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인페르노> 보기 : 고통의 지연과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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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페르노>를 계기로 소설가 댄 브라운과 영화감독 론 하워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게 되었다. 게다가 이미 전작 <다빈치 코드><천사와 악마>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톰 행크스의 출연으로 세 사람의 관계는 더욱 특별해졌다. 소설과 영화의 협업에 있어서 세 사람의 조합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다빈치 이후 최고의 르네상스적인 인물로 회자되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과 같이 댄 브라운의 소설 역시 기호학을 소설의 기법으로 사용하고 있다. 기호학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간과하지 않고 의미를 담고 있는 기호로 보며, 세상을 복합적인 기호체계를 갖춘 구조물로 인지한다. 이렇게 되면 세상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해독해야 할 코드가 된다. 인간 상호간에 공유된 인지체계를 바탕으로 코드는 계속 확장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변수는 더욱 증대한다. 이런 원리를 바탕으로 인위적인 코드는 무한히 만들어낼 수 있다. 모든 기호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기호와 기호가 서로 결합하고 충돌하거나 또는 서로 분리하면서 의미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기호해독을 위해서는 개별적인 기호의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관건은 의미작용의 기제를 파악해내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서 코드는 바로 기호를 매개로 일어나는 연상과 기호들의 결합과 충돌 그리고 분리과정에서 드러나는 의미들을 파악함으로써 해독된다. 기호를 통해 추리게임도 가능한데, 보물을 숨겨놓은 후에 단서를 제공하면서 수수께끼를 내면 그것을 기호로 삼고 해독하면서 답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기호학을 소설이나 영화에 사용할 때 얻는 장점은 사실에 근거한 상상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인 인물이나 물건들 그리고 장소들을 기호로 삼고, 기호와 연결된 연상, 기호들의 충돌, 결합, 그리고 분리 등으로 전개될 수 있는 이야기를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독자나 관객들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역사적인 사건과 사건 관련 장소와 각종 물건들 그리고 인물로 코드화된 기호를 해독하는 추리의 과정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일종의 팩션(faction)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이야기를 어떤 장르에 담느냐에 따라 또 다른 느낌을 주는 효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댄 브라운의 소설과 론 하워드 감독의 영화는 바로 역사적인 사실들을 기호로 삼고 기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의미작용을 매개로 이야기를 풀어간 것이다. 기호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추리는 불가피하고, 그래서 연속적인 긴장감이 지배한다. 그동안 두 사람이 협업하여 이뤄낸 영화들을 보면, 두 사람 모두 기호학에 매료되어 있다고 추측하는 것은 결코 지나친 일이 아니다. 기호학에 대한 관심이 없이 소설의 유명세에 의존해서만 영화를 만들었다면 다른 작품들을 계속 이어나가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댄 브라운은 움베르토 에코 이후 기호학을 소설의 스토리텔링의 도구로 사용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전작에 비해 <인페르노>는 이탈리아와 터키를 배경으로 하는데, 특별히 관광영화라 불릴 정도로 관광도시 피렌체와 베니스 그리고 이스탄불의 명소들을 영화를 통해 관광할 수 있도록 했다. 볼거리가 풍성한 영화다.

 

인페르노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편을 말한다. 중세에 널리 알려진 지옥에 관한 이미지는 대부분 이것을 차용했다고 여길 정도로 매우 회화적이며 신학적이고 또 생동감이 넘친다. 단테의 지옥을 더욱 생생하게 상상하게 만든 사람은 르네상스 화가 보티첼리이다. 그의 작품 비너스의 탄생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면 그가 단테가 묘사한 끔찍한 모습의 지옥을 그림으로 구체화했다(“지옥의 지도”)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림역사학자들은 그 나름대로 이유를 찾고 있지만, 단테가 베아트리체와의 만남을 상상하며 신곡을 썼듯이, 보티첼리 역시 평생 마음속에 품고 살았던 사랑하는 여인 시모네타의 죽음 후에 그녀를 염두에 두고 그렸다고 한다. 죽음의 지하세계를 그린 것이라 뒤집힌 원뿔 모양을 하고 있고, 맨 아래에는 루시퍼가 있다. 루시퍼 바로 위에는 성직 매매자를 포함한 성직자들이 있다.

 

(스포일러 있음)

<인페르노>는 보티첼리가 그린 지옥의 지도를 첫 번째 단서로 시작해서 전개된다. 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하버드 대학교 기호학자인 랭던 교수(톰 행크스)는 깨어나면서 일시적인 기억상실증을 보이는데, 그런 와중에 자신을 치료한 여의사 시에나(펠리시티 존스)의 도움을 받는다. 살해의 위협에서 자신을 구해주었기 때문에 시에나를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한 랭던은 그녀와 함께 의문의 단서들을 풀어나가면서 충격적인 사실을 접한다. 세계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로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고 믿는 생물학자 조브리스트가 미래의 지구멸망을 미연에 막으려고 흑사병보다 더 강력한 전염력을 갖고 있는 세균을 배양해서 그것을 숨겨 놓고 일정 시간에 터트려 전염병을 확산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의 계획은 사전에 노출되어 인구의 절반을 사망이 이르게 할 수 있는 세균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작업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진다. 세균이 숨겨져 있는 장소에 관한 핵심 정보를 코드화된 단서로만 갖고 있는 랭던 교수는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며 연이어지는 기호들을 해독하면서 마침내 숨겨진 곳을 찾아내 안전하게 제거한다는 이야기다.

 

영화 이야기는 사실 다른 작품에 비해 기호학적인 매력을 충분히 발산하지 못하고 있다. 굳이 랭던의 날카로운 통찰력이 없어도 영화 이야기는 충분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서로 얽히고설킨 기호들을 해독하면서 논리적으로 문제를 푸는 추리과정은 부족하고 오히려 미스터리에 가까운 이야기 구조다. 왜냐하면 단테의 지옥편이나 보티첼리의 지옥의 지도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를 매개로 미래의 묵시록, 곧 디스토피아를 보여주면서 사건의 신비함을 강조했지만, 영화에서 제시한 문제인 인구과잉과 지구의 종말에 관한 의문은 마지막까지 풀지 않고 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기호학적인 요소가 전혀 없진 않아도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적은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필자는 영화 속 이슈인 인구과잉과 지구의 미래에 관한 주제에 집중하고자 한다. 조브리스트는 인구과잉이 지구에 미칠 암울한 결과를 인류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미래학자들에 의해 자주 회자한 경고다. 차이가 있다면, 그는 인류가 지금 자정 1분전에 와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면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했고 또 실행에 옮기려 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고통의 지연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만일 나중에 결코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지금 피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지금 고통을 당하는 것이 더 낫다는 주장이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있을 멸망도 피할 수 있고 또한 멸망을 예상하며 당하는 고통까지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조브리스트는 과거에 발생한 전염병과 전쟁 그리고 자연재해 등이 세계 인구 조절에 기여한 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구를 인위적으로 조절할 방법을 스스로 마련한 것이다. 세계 인구의 절반을 사라지게 할 전염병을 일으킬 수 있는 세균을 유전자 조작을 통해 배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세계보건기구는 그의 계획을 막으려 한다. 조브리스트는 계획의 실행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 비밀리에 시한폭탄을 설치해서 일정 시간에 터지도록 만들어 놓았다. 만약을 위해 애인 시에나에게만 단서의 형태로 정보를 제공한다. 세계보건기구 요원들에 의해 쫓기는 중에 조브리스트는 계획이 누설되지 않기 위해 자살을 선택한다. 영화는 바로 이 장면으로 시작한다.

조브리스트의 계획에는 시에나가 단서를 풀 수 있도록 도울 랭던 교수를 끌어들이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이야기에 심각한 결함이 발견되는데, 시한폭탄이 설치되어 일정 시간이 되면 터지도록 계획되었다면, 굳이 시에라가 일을 완성할 이유도 없고 또한 그녀를 도울수 있도록 랭던 교수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되면 터질 것이기 때문이다. 랭던을 끌어들이면서 계획이 저지되는 결과가 되었다면, 랭던을 끌어들인 것은 오히려 화근이었다. 감독은 너무나도 분명한 오류를 왜 미처 보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이야기가 생략된 것일까?

 

앞서 말한 고통의 지연에 관해 생각해보자. 지금 고통을 감수하면 나중에 겪을 고통을 피할 수 있다고 할 때, 인류가 지금 그 고통을 지연할 이유는 전혀 없는 걸까? 조브리스트는 없다고 보고 계획을 세웠는데, 바로 이런 생각에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절망적인 생각과 함께 인간의 변화에 대한 불신이 크게 작용한다. 인류의 삶의 방식이 변하지 않을 것이며,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는 당연한 결과라는 숙명론적인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미래학적인 예측 방식으로는 결코 고려할 수 없는 소망의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인간이 미래를 알려고 하는 것은 다가올 일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행해질 수 있는 원인을 제거하고 밝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미래는 현재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데, 신학자 판넨베르크는 이것을 미래의 힘이라 했고, 하나님이 세상 통치에서 사용하는 방식이라 했다.

예컨대, 현재 디지털 기술 혁명을 기반으로 4차 산업혁명을 말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새로운 에너지 개발을 촉구하는 이유도 화석연료에 의지하는 산업이 지속되는 한 밝은 미래는 없다고 보고, 미래에는 환경파괴에 주요인이 되는 화석연료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친환경적인 에너지를 개발하여 지금 예측할 수 있는 미래의 고통을 피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과학자들은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예측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위기의 순간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면서 지금까지 왔다.

 

할 수 있는 한 인간의 고통을 지연시키고 또 그 사이에 대안 마련을 위해 노력한다면, 고통의 지연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고통을 지연하기만 할 뿐 대안을 마련하는 일에 태만하거나 소극적이라면,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는 피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의 과제는 미래를 위한 대안마련이 인류사회를 위해 그리고 신학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히고 또 그것을 설득할 논리를 개발하는 것이다.

 

개인이 역사를 책임지려는 일은 기독교적으로 볼 때 매우 무모한 시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세상의 구원을 자신의 과제로 여기는 일은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을 혼동한 결과로써 신학적인 오류다. 독재와 전체주의 사상이 바로 이런 잘못된 역사의식으로부터 비롯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비록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해도 인간은 현재 다른 인간이 겪는 고통이 줄어들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하며, 다만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 혹은 인류의 구원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생명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온다.

 


 최성수 박사가 본 <인페르노>는?    기독교적 가치       작품성      대중성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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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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