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남한산성> 읽기 - 왕과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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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사극 영화나 드라마는 많은 경우 현대사와 묘하게 맞물려 과거를 재현함으로써 오늘날의 정세를 새롭게 조명하도록 해주며, 또한 이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과거를 다시 들여다 볼 뿐 아니라 오늘의 문제를 다른 각도로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 다수 정치인들이 사극 드라마나 영화에 주목하는 이유다. 외세로부터 잦은 침입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한반도가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때가 있었지만, 오늘날 이웃하는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줄다리기 해야만 하는 대한민국의 상황은 과거 역사적인 정황과 많이 닮아 있다. 특히 명과 청, 명과 일본 사이에서 줄다리기해야 했던 조선의 과거는 오늘날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힘겹게 자리매김하는 대한민국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훈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남한산성>은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외세의 침입이 유독 많았던 한반도의 슬픈 역사들과 자주 오버랩 된다. 


유명 작가의 소설을 바탕으로 해서 만든 영화라 그런지 영화로 제작된다는 사실만으로 많은 기대가 집중된 작품이지만, 책을 읽은 관객들은 영화적인 측면을 위해 조금은 다르게 각색되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소설을 그대로 기대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소설과의 차이는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정확하게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명절을 기해 개봉되는 만큼 김훈 작가의 유명세와 황동혁 감독(<도가니>, <수상한 그녀>)이라는 흥행 아이콘이 만나 얼마나 큰 상승효과를 낼지는 두고 볼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영화가 두 사대부 간에 벌어진 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다소 딱딱하고 또 영화적인 묘미가 조금은 떨어져 과거 흥행몰이에 성공했던 사극과 비교할 때 조금은 다른 반응이 나타나지 않을지 염려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병헌과 김윤석을 포함한 많은 연기파 배우들의 열연과 캐릭터를 대사와 눈빛 표정으로 훌륭하게 표현한 두 주연 배우의 연기는 대사 중심의 지루한 영화로 흐르는 것을 막아준다. 또한 간헐적으로 전개되는 청과의 전투 장면은 지루함을 씻어주기에 충분한 효과를 발휘한다. 게다가 세계적인 영화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가 음악 감독으로 참여한 작품이라 볼거리와 들을 거리는 물론이고 생각할 거리까지 풍성한 영화이다. 


필자는 이 영화에서 크게 두 가지 점에 유의하게 되었다. 하나는 화친과 척화를 두고 인조 왕(박해일) 앞에서 벌이는 최명길(이병헌)과 김상헌(김윤석)의 첨예하게 대립되는 논쟁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서민 계층의 서날쇠(고수) 캐릭터를 대하는 당시 관리들의 태도다. 두 가지는 특히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한다.

<남한산성>은 강대국 사이에 끼여 수차례 위기를 겪어야 했던 한반도의 운명 중에서 한 단면을 다룬다. 특히 조선의 역사에서 “삼전도의 굴욕(1637)”으로 알려진 사건이 중심에 있다. 명과 청 사이에서 균형 있는 외교 관계를 유지하던 조선은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 명으로 기울어졌다. 청은 오랑캐의 나라라고 하대했기 때문이다. 조선에 의해 오랑캐로 여겨졌지만 국호를 청으로 바꾼 후로는 조선에게 그동안의 형제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하고 또한 지나친 공물을 요구해 왔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척화배금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욱 큰 힘을 얻게 되었다. 게다가 명과 싸우고 있는 청과 군신의 관계를 맺는 일은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조선으로서는 도대체 가능하지 않았다. 청나라는 인조 왕이 자신의 요구를 거부하자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이것이 병자호란(1636년 12월)이다. 7년 동안 진행된 임진왜란의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던 조선이 명과 대립하고 있는 청나라의 요구에 그렇게 쉽게 굴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비록 임진왜란에 비해 기간은 짧았어도 피해는 막대했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미처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한 인조 왕과 조정의 대신들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삼전도의 굴욕’은 남한산성에서 한 달 조금 넘는 기간을 버티다가 결국엔 화친 제의를 받아들여 인조 왕이 삼전도로 나와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세 번 큰절을 올리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다시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항복의 예)의 치욕스런 항복의 예를 갖춘 행위를 가리킨다. 영화는 바로 이런 굴욕을 결정하기까지 청을 상대로 벌인 조선의 항쟁과 남한산성에서 화의와 척화를 주장한 두 충신의 논쟁을 다룬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삼전도의 굴욕은 청과의 관계에서 시대의 변화를 읽어내어 실리를 추구하여 화친을 주장한 이조판서 최명길과 청을 오랑캐로 여기고 대의명분을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할 것을 주장한 예조판서 김상헌의 논쟁에서 최명길의 주장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역사에서는 최명길을 주화파라 하고 김상헌을 척사파라 하는데, 당시 최명길은 굴욕적인 화친을 주장하여 역적으로 몰리기도 했다. 그만큼 대세는 척사배금 정책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두 사람의 논쟁은 그야말로 동일하게 직면한 외교적인 위기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일종의 정책 토론이다. 그런데 논쟁은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외세의 침입으로 국가적인 위기에 직면해서 무엇이 진정한 삶이고 무엇이 진정한 죽음인지를 두고 벌이는 치열한 공방전은 정치 이념을 두고 전개한 논쟁을 넘어 철학적인 대화이다. 그렇다고 사변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현안을 두고 벌어진 의견의 차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최명길은 후일에 재기하기 위해 생명을 보존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고 잠시잠간의 치욕은 왕이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김상헌은 왕이 구차한 삶을 선택하느니 차라리 당당하게 죽는 것이 낫다는 논리로 맞대응한다. 김상헌의 논리는 겉보기에는 사대부의 대의명분을 존중하는 것으로 보이나, 삶이란 것이 정신의 구현이라는 맥락에서 본 결론이다. 따라서 올바른 정신에 따라 살지 못하는 상황에선 차라리 죽는 것이 역사적인 흐름에도 맞고 또한 후대의 삶을 위해 귀감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왕은 결코 개인이 아니라 나라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니 후대의 바른 삶을 위해 치욕스런 삶을 버리고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라는 결론이다. 다시 말해서 김상헌에게 관건은 생명보존 자체가 아니라 올바른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를 만드는 올바른 행위이며, 만일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오히려 후대들의 바른 삶을 위한 이정표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후일의 삶을 위해 굴욕적인 삶을 선택해야 하는지,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지, 그야말로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 앞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명분을 중시하는 유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김상헌의 주장은 많은 조정대신의 지지를 받는 주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성리학의 전통이 강했던 조선의 인조 왕 역시 척사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척사배금의 정책을 펼쳤고, 또한 청의 무리한 요구를 거부한 채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쟁의 기회를 엿보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결국엔 최명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영화적인 표현에 따른다면-인조 왕 역시 죽기보다는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굴욕적인 화친으로 왕의 생명을 구하긴 했어도 그로 인해 겪어야 했던 백성들의 고통과 슬픔은 결코 작지 않았다. 청의 황제는 50만 이상의 백성들을 볼모로 삼아 청나라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명길의 주장을 단순히 실리를 추구한 결과였다거나 목숨을 구하기 위한 임기응변이라고만 보는 건 다소 근시안적이다. 필자는 최명길의 주장에서 임금과 나라, 임금과 백성, 나라와 백성의 관계와 관련해서 당시 시대를 넘어서는 깊은 성찰을 엿볼 수 있었다. 물론 그가 당시 명분보다 실리를 추구하여 성리학으로부터 이단으로 여겨진 양명학(陽明學)에 밝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의 생각과 주장이 봉건주의 시대에 지배적인 임금(통치자)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서 당시까지 임금은 곧 나라였다. 절대군주의 대명사인 루이 14세가 말하는 ‘짐이 곧 국가’라는 주장이 통용되는 시대였다. 임금은 나라이기 때문에 임금이 굴복한다는 건 곧 나라와 백성의 굴복을 의미했다. 따라서 적어도 조선을 사대부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겐 임금의 굴복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임금은 결코 개인일 수 없기 때문이다. 왕이 자신이 살자고 굴복하는 건 백성 모두에게 굴욕을 안겨주는 일이다.


그런데 최명길은 임금과 나라를 분리하고, 또한 임금과 백성을 분리한다. 곧 그는 임금이 굴욕을 당해 나라를 살릴 수 있고 또한 백성들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면, 한 개인으로서 임금은 그런 치욕 정도는 기꺼이 이겨내어야 한다고 말한다. 후일을 기대하기 위해 그리고 백성들의 삶이 계속될 수 있기 위해 왕이 마땅히 가야할 길이라고 한다. 여기서 임금은 나라와 동일시되고 있지 않으며, 백성이 임금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백성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역사적으로 볼 때 삼전도의 굴욕이 비록 백성을 위한 인조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해도, 인조 왕과 삼전도의 굴욕은 결코 청의 억압으로부터 나라와 백성을 구해내지 못했다. 50만이 넘는 백성들이 볼모로 청나라로 끌려가 고초를 겪어야 했으며, 일부는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돌아올 수 있었으나, 일부는 평생 노예로 살다 타국에서 뼈를 묻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관점에서 최명길의 주장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는 차치하고(한일합방을 성사시킨 매국노 5적의 모델로 보는 사람이 없지 않다), 당시 한 신하의 입에서 이런 생각을 표출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충격적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인조가 최명길의 견해를 받아들여 삼전도의 굴욕을 감내했다는 사실은, 비록 왕 자신이 살기 위한 방책으로 선택한 일이었다고 해도, 조선의 역사에서 새로운 전조가 아니었을지 싶다. 물론 그 후 통치자와 나라가 분리되고, 국민이 통치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은 바로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그것은 근대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비로소 현실로 나타나는 일이었더라도 최명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조선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오늘날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앞으로 우리 세대가 논쟁해야 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필자가 주목한 또 다른 한 가지는 당시 조선의 폐쇄된 신분사회이다. 노비출신으로 나라에서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하다가 청나라의 군인이 된 정명수(조우진)를 통해 당시 조선의 폐쇄적인 신분사회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대장장이 서날쇠의 태도에 대한 당시 관리들의 반응은 이런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대장장이로서 전투에 참여한 결과 서날쇠는 화포의 치명적인 결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윗선에 지적하고 건의했지만 무시되었고, 목숨을 걸고 성 밖으로 나가 청의 추격을 따돌리며 격서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가 단지 군인이 아닌 대장장이라는 이유로 어인이 찍힌 격서마저도 신뢰하지 않은 것이다. 진실 그 자체를 보기보다는 신분에 따라 진위를 판가름하는 희한한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예외는 아니며 사고의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 한 우리 사회에서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사대주의에 빠져 있거나 자신의 입신양명만을 생각하며 정치적인 입지를 중시하는 사람들 그리고 차별과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태도이다. 


물론 예조판서 김상헌은 달랐다. 그는 비록 대장장이의 말이라도 그 말이 옳았기 때문에 받아들였고, 심지어 대장장이 서날쇠에게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을 맡길 정도로 그를 신뢰하기까지 했다. 역사는 한 번 지나가면 그만이라서 함부로 평가할 수 없으나, 만일 김상헌이 원하고 또 의도한대로 되었다면, 다시 말해서 서날쇠를 통해 전해진 격서를 받고 관리들이 반응하여 남한산성 밖에 있던 군사들이 지원 공격을 해주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10만 대군의 청을 감당하지 못해 삼전도의 굴욕을 피할 수 없었을까? 아니면 지금과는 다른 역사가 진행되었을까? 비록 상상에 불과한 질문이겠으나, 나라를 황폐하게 만드는 주범은 국가의 운영을 자신의 이해관계 아래 놓으려는 정치인들과 작은 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국가 지도자들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는 진리다. 


현재 대한민국은 열강의 이해관계를 사이에 두고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 19세기 말 한반도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특히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서 강대국들은 한반도의 평화 자체를 위해 일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국가적인 이익만을 관철시키려 애쓰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미국과 일본, 중국과 러시아의 입장이 그렇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국가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 국내는 물론이고 외교 관계에서 첨예한 갈등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고 있다. 과거와는 상황이 현격히 다르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로 실리와 명분의 갈등은 늘 논쟁의 중심에 있다. 우리는 과연 누구의 편에 서서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관건은 정당의 권력 쟁취를 위한 이해관계나 통치자의 권력 유지를 위한 이해관계를 초월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라가 지속할 수 있는 방향에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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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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