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눈길> 보기 - "눈길을 걸을 때 함부로 걷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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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현대적인 의미를 탐색하는 영화들이 대체로 그렇지만, 일제 만행의 역사를 고발하는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다룬 영화 <눈길> 역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영화에서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일은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단순한 회상일 수 있지만, 때로는 오직 느낌만으로 경험되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기도 하다. , 현재와 과거가 겹쳐있는 사건을 다룰 때나 과거의 영향력에서 현재를 조명해보고 싶을 때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 플래시백을 사용한다. <눈길>에서 플래시백은 현재와 겹쳐지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되묻는 맥락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의미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눈길은 오늘 우리가 걷는 또 다른 길이기도 하다. 누군가 앞서 걸어가 만들어 놓은 그 길, 그 길을 우리는 걷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시작한 길이며 또 어디로 향한 길인지를 물으면서, 그 길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길인지를 묻는다.

 

15살의 어린 소녀들의 발자국이 확연하게 새겨진 눈길이었다. 오랫동안 걸어왔음에 분명한 발자국은 핏자국으로 선연하다. 그 길은 고향과 엄마의 품으로 향한 길이었지만, 그것은 분명 자유와 해방을 향한 길이었다. 지금은 우리가 그 길을 직접 걸어가 볼 순 없지만, 적어도 그녀들에게는 어떤 길이었는지는 분명하게 전달되는 것 같다. 눈이 주는 포근한 이미지만을 보고 마음 설레게 하는 길이라고 말할 수 없는 험한 길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결코 사막 길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길이다. 출애굽 후 걸어야 했던 광야길이 자유와 해방을 향한 길이긴 했어도, 결코 꽃길만은 아니었다는 사실과 유사하지 않을까.

 

군'위안부'를 소재로 삼아 만든 <귀향>은 오랜 시간에 걸쳐 힘겹게 제작되었을 뿐 아니라 제작 후에도 개봉관을 얻기가 쉽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하는 영화가 한국에서도 방해받고 있었다는 분명한 사인을 확인할 수 있었던 현상이었다. 개봉 후의 반응은 우려와 달리 많은 관객들을 감동시켰다.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눈을 직접 보고 난 후의 반응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전후로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이야기들이 문학과 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건 비록 슬픈 역사이긴 해도 일본군의 만행과 피해자의 고통을 잊지 않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의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당사자들이 겪었던 고통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 없이 돈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본 정부의 태도도 문제이지만, 정부 간 밀약으로 모든 문제를 덮으려는 한국 정부의 태도는 더욱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렇게 해서는 위안소에 동원된 여성이라는 말로 결코 다 담을 수 없는 그들의 억울함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목받는 건 단연코 그들의 고통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해주는 그녀들의 실제 이야기들이다. <귀향>은 그녀들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또 어떻게 처절한 죽음을 당했는지를 생각하게 하면서, ‘귀향이라는 주제를 통해 그때 그녀들이 못다 푼 한들을 오늘 우리들의 문제로 삼으려는 의지를 표현했다. 이에 비해 <눈길>은 그때 그녀들이 어떻게 그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 살아남았는지에 착목하여 이야기를 전개한다. 공동의 기억을 위한 동일한 노력의 결실이라도 그때 그녀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씩 다를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 영화가 사건의 단순한 재현보다는 현대적인 의미를 묻는 다양한 주제 안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듯이, 일본군 '위안부' 영화 역시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길>은 비록 표현의 반복이 있긴 해도 다른 관점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현실을 볼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특히 서로 다른 신분의 두 소녀들(부잣집 막내 딸 영애와 가난한 집안의 딸 종분)이 고통의 현실에서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위한 존재일 수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영화는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진 대한민국 사회가 국제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건강한 미래를 위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방향까지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비록 그때와 같은 동일한 희생을 말할 수는 없지만, 현대적인 의미에서 버려지고 착취당하고 위험에 노출된 어린 소녀들이 존재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영화를 통해 나는 어려운 사람들을 방치하지 않고 그들을 이웃과 국가가 함께 책임을 지는 자세로 나아가야 소녀에서 이제는 할머니가 된 그분들의 한이 진정으로 풀어지는 건 아닌가라는 의문을 들을 수 있었다. 이를 위해서 감독은 오늘의 문제와 연결해서 과거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한편, 영화는 그때 그 소녀들이 남긴 기록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한다. 아주 소박한 꿈들을 읽어볼 수 있는 표현들이다. 돌아가서 가족과 함께 엄마가 만들어준 밥을 먹고 싶다는 것이나,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있고 싶다는 이야기, 그리고 포근한 목화 솜 이부자리를 떠올리는 이야기들. 그들은 지옥 같은 현실에서 이렇게 소박한 꿈을 꾸며 스스로를 달랬고, 그 꿈을 희망 삼아 어려운 시절을 견뎌 냈다.

 

이런 꿈과 함께 이나정 감독이 특별히 주목했던 점은 그때 그녀들이 절망의 상황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살았던 모습이다. 아무런 도움도 없고 그저 내동댕이쳐진 채 오로지 생존을 위해 일본군의 욕망의 노예가 되어야 했던 그때 그녀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또 서로에게 도움이 되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친구들이 죽고 혼자 남아 있는 지금까지도 그렇다. 그들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또 지금까지도 따가운 시선을 이겨내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서로가 서로를 보듬는 마음 때문이었다. 자기 몸을 추스르기에도 쉽지 않았을 상황에서 그녀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힘을 북돋아주었고, 서로를 돌보며 마음의 상처를 위로했다. 감독은 이것이 현실에도 여전히 유효하게 작용함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렇기 때문에 강제로 끌려간 소녀와 부모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며 홀로 힘겹게 살아가는 한 소녀의 현실을 겹쳐 보이도록 했다고 여겨진다. 시간도 다르고 사람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지만 텅 빈 공간에서 부모 없이 혼자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소녀의 마음으로 군 '위안부' 소녀의 마음을 읽어내려 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가운데 거듭 등장하는 고등학교 여학생 때문인데, 그녀는 할머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부끄럽다고 했을 때,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일본군이 나쁜 놈들이었다는 그녀의 말을 통해 확신할 수 있었다.

 

서산 대사의 시이지만, 김구 선생이 인용하여 잘 알려진 시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눈길을 걸을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그때 그녀들이 걸었던 눈길은 결코 함부로 걸은 것이 아니었고, 피로 얼룩진 그 길은 오히려 오늘 우리들에게 거울이 되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최성수 박사가 본 <눈길>은?   기독교적 가치      작품성      대중성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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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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