있는 교인들이 많이 속해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필자가 들은 내용은 대충 이랬다.

이는 목회자들이 정부 발표만을 믿고 교인들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에 발생한 안타까운 결과였다. 당시에 일어난 사건은 광주에 사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에게 슬프고 고통스런 일이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는 자부심을 주는 기억이고, 누구에게는 더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다. 한 시대를 기억하는 일과 관련해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건 결국 그 기억에 얽힌 이해관계와 감정 때문이었다. 모두에게 고통을 수반한 사건으로 그것은 기억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를 초래하였다.

 

기억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감정의 충돌

<기억의 밤>을 본 후에 이런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되었고, 이것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들여다보면, 영화는 특정 사건에 대한 기억의 차이에 천착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년 전(IMF 시기)에 일어난 모녀 살인 사건에서 살인자는 고통 때문에 그 당시의 기억을 통째로 상실하고, 피해자는 끔찍한 기억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건다. 특정 시기의 특정 사건과 관련해서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상태에 놓인 까닭은 그 사건에 얽힌 상반된 입장과 그들이 겪은 공통된 감정(고통) 때문이다. 매우 고통스러웠던 감정 때문에 가해자는 의도적으로 기억을 상실하고, 피해자는 의도적으로 기억을 반추하며 그것을 보존하였던 것이다.

이런 차이가 만들어내는 역학관계를 장항준 감독은 미스터리와 공포영화에서 즐겨 사용되는 전형들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다.(예컨대, 새로 이사한 곳이지만 낯이 익은 듯이 보이는 집, 어딘가 어색한 가족관계, 신경쇠약, 최면술, 폐쇄된 방, 비 내리는 밤, 꿈과 현실 등) 단적으로 말해서 <기억의 밤>은 장르적인 측면에서 꽤나 많은 공을 들인 작품이다. 영화 초반부엔 거의 공포영화에 가까운 물리적인 장면들로 가득하다. 후반부에 나오는 주인공 진석(강하늘)이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낯설어 하는 장면은 극도의 심리적인 공포심을 유발한다. 

영화는 이처럼 장르적인 재미를 만끽하도록 하면서 또한 기억이라는 소재를 통해 매우 특별한 의미를 영화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앞서 말한 대로 그것은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과 기억을 통해 그 사건이 일어난 시대를 소환하는 것이다. 

사람은 갑자기 커다란 충격을 받으면 의식적으로 그것을 잊으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사건에 대한 기억이 고통을 함께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당한 고통을 겪어본 경험이 있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일정 기간의 기억이 상실할 수 있다는 심리학적인 정보에 근거를 둔다. 관건은 의식적으로 기억을 지워버릴 만큼 충격적인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영화는 바로 이 사건을 향해 나아가면서 서로 다른 입장의 두 사람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끌고 간다. 

스토리텔링에서 문제가 있다면, 장르적인 재미를 주는 일에서 끝까지 장르적인 맛을 유지하지 못한 것이다. 복합장르를 시도하다 실패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니까 장르적인 긴장감은 초반부에만 반짝 비쳤을 뿐 금방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고 다른 장르적인 맛으로 바뀐 것도 아니다. 진석은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이 가짜임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자신이 진짜로 누구인지가 궁금해진 상황에서 너무 빨리 혹은 너무 친절하게 모든 진실이 밝혀지도록 연출되었다. 장르적인 재미를 따르던 사람들은 급작스런 변화에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적인 장르가 아니라 영화가 말하려 하는 의도에 유념하여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렇게 허접하다고만 볼 수 없다. 물론 감독의 연출력의 부족이라고 볼 여지도 충분하지만, 일단 긍정적으로 보자면, 어쩌면 호오가 갈리는 평가는 너무 복잡한 스토리텔링 때문에 관객이 길을 잃지나 않을지 염려한 감독의 배려 때문에 빚어진 결과일 수 있다.

 

영화 이야기

일정 기간에 대한 기억 상실은 영화에서 두 번 나온다. 하나는 형의 역할을 하는 유석(김무열)이 납치 후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억상실이고, 사실은 아무 혈연관계가 없지만 동생으로 나오는 진석에게 일어난 20년 전의 일에 대한 기억상실이다. 두 사람 모두 고통과 충격 때문에 의식적인 기억 상실을 겪는다. 두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걸까? 사실 유석에게 나타난 기억 상실은 복선의 의미가 있는 가짜다. 진석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현장을 재현하는 연출 과정에서 일어난 해프닝을 은폐하기 위한 조처였다.

유석은 어린 시절 엄마와 누나가 살해된 현장을 목격한 후로 당시의 끔찍한 기억을 결코 잊지 못한다. 더군다나 친척집을 전전긍긍하다 사망 보험금으로 받은 돈 마저 모두 빼앗긴 채 아동보호소로 맡겨진다. 공소시효가 지나기까지 사건이 해결되지 않자, 유석은 직접 범인을 찾아 나선다. 마침내 범인을 찾았는데, 공교롭게도 범인은 과거의 사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누가 보더라도 살인자 같아 보이지 않을 정도다. 결국 그가 범인이라는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실토하지 않는 한, 살인 사건은 오직 유석의 기억에만 남아 있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다. 정작 가해자는 기억하지 못하고 피해자인 유석의 기억에만 남아있는 사건은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진석이 스스로 살인자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 죽는 건 무고한 사람에 대한 살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석은 최면술을 사용하는 심리학자를 통해 범인의 기억을 되돌리는 방법을 실행한다. 현장을 그대로 재현하여 충격을 줌으로써 범인으로 하여금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유석의 계획은 좌절되고 오히려 범인은 전혀 뜻밖에 당한 교통사고를 통해 과거를 기억해낸다. 그 기억에서 범인은 진석으로 밝혀진다. 기억의 내용은 범인인 진석은 물론이고 유석을 죽음으로 이끄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놀라운 장면은 진석의 기억을 통해 자신의 고통이 진정 무엇 때문인 것인지를 알게 되었을 때 유석이 택한 자살이다. 그는 왜 죽었을까? 자살로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사실은 자살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엄마가 죽기 전에 엄마 앞으로 생명보험을 들었다. IMF 시기에 병원이 경영난에 빠지자 아내의 사망보험금을 타서 문제를 해결해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형의 치료비가 필요했던 진석에게 살인을 청부했다는 사실을 유석은 추측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유석은 단지 추측했던 일들이 진석의 기억을 통해 사실로 밝혀졌을 때 겪은 충격을 이기지 못한 것일까?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충격적인 과거를 알고 난 후 삶의 의지가 꺾인 걸까?

피해자가 현존하는 상황에서 정의는 가해자와 그의 행위에 대한 정당한 법적인 절차를 전제한다. 비록 공소시효가 지났다 해도 가해자의 기억은 최소한의 정의를 위한 단초가 된다. 그러나 만일 객관적인 기억을 보증하는 공소시효도 지나고 또 주관적인 기억마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사건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과거 살인사건은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망상에 불과한 걸까? 영화 속 유석의 생각이 망상이 아니기 위해선 진석의 기억은 회복되어야 했다. 유석이 그토록 가해자를 찾기 위해 모든 생을 걸었던 이유는 바로 자신의 기억이 망상이 아님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기억의 공유는 사건의 존재와 진실을 밝히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치명적일 수 있는 결과 때문에 잘못된 과거는 덮어야 하는 걸까?

이 사실은 오늘 우리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의 범죄에 대한 태도를 어느 정도 조명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경우 범죄사실이 현저하고 또한 피해자가 존재함에도 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건 자체를 무효화하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피해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기억에만 남아 있는 사건들은 망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기억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자신이 받게 될 고통 때문에 의도적으로 기억을 잃을 수도 있지만, 권력은 공감 능력을 상실하게 한다는 연구 결과에 비춰보면, 그들이 고통 때문에 기억 상실에 빠졌다고 볼 수는 없다. 그건 단지 자신의 위법행위를 은폐하기 위한 기억 상실을 가장하는 것일 뿐이다.

국정농단과 온갖 불법 행위로 탄핵되었을 뿐 아니라 범죄자 신분으로 전락한 박근혜 시대는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분명 어떤 사람들은 그 시대에 치부하여 살았지만 역사의 심판을 받은 충격 때문에 의도적으로 잊으려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 시대가 안겨준 고통 때문에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억해내려 할 것이다. 이런 상반된 노력들은 우리 사회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다. 한쪽에서는 은폐하려는 시도가 거세게 일어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적폐청산을 이유로 들춰내려고 해, 기억과 관련한 상반된 노력은 심각한 정치적 갈등국면으로 나타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듯이, 기억을 통해 진실이 밝혀지면 모두에게 치명적인 결과가 나타날까? 그래서 과거는 잊고 또 묻고 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비록 고통스럽다 해도 진실은 기억되어야 하는 것인가? 영화는 대답하지 않고 단지 고통을 극복하지 못한 두 사람의 죽음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질문을 제기할 뿐이다.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진실은 밝혀져야 할까, 아니면 어떻게든 살기 위해 잊고 묻고 가야 할까?

사실 용서를 기대할 수 없는 기억은 공포에 가깝다. 그러나 기독교는 회개와 용서를 말하면서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무리 충격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결과적으로 미래의 삶에 기여할 것임을 강조하여 말한다. 어쩌면 기독교가 가장 중시하는 건 바로 이런 관계가 아닐지 싶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아무리 충격적인 진실을 드러낸다 해도, 만일 그것을 인정하고 돌이킨다면 그리고 죄 용서를 구한다면, 하나님은 그 충격적인 사건을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바꿀 것을 약속하셨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용서에 관한 가르침은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는 일에서 용기를 북돋아준다.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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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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