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으로 영화 <밀정> 보기 : 누가 총독부를 향해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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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 역사를 대개 일별하면 논쟁이 끊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부터 서로 경쟁하고 싸웠고, 통일국가가 된 후에도 계파간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피를 부르는 논쟁은 계속되었다. 조선 시대의 당파싸움에서 그 정점을 치는 것 같더니, 근대사에 들어서면서 좌우익 논쟁에 휘말리고, 지금은 여야 간의 정쟁으로, 진보와 보수 논쟁으로, 그리고 사사건건 종북 혹은 반공 논리로 시끄럽다. 대립 당사자들에게는 신념이고 또 생명을 내걸만한 진리로 여겨지겠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사변에 불과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 그러고 보면 양쪽 어디에도 서 있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항상 있었고, 특히 지식인들은 중간 지대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특히 해방 후 남북의 대립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그리고 이념과 현실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 때문에 어느 쪽으로 가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념과 현실의 차이가 빚어낸 벽에 부딪혔고 어쩔 수 없이 제3국행을 선택하여 고국을 떠나야만 했다. “이런 사회, 그런 사회로 가기도 싫다. 그러나 둘 중에서 하나만 골라야 한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그는 일어판 서문에서 이들을 가리켜 철조망이나 시멘트 벽 쪽을 골라 사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의 삶의 자리를 찾지 못해 떠도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갖고 살았는지 또 그들이 택한 제3국행이 어떻게 비극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해방 후 좌우익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때에도 제3국을 선택해 떠났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일제 강점기를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설령 조국을 택했다 해도 목숨을 걸어야만 했지만,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고 또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국민 모두가 일제에 맞서 싸우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를 몰락해가는 조선의 대안으로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정치를 펼쳐 결국 매국노로 불리게 된 을사 5적이나 내선일치를 종용했던 친일인사들도 수두룩했다. 조국의 멸망과 일본의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적극적으로 일본으로 귀화한 사람도 있었고, 일확천금을 노리며 일제에 부역하는 기업인과 관리도 있었고, 오직 살기 위해 일제에 빌붙어 사는 이들도 있었다. 조국의 독립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면서 또한 그렇다고 해서 조국을 등지고 살 수도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개중에는 처음에는 항일투쟁을 했다가 변절하여 일본 경찰의 관리가 된 사람도 있었다. <암살>(최동훈, 2015)에서 이정재가 맡은 역할을 통해 그런 사례가 소개되었지만, <밀정>은 실제로 일본 경찰의 경부로 있었던 황옥(1887~?)을 모델로 해서 만든 영화다. 황옥은 친일과 항일 사이를 오고가며 수수께끼 같은 인생을 살았는데,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인물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두가 항일 투쟁에 나선 것도 아니고 모두가 친일파도 아니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도 있었고, 두 개의 정체성을 오가며 시대의 아픔을 나름대로 소화해나간 사람들도 있었고, 회색지대에 머물면서 새로운 시대가 오기만을 기다린 사람들도 있었다. 황옥은 그 중의 한 사람으로서 뒤늦게 의열단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밀정>은 친일과 항일을 오가면서 미스테리한 인생을 살았던 황옥을 통해 오늘날 삶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 중간 지대의 사람들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판단하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밀정>은 제목이 주는 느낌처럼 밀정의 암중비약을 보여주면서 관객을 긴장시키며 쾌감을 줄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인천상륙작전>(이재한, 2016)에 등장한 첩보원들이 그랬듯이, <밀정>은 대놓고 밀정을 노출시킨다. 물론 끝까지 숨어 있다가 나중에 노출된 밀정도 있어서 긴장감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의 핵심은 밀정의 활약에 있지 않다. 한편으로는 밀정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다양한 배경을 드러냄으로써 조선의 미래가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었는지를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딛고 끝까지 조국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고통을 공감하도록 한다.

 

2.

이제 영화 안을 들여다보자. (스포일러 있음)

이정출(송강호)은 변절자다. 그는 독립군으로 있다가 변절하여 주요 정보를 일본 경찰에 넘겨주어 치명적인 해를 끼친 후에 그 공으로 일본 경찰의 경부가 되었다. 변절자란 신념을 전제한 말이다. 신념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에 행동은 물론이고 태도와 삶이 변한 사람이다. 이정출의 변절은 신념의 변화라기보다는 조선의 독립을 더 이상 전망할 수 없는 현실에서 차선책이었던 것 같다. 슬그머니 한 쪽 발을 들어 다른 한 쪽으로 옮겨 놓았지만, 자신의 출세와 안일한 삶을 위해 독립군에게 해를 끼치는 정보를 일본에 넘겼을 뿐이라고 할까. 그런 그에게 히가시 부장은 매우 중대한 일을 맡긴다. 경성으로 오는 폭탄의 밀반입을 막도록 할 뿐만 아니라 일본경찰이 최고 현상금을 걸고 수배하고 있는 정채산(이병헌, 김원봉을 모델로 한 캐릭터다)을 체포하기 위해 이정출을 밀정의 신분으로 상해의열단에 잠입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정출을 미덥지 않게 생각했던 히가시 부장은 일찌감치 일본인으로 귀화한 경찰 하시모토(신성록)를 통해 이정출을 도와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면서도 그를 은밀히 감시할 것을 지시한다.

그런데 이정출은 정채산을 만나 오히려 그에게 설득 당한다. 이정출은 신념에 따른 변절자가 아니라 다만 조선의 독립을 생각할 수 없었던 어두운 시기에 많은 변절자들이 택했던 길을 간 인물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소신형 변절자가 있었다면, 이정출은 생활형 변절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채산과 이정출의 밀고 당기는 관계에서 누가 누구의 미끼를 물었는지는 끝까지 가 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정채산은 이정출이 던진 미끼를 기꺼이 물었고, 이정출 역시 정채산이 던진 미끼를 쉽게 외면할 수 없었다. 이정출은 히가시 부장(츠루미 신고)과 정채산 사이에서 어정쩡한 입장과 태도를 반복한다. 이정출 캐릭터에서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이 어정쩡한 입장과 태도를 연기함에서 배우 송강호는 단연 압도적이었다. 그에게서 오늘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정출은 의열단을 도운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되고 또 출소한 후에는 생활형 변절자에서 소신형 변절자로 바뀌어 적극적으로 의열단 활동에 가담한다. 영화를 보는 많은 관객들에게 강하게 파고드는 질문이 있다. 그의 변화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비록 몇 개의 장면들을 통해 그럴만한 정황을 보여주고 있지만, 분명하게 제시되지는 않고 있다. 아마도 실제 인물인 황옥에 대한 역사학계의 상반된 평가를 의식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확실하게 정리되지 않은 인물에 대한 평가를 유보한 것이리라. 그의 변화와 관련해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는다면, 정채산과 함께 술을 마신 장면과 그 후에 그와 함께 간 밤낚시 장면이다. 정채산은 이정출이 자신을 잡으러 온 밀정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스스로를 거침없이 노출시켰고, 또 스스럼없이 술잔을 기울인 것에 대해 이정출은 깊은 인상을 받는다. 이 만남에서 정채산은 여전히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는 이정출에게 이렇게 묻는다. “사람은 언젠간 이름을 올려야 할 때를 맞습니다. 그때 어느 역사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이 질문을 통해 정채산은 자신이 이정출을 신뢰하고 있음을 나타내보였다. 이것은 이정출이 평소에 신념으로 삼고 있는 말, 남자는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위해 인생을 건다는 말을 염두에 둔 대사라 생각한다. 여하튼 이정출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던 정채산은 이정출을 무조건적으로 믿어주었던 것이다. 이정출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면서도 모든 것을 숨김없이 다 말해주는 것에서 정채산을 현상금이 걸린 인물이 아니라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으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정채산의 계획을 목숨 걸고 도왔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폭탄을 경성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의열단 내에 있는 또 다른 밀정 때문에 많은 희생자가 있었고, 작전은 실패한 듯 보였다. 그러나 신념이 바뀐 이정출에 의해 작전은 부분적으로 성공한다. 일명 일본 경찰 경부가 주도하여 일어난 폭탄 사건이 성공한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정채산이 이정출에게 전해준 대사는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는 실패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실패가 쌓이고 우리는 그 실패를 딛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3.

역사의 실존 인물을 모델로 만들었기 때문에 더욱 깊은 여운을 남겨주는 것 같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만일 우리가 그 당시로 돌아간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항일의 편에 설 것이며 또 누가 친일에 설 것인가? 그리고 회색지대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이정출의 경우엔 그나마 뒤늦게 속죄의 기회를 가졌기에 마지막에는 조국을 위해 싸울 수 있었고, 그를 통해 우리는 시대의 굴곡에서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며 고통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살아갈 방법을 찾아 다녔던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정출은(친일파로서 살다가 해방 후 애국자로 변신하여 아무런 속죄도 없이 지금까지도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 득세하고 있는 친일파들과 그들을 비호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며 우리가 품고 가야할 숙명일 수밖에 없다. 이정출을 거울로 삼아 스스로를 삼가도록 할 일이다. 비록 실수할 수는 있어도 진실을 향한 걸음을 포기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앞서 인용한 정채산의 마지막 대사는 이정출을 향한 말이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곳에서 어정쩡하게 서성거리며 거듭 실패하는 우리 자신에게 던진 말이 아닐지 싶다. 마지막 장면에서 폭탄을 갖고 총독부를 향해 달리는 의열단의 모습이 나에게는 질문으로 들렸다. 누가 총독부를 향해 달릴 것인가?

 

끝으로 이정출의 변화에 얽힌 이야기가 주는 기독교적인 의미를 생각해보자. 첫째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성거리는 신앙인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확실한 정체성을 갖고 살기보다 한 발은 세상에 두고, 다른 한 발은 하나님 나라에 두면서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옮기는 삶을 살고 있진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신앙에서 어정쩡한 태도는 우상숭배로 이어질 뿐이다. 세상과 하나님은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싸웠던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는데, 영화를 통해 자화상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귀 기울여야 할 말씀이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열상18:21)

 

둘째는 신뢰의 힘이다. 사람은 보통 신뢰할 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을 신뢰한다. 자격이 있거나 조건을 갖추었거나 신뢰할 만한 배경이나 능력이 있을 때, 그 때 사람을 신뢰한다. 자격과 조건과 능력을 보는 이유는 일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서이지만, 무엇보다 일을 맡기는 사람이 안심할 수 있기 위해서다. 신뢰를 확인할 수 없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근심과 염려가 끊이질 않는다. 이에 반해 하나님은 우리를 신뢰하신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거나 자격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에 결코 이를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신뢰를 주신다.(5:6~11) 우리에게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고, 또 당신의 일을 우리에게 위임하시며, 우리가 서로를 돌보라고 하신다. 그것도 자신을 배신했던 베드로에게 나타나 말씀하셨고, 오늘 우리 같은 변절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이며, 또한 우리를 무한히 신뢰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사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성공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고 또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부름을 받은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결과는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다만 기대하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이 주실 영생이다.

 

셋째는 삶의 변화를 위해서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필요하다. 정채산과의 만남 이후 이정출의 변화는 흡사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난 사건을 연상케 한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삶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확실한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는 길 밖에 없다


최성수 박사가 본 <밀정>은?   기독교적 가치              작품성          대중성 


최성수  서강대 철학을, 본 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호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특히 영화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신학과 영화라는 주제를 깊이 있고, 적절하게 녹여 여러 매체를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문화선교연구원의 취지 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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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은 교회의 문화선교를 돕고, 한국 사회문화 동향에 대해 신학적인 평가와 방향을 제시, 기독교 문화 담론을 이루어 이 땅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신실하게 참여하고자 합니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와 영화관 필름포럼과 함께 합니다.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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